물방울 다이아를 흘린 적 있다 외 4편
구름층이 일어나는 일이다
흑백을 가르는 건 대단한 사건이 아니니까
아침, 어김없이 몇 개의 얼굴을 물에 담갔다가 거울을 본다
(김환기의 물방울이 액자를 깨뜨린다)
눈알이 싱싱한 생선과 신선한 채소들
악몽에 묻힌 물방울을 떠올린다
진한 민트향의 거품이 불안을 보글거리며
거울에서 흘러내린다 서로 깊이를 숨긴 채
태풍의 중심에서 구름은 보이지 않는다
서로의 표정은 들여다볼수록 낯설고 기억이 옅어진다
(우리는 악몽을 지금까지 끌고 왔지)
오늘 밤 꿈속을 흐르는 땀방울들
구름을 몰고 들어오는 태풍은 몇백 킬로미터의 꿈을 꾸는가
(물방울에서 물고기 비늘이 빛난다)
내 안에 또 하나의 내가 흑백 그림자 찾기를 한다
바람이 부는 일이다
흑백을 가르는 건 푸성귀만 못하니까
(편의점에서 다이아를 고르는 일이다)
얼굴들이 손가락 사이로 쏟아진다 오랜 시간
아무렇지 않게 녹아내리는 눈동자
안녕, 물방울을 놓아주는 일이다 뒷모습 밖으로
구름의 행방을 찾는다 멀어지는 룸미러 속에서
생강나무
산수유축제날 나무들이 그림자놀이를 하고 있었다
내 어깨 위에 통증 같은 꽃이 폈다
축제를 위해 꽃은 얼마나 고단했던가
꽃소식을 건너간 얼굴들이 생강꽃처럼 노랬다
눈동자에서 맴돌던 너머 너머의 표정들
생강나무순처럼 움찔거렸다 발걸음마다
아무렇지도 않게 잊힌 이름들이 따라다녔다
누군가 나뭇가지를 잘라보면 속내를 안다고 했다
봄꽃을 따라가다 바람을 돌려세우면
한 겹 한 겹 벗겨지며 가시만 남긴 실종
가지에서 가지로 낮은 구름을 몰고 가는
날갯죽지가 길어졌다 봄날이었을
어디선가 새 울음이 봄의 목소리를 반음 올렸다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
생을 강이라 부르고 싶은 날들이 있었다
봄꽃은 진즉 나의 시선 밖에서
흔들렸다 축제날, 국숫발처럼 이름들이 바람을 타고 있었다
산수유를 생강이라 부르는 기억들
생강나무 아래서 노랗게 익어 갔다 그날 밤은
꽃이 다 질 것 같은 빗방울들이 까만 발등에 쏟아졌다
담장을 사이에 두고
고양이는 죽을 때 태어난 곳을 찾아간다는데
저음의 냄새를 좇아서
침묵으로 가득한 동공을 열고
떠났던 길들이 검은 입구를 열어준다
나는 죽음의 피가 흐르는 숲으로 가고 있다
계절마다 검은 그림자들을 가득 채우고
사라질 것 같은 얼굴에서 달이 뜨고 진다
한 열흘 꽃이 피고
벚나무마다 톱날이 박히고
잘린 가지마다 발톱에 닿으려고 소리가 난다
순간에도 움켜쥐고 놓지 못하는
눈 속의 검은 물방울
버찌마다 매달린 검푸른 속울음
담장을 사이에 두고, 한 사람과 또 한 사람
벚나무 가지에서 날카로운 울음이 흩어진다
눈을 감는다 고양이의 느린 걸음 속
숲으로 뿌리를 뻗는 달빛이
눈동자 사이로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것 같다
빈 가지들이 바닥을 하얗게 덮고 있다
나비춤
휘청거리는 간격만큼 유월이 가까워져요 알갱이와 알갱이들이 울타리 밖으로 허리를 꺾어요 안간힘을 쓰며 잔가지들이 부러져요
나는 바람에 기웃거리지 않는 열매, 중력을 내려놓고 가벼운 날개로 있을 거예요 허방을 딛고 마디마디 햇살이 흔들려요
바람 속에서 주저앉아 본 적 있나요 이파리들은 날개가 되고 싶어요 가지 끝에서 새날이 자라나 온종일 흔들려요 언덕마루마다 새순처럼 돋아나는 춤사위가 있어요
나는 포도송이처럼 알알이 나를 밀어 넣어요 녹음 안으로 안으로 좀 들어가 보세요 나는 빈틈없이 푸른 꿈에 매달려야 춤출 수 있어요
(나는뜻밖의과일이에요꿈꾸는동안에도비탈길을올라가는춤은여름의목소리를낼거에요언덕에서날개를펴고싶어포도나무에게기대요날갯죽지에서차가운바람이불어요)
포도알들이 별자리를 들락거려요 나는 평상에서 손 베개 하는 사람과 애벌레처럼 잠이 든 사람 사이에서 여름의 알갱이들을 닦아주는 나비에요
달빛에 익어가는 열매들 밤하늘 별들을 모아 포도송이와 섞어요 어젯밤에는 뒤따라오던 달이 박스 곁에서 미끄러져 같이 웃었어요
