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성 이론
方 旻
세상에는 수많은 이론들이 있다. 각 분야별로 인류가 이룩한 문명의 핵심들이 바로 이론이란 이름으로 정리되어 존재한다. 또한 수많은 학자들의 고독한 연구와 열정의 결과가 이론으로 남는다. 이 이론들은 후대 학자가 선배의 이론을 수정하거나 바꾸기도 하고 잘못되어 사라지기도 한다. 물리학의 대가인 아인슈타인의 이론 중에 유명한 것으로 상대성 이론이 있다. 상대에 따라 우열의 판도가 달라지는 것, 선호가 변하는 것이 내 나름으로 해석한 상대성 이론이다.
이것은 물리학의 정수이지만 이것을 생활에서 발견하였다. 물론 이것을 그 이론에 결부시키는 것이 어떨지 모르지만 그렇게 부르고 싶다. 과학의 어려운 이론이 현실에서 만난다면 이것은 정말로 인간에게 유용한 실용적 학문이 아닌가. 학자들의 물리학 연구실에서 그들만의 논쟁의 범주에서 벗어나 세상살이에 응용이 된다고 생각하면, 혹시 잘못 이해한다손 치더라도 학자들이 용납해 주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그 적용담을 풀어본다.
나는 어려서 자랄 때 말이 별로 없었다. 실상 말이 필요 없었는지도 모르지만, 세 명의 누나들과 살면서 사내인 내가 뭘 얼마나 말을 해야 했을까 싶다. 아마도 누나들이 답답해 했는지 나를 일러 목석이라 했다. 별로 말이 없으니 감정도 없는 나무와 돌로 비유해서 나를 대했다. 그럴 만큼 말이 없었다. 당시에는 내가 상대적으로 말을 하지 않는 사람으로 상호간에 인식한 채 살았다. 이런 상태가 그대로 유지되며 살게 될 걸로 알고 지냈다.
그랬는데 요즈음은 우리 집에서 말이 많아졌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상황이다. 보통의 경우에는 집안에서 여자가 말이 많다. 우리 집은 이와 다르다. 내가 말이 많아졌고, 아내가 말이 줄었다.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나 요즘의 우리 집 풍경이 그렇다. 애초부터 그런 것은 아닌데, 다니던 직장을 퇴직한 뒤의 아내의 변화이다. 집에서 직장의 일을 곧잘 얘기하고 나는 그것을 들어주는 식이었는데, 크게 다를 것이 없는 나날의 집안일이 반복되니 할 말이 없는지 말수가 줄었다. 대신에 내가 전보다 말이 늘었다. 말이 상대적으로 많아진 셈, 우리집의 말수 상대성 이론이다.
청소의 경우도 그렇다. 뭐 그렇게 나부터 깨끗이 정리하는 체질은 아니나, 그래도 가끔은 주위를 정돈하고 살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정도도 안 사람에게 비하면 아주 우월한 편이다. 아내는 주부의 본질을 잊고 사는 게 정도로 알고 있다. 주부의 부(婦)란 한자는 비와 걸레를 든 여자를 형상했다. 그만큼 여인은 청소가 본업인 셈이지만 아내에게만은 먼 우주의 얘기일 뿐이다. 걸레를 들거나 빗자루를 든 모습을 본 기억이 애당초 없다. 그만큼 청소라는 것은 그네에겐 무관한 일이다. 이렇다 보니 내가 청소를 하게 되고 그래서 상대적으로 우리 집에선 청소를 잘 하는 셈이 되어버렸다. 이것이 만약 본업에 충실한 주부가 사는 집이라면 어림도 없는 일이 될 게다. 이것 역시 우리 집의 상대성 이론의 한 현상이다.
세상살이에 모두 해당하는 게 바로 ‘상대적’이란 말이다. 우리는 경제부흥으로 세계 7대 무역 대국에 올랐고, 개인 소득도 2만 불이 넘었다. 그렇지만 이것은 여러 문제를 낳고 있다. 전체적으로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도성장하고 향상되었으나 그런 과정에서 소외된 사람들도 상당히 많다. 이 부(富)의 편중으로 상대적 빈곤을 느끼고 문제가 되는 사회로 진입하였다. 특히 물질의 소유와 사용에 대한 상대적인 박탈감이 크다. 주거 형태인 아파트는 면적에서 상대적으로 빈곤감을, 차량의 소유도 역시 상대적인 편차를 느끼며 불편해 하고 불만스러워하며. 심지어는 자신과 상대적인 사람에게 적대적인 심정을 지니며 때로 표출하기도 한다.
과학에서 제기한 상대성 이론이 실상 이처럼 인간의 삶에 밀착되니 과학이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실감한다. 그러면서 이 상대성 이론에 대해서 나는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가에 결국 귀착이 된다. 절대자가 아닌 한 어느 분야의 종목에서라도 상대적인 우열이 있게 마련이다. 우월한 상태와 열등한 경우에 각각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이런 문제에 대한 답을 나는 맹자의 중용에서 찾는다. 그래서 나는 특별히 ‘적당히’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양 극단에 서지 않고 중간자의 삶으로 만족하면서, 이쪽도 저쪽도 아닌 중간 어디쯤 ‘적당히’ 자리잡고 살고 싶다.
그러나 이것을 다르게 보면 어느 한편을 선택하지 않고 중간에서 양쪽의 눈치를 보는 회색분자로 치부할지 모른다. 그리고 형세를 보아서 더 강하고 좋은 쪽에 영합하려는 기회주의자로 몰 수도 있다. 어떤 면에서 본다면 그런 편 가르기가 옳은 지적이다. 그래도 나는 오히려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고, 그 양 극단의 선택에서 잠시 비켜나서 관망하거나 더욱 진전하여 초월의 위치에 선 것이라고 변명하겠다. 아니 갈등과 다툼에서 한 발을 빼고 유유자적한 듯이 살고 싶고, 그런 태도로써 세상을 바라보고자 하는 것뿐이다. 비유한다면 과거 한유한 조상들의 귀거래사의 삶을 동경하고 그를 따르고자 함이다. 이것이 나에게 적용된 상대성 이론의 실체라 믿는다.
첫댓글 진정 사회학적인 상대성이론을 습득하셨네요. 상대가 있어야 성립되는 이론,
우린 살아서도 죽어서도 그 이론에 갇히는 존재죠. 상대에 의해서-ㅎ
이렇게도 상대성 이론을 적용하셨군요. 잘 읽었습니다.
ㅋㅋ 저는 하루도 청소를 안하면 잠이 안옵니다. 부부가 둘다 그러고 있어요.
@방민 상대성이론이 적용되어야 잘 맞는 부부 같아요.
저희는 둘다 그러는데 잘 안맞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