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봄
78년 5월, 나는 신병교육대 훈련소 코스를 빡세게 두 차례 거치고 막사에 전입한 작대기 하나짜리 소총수 이등병이었다. 의정부 지나 동두천 지나 휴전선에서 버스로 한 시간가량 떨어진 한탄강 어디쯤 교육사단이었다. 불안한 가슴으로 트럭에서 내린 그 대대 막사에 붙은.
‘훈련은 무자비하게, 놀 때는 자유롭게’
그 구호를 보는 순간 소름이 오싹 끼쳤다. 실제로 훈련은 무자비했지만 놀 때에는 전혀 자유롭지 않았다. 축구 경기에 지면 소대별로 대가리를 박았고 술 마신 뒤끝에는 막사 뒤로 집합시켜 두들겨 패었다. 자는 병사들을 깨워 수시로 아구통이나 앞차기를 넣었으므로 몇 대라도 맞아야 잠자리가 편안했다.
그 막사에 입(入)한 이틀 후 나는 완전군장 100킬로 행군에 투입되었고 그 24시간 고난의 여정이 끝나자마자 벙커 작업 질통조에 편성되어 날마다 시멘트를 지고 하루 8차례씩(오전, 오후 네번씩) 천보산 정상까지 오르내려야 했다. 벙커 작업 지난한 사연은 나중에 따로 할 얘기이지만.
“10분간 휴식!”
천보산 꼭대기로 질통 지고 하염없이 오르다가 잠깐 쉴 때마다 고참들은.
내가 이등병 시절에 막 보직을 옮기면서 얼핏 스쳐 지나간 투스타 ‘장태완 사단장’ 이야기를 풀어
놓곤 했다. 엄칭이 훈련을 시키고 엄칭이 뺑뺑이 돌린 건 맞는데 기실 나는 그의 얼굴이 전혀 생
각나지 않는다.
그저 힘이 들으니 오로지 세월이 빨리 지났으면 하는 바램뿐이다. 장 소장이 떠난 후 임용된 배
소장마저 ‘태권 사단’이란 마크를 붙여준 뒤 날마다 뺑뺑이를 돌렸으므로 눈만 뜨면 ‘앞차기’ ‘옆차
기’ ‘돌려차기’에 심신을 빠트려야했다. 척추가 아파 태권도 시범 자세가 나오지 않았던 나로서는
참으로 지옥처럼 힘든 시간이었다.
그러나 고참들은 장태완 장군의 ‘알통 사단’ 시절보다는 지금이 훨씬 나은 거라며
“쨔샤, 옛날에 더 힘들었어.”
다행인 줄 알라는 느긋한 표정이다. 그러니까 장 소장 때는 날마다 역기와 아령, 평행봉이나 팔굽혀펴기에 매달렸단다. 나는 평행봉과 팔굽혀펴기는 잘하는 축이었는데 관절염으로 구보에는 완전 팥죽이었다. 전입한 직후 주 1회 10킬로 구보(완전군장)와 월 1회 100킬로 행군이 있었다. 나는 10킬로 구보 때마다 낙오를 하다가 일병 1호봉 때 마침내 주파를 했으니 그게 짬밥의 위용이다.
79년, 상병 초입 나는 이차저차 사연을 거쳐 대대 취사병으로 보직을 옮기면서 아주 행복한 군생활로 변신할 수 있었다. 솔직히 취사복이 뽀대는 나지 않지만 내 체질에 딱 맞는 보직이었다. 새벽에 눈 뜨자마자 쌀을 씻고 배추와 생선만 개념 없이 자르다 보면 밤이 되는 그 일상이 그리도 안락했던 것 같다. 유격은커녕 점호도 없었고 취사병 고참이 집합시킬 때만 제외하면 단체로 줄을 서서 빠따 맞는 행태도 면제받았다. 이따금 보병 시절에 나를 괴롭히던 소대장이나 내무반장들이 취사장 문을 빼꼼 열고 애절한 표정으로.
“오뎅이나 라면 몇 개만 빼줘. 미안. 우리 소대 회식이거덩.”