달빛이 가물대는 마을길 포도송이처럼 얼굴과 얼굴, 눈빛과 눈빛들이 나비춤을 추며 따라와요 어둠에서도 둥근 것들은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나 봐요
반복과 번복
더 당겨도 될까? 윤곽이 흐릿해질 수 있게
사람들이 얼굴을 끌고 들어오네
표정으로 살아갈 소문의 무게는
이마에서 코로, 입술에서 광대뼈로
얼굴을 잡아당기니 시간이 줄어드네
주름이 펴지고 이목구비가 드러나네
얼굴 뒤에 표정은 얼마나 외로운 광대인지
이목구비는 늘 같이 붙어살면서도
반대편의 거울을 내놓네
마치 청룡 열차로 레일을 달리는 반복처럼
콧대는 시선으로 높아져야 날아오를 수 있네
우리는 모르는 얼굴들이 너무 많아
서로가 모습과 모양 사이에서
수없이 질문을 하고 손톱과 발톱을 숨기네
통증이 뼈마디로 젖어들 때까지
그러니까 표정으로서 쉬지 않고 번복하겠네
태양이 머리 위를 도는 것처럼
이마를 파고드는 주삿바늘과 화장술엔 달인이네
주름 밖에서 오래된 혈관의 출혈 같은
소리를 질러보는 거야
어제가 보이지 않게 몸에서 질주하네
오늘 그리고 내일은 칼끝에서 열려있네
표정 없는 세상을 너무 당겨서
지나가 버리는 얼굴들
지구가 돌 듯 그것은 반복이네
얼굴로 가슴으로 뱃살로 번복이네
제 7회 포에트리 문학상 수상자 양소은 심사평
축어적 묘사와 비유적묘사의 차이
박정이<시인 문학평론가>
양소은 시작품 <물방울 다이아를 흘린 적 있다> 외 <생각나무> <담장을 사이에 두고> <나비춤> <반복과 반복>을 과감한 착상으로 내놓았다. 구름층이 일어나듯 몇 개의 얼굴을 물에 담갔다가 거울을 본다는 <물방울이 액자를 깨뜨린다>는 김환기 상상력처럼 양소은 시인은 또 하나의 시의 그림자 찾기를 했고 낯설고 기억이 옅어지는 상상력을 묻어냈다. 조금은 관념의 의인화도 느껴지지만 그동안 써온 시적행보에 시의 큰 혼불을 담았다. 물방울의 빛은 모든 빛을 흘리고 물빛만 내뿜는 환유적인 빛을 남긴 것이다. 다섯 작품이 모두 좋지만 작품마다 특징이 있고 한 줌의 시 연료가 유형화 되지 않는 시작품의 화자와 현실 속의 나를 끌어들인 창조적 공간으로 작품 속의 존재를 잘 그려냈다. 특히 이번 수상작은 <물방울 다이아를 흘린 적 있다>를 우리 포에트리 심사위원들 모두 수상작으로 뽑았다. 좋은 작품을 써준 양소은 시인에게 다시 한번 축하박수를 보낸다. 넓은 문단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유망 있는 시인이다.
수상소감
하나의 꽃은 또 다른 봄을 만나 새로운 날이 됩니다.
시는 내 안의 여럿인 나를 만나는 나의 의심이며 포즈입니다.
문학상 소식을 듣고 시와 나의 거리를 새삼 확인해봅니다.
시를 쓰면서 여러 갈등이 많았습니다. 병으로 인한 게으름과 가정의 일들로 시를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던 두려운 순간들이 많았지만, 나도 모르게 시만은 써야 한다는 강박이 나를 일으키고 여기까지 오게 하였습니다.
처음엔 무언가를 이루겠다는 마음으로 시를 썼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시는 내가 무엇을 이루기보다 무언가를 즐기려는 생각으로 마음 든든한 지지를 보내주었습니다. 이제는 시가 음악처럼 생활의 리듬이 되었습니다.
시의 자리가 갈수록 점점 좁아지는 느낌입니다.
앞으로 더욱 사물과 자연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생활 속에서 공감능력을 키우며 마음 깊숙이 나를 찾아보겠습니다. 그리고 기쁨과 함께 고마운 얼굴들이 많이 떠오릅니다.
봄날의 꽃처럼 수상의 영광을 주신 심사위원님과 포에트리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