애절하게 부탁하면 예전에는 벌벌 떨던 그들에게 뻣뻣한 자세로 절반의 반말을 섞어.
“이번만이여. 자주 오지는 말랑께.”
슬쩍 건네주는 재미는 덤이었다.
그런데 보병들은 예전보다 더 고달팠다. 언제부터였나, ‘폭동진압’이란 특별한 훈련 명칭이 하나 더 붙은 것이다. 총검술에서도 ‘쩔러- 찔러- 길게 찔러’ 소리 지르며 총구를 앞으로 내미는 식이 아니라 앞발과 총을 허공에 높이 들었다가 휙휙 내리면서 워커 밑바닥으로 땅을 쿵,쿵 짓밟는 식의 위압적 동작이었다.
그리고 툭하면 비상 사이렌이 터지곤 했다. 중대별 축구를 하거나 회식 술을 마시는 와중에도 비상 싸이렌만 터지면 모든 동작을 중지하고 연병장에 후타타탁 집합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취사병으로 발탁되면서 밥 짓기에만 몰입하면 모든 게 열외가 되었으니 다행이었고……솔직히 머리가 텅 빈 채 아무 생각이 없었다.
내가 연도를 처음 기억했던 건,
1963년이었다. 여덟 살 2월 즈음 이웃집 소꼽친구 이현숙이네 사랑방에 놀러 갔더니 중학생이던 그의 오빠 이덕원 형님꼐서 달력을 가리키며 ‘올해가 1963년’이라고 가르쳐주었다. 대통령은 박정희였는데 그로부터 18년 내내 그가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았으므로 그의 이름이 나의 성장기와 함께 했다는 표현이 적확하다. 그러니까 다섯 살 때만 해도 딱지치기를 할 때 대통령이 나오면.
“대통령은 헐러깨비여.”
하며 넘겼는데 그때가 아마 윤보선 대통령 시절이 아니었던가 싶다. 그 후 초딩 6년 내내 박정희 한 사람이었고 사춘기 내내 그 사람만이 대통령이었다. 장발족 청년 시절에도 그였고 군대에서도 마찬가지였으므로 이 땅의 대통령은 그 사람 하나뿐이고 아무도 넘보지 못하는 철옹성인 줄 알았다.
그런데 취사병 상병인 그해 79년 10월 말 어느 날 박정희 대통령이 부하의 총에 맞아 죽었다는 것이다. ‘김재규’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으마 그저 어리둥절했을 뿐이다. 휴가를 떠났던 군인들이 긴급 귀대를 했고 슬픈 표정으로 시국의 정보를 전해주면 그저 고개만 끄떡거렸다. 중대장이나 소대장 모두 뻣뻣하게 굳었으므로 나도 비슷한 표정을 지었던 것 같다. 그런데 참모부에 있던 체구가 작은 동기생 하나가 낮은 소리로.
‘지금부터 민주화가 시작되는 거다’
그런 귀엣말을 전해줘서 ‘아, 세상을 판단하는 눈이 다양하구나’를 처음 느꼈다. 대통령이 죽었는데 민주화를 논할 수 있구나.
그해 12월 직후 비상 싸이렌이 터질 때마다 보병들은 완전군장으로 연병장에 집합하곤 했다. 정확한 정보는 몰랐다. 그저 싸이렌 소리가 연병장을 가르면.
“데모하는 놈들 땜에 쉴 수가 없네. 박살 내겠닷! 시헐, 시헐.”
집합 대열로 시불시불 달리며 이빨을 갈아마시는 군홧발 풍경을 불안하게 바라보며 취사장 문을 열었다. 그뿐이었다. 그저 취사반 쫄병들을 닦달하며 김치를 자르고 생선을 썰고 된장을 풀었다. 라면은 팅팅 부풀려서 배식대에 올렸고 동태 상자는 도끼로 뽀갠 다음 양동이 물을 퍼붓고 가마솥에 쏟아부었다.
그런데 어느 사이에 군인들 입에서도 ‘전두환’이란 이름자가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수경사 장태완 사단장과 공수특전단 전두환 소장이 기싸움이 팽팽하다는 정보도 얼핏 흘려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총소리 터치며 맞붙은 ' 환'과 '완'의 싸움은 '환'의 승으로 일단락되었다. 승자는 옥좌에 앉았고 패자는 지하실로 끌려갔다. 그러거나 말거난 나는 생선 상자를 접수해서 도끼로 뽀개고 양파 자루를 받아 식칼로 북북 찢어서 대대사병 600명의 식사를 준비할 뿐이었다.
80년 5월 광주항쟁이 터지던 어느 오밤중, 우리 부대원들은 트럭에 실려 서울로 떠났다. I대를 지키는 공수부대가 광주로 떠나면서 그 빈자리를 채운다는 소문이다. 나중 얘기지만, I대로 아들을 찾아 면회를 온 부모님에게.
“그 공수부대 사람들은 광주로 갔는데요.”
소식을 전하자 부모님 모두 ‘우리 아들 죽었다’ 하며 전봇대 끌어안고 울더라는 소문도 들었던 것 같다.
그러나 제대를 얼마 앞둔 취사병 병장인 나는 막사에 남아 역시 제대 날짜를 얼마 앞둔 소종수 잔류 갈참들을 위해 밥 짓는 역할을 따로 맡게 되었으니 아무 상관이 없었다. 좌우지간 제대 일주일 전까지 나는 염적무를 자르고 가마솥에 된장을 풀고 불을 지폈다.
『서울의 봄』 전체에서 취사병은 딱 한 번만 언급된다. 광화문 앞에서 장태완의 수경사와 전두환의 공수부대가 대치하기 직전의 배경이다. 동원된 군인의 수가 너무 적자 장 소장이 부하 소령에게.
“취사병까지 다 배치시키란 말이야.”
말하는 장면이다.
그러나 원래 취사병은 전투 부대가 아니라 밥 짓는 군인이다. 이순신의 명량해전에도 취사병이 있어여 전쟁터에 나갈 수 있고 수 양제의 100만 대군이 고구려 정복을 위해 원정 올 때에도 밥을 먹어야 부대가 돌아간다. 시리아 전쟁이건 포에니 전쟁이건 베트남 전쟁이건 밥이 없는 전쟁은 절대 불가능하며 그 밥은 취사병이 짓는다. 여기까지만 하고.
아무튼 시국은 흉흉했다. 이회택의 뒤를 이은 차범근이 주름잡던 축구장의 환호성이 잠깐 멈췄고 가수 윤항기의 누이동생 윤복희가 매끈한 허벅지 맨살로 무대를 휘어잡던 미니스커트 춤 동작도 일시 정지되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느리게 흐르는 시계추만 바라보며 ‘왜 불러, 왜 불러, 돌아서서 가는 사람을 왜 불러’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밥을 짓고 배식구를 통해 국을 넣어주며 제대 날짜만 기다렸던 것 같다.
‘거꾸로 매달아도 국방부 시계는 돌아간다’
그 주문처럼 3년 세월이 흘렀고 나는 마침내 개구리복을 입게 되었다. 조치원 예비사단에서 신고식을 마치고 쏘주, 쏘주에 젖으면서 제대 동기생 몇만 남고 이 세상 모든 풍경이 사라져 버렸다.
신군부 정권의 실체를 안 건 제대 직후에 접한 정보이다. 복학생이 된 내가 캠퍼스에 왔을 때는 착검한 군인들이 두 줄로 서서 정문을 지키고 있었는데 한결같이 마네킹 같은 무표정이었다. 교문을 지키는 예전의 내 쫄병들 군복을 보며 바싹 얼어붙었던 이유를 모른다. 나는 그저 철뚝길 건너편에 자리잡은 채 저물녘까지 망망 서 있었을 뿐이다. 소줏잔을 몇 차례 털어놓으면서 칠흑같은 어둠이 순식간에 세상을 덮었다. 1980년 늦여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