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실험자가 인공 꽃밭을 조성한 뒤 노란 꽃에는 꿀벌이 좋아하는 즙을 바르고, 파란 꽃은 그냥 비워 두었습니다. 그리고 어린 꿀벌 떼를 인공 꽃밭에 풀어놓았습니다. 처음에는 노란 꽃과 파란 꽃에 비슷한 수의 꿀벌이 앉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파란 꽃에 앉은 꿀벌은 줄어들고 마침내 꿀벌 전체가 노란 꽃으로 날아갔습니다. 이런 식으로 몇 번 실험을 하자 어린 꿀벌들은 더 이상 파란 꽃으로는 날아가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실험자가 규칙을 바꾸었을 때 발생했습니다. 이제 파란 꽃에 즙을 넣고 노란 꽃은 빈 채로 두었습니다. 예상에 따르면 꿀벌은 점점 학습을 하여 노란 꽃을 떠나고 파란 꽃으로 옮겨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꿀벌은 고집스럽게 노란 꽃만 계속 찾아 다녔습니다. 영양이 부족해 계속 기운을 잃는 와중에도 꿀벌은 이 행동을 버리지 못했고 결국 꿀벌 전체가 죽고 말았습니다. (에얄 빈테르 저, 협상가를 위한 감정수업, 분노와 신뢰의 행동경제학 中)
환경이 바뀌지 않는 한 고정관념이 생존에 더 유리합니다. 호기심 때문에 즙이 없는 파란 꽃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꿀벌은 다른 꿀벌보다 즙을 덜 먹게 되고 결국에는 생존 경쟁에 뒤쳐질 수 있습니다. 소싯적 학습한 대로 움직이지 않고 엉뚱한 곳을 기웃거리는 호기심 많은 철새일수록 목적지에 이르지 못하고 죽을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하지만 환경이 (즙이 노란 꽃이 아니라 파란 꽃에 담기는 상황으로, 또는 기후 변화로 최적 서식지가 바뀌는 쪽으로) 급변했을 때는 달라집니다. 이제는 고정관념을 버리지 못하는 생명이 생존하기가 힘들어집니다.
우리 인간은 꿀벌과 달리 편견과 고정관념에 맞서 자신의 행동을 바꿀 능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환경은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설령 환경이 바뀌더라도 그 사실은 시간이 한참 지났을 때에나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인간이 환경에 적응을 잘 할 수 있는 존재이기는 하지만, 현실을 ‘낯설게 보고 행동하기’가 그리 쉽지는 않은 이유입니다.
서론이 길었습니다. 임책방에서 고정관념과 충돌하는 책들을 자주 읽다 보니 이제는 책을 읽을 때마다 고정관념을 바꿔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져버렸습니다. 이번 책 ‘노화의 종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의 경우 이 책의 현란한 말재주에 넘어가서인지 노화는 ‘숙명’이라는 오래된 관념을 과감히 버리고, 노화는 ‘질병’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져 들었습니다. 변덕이 심하지요? 암튼 많은 사람들과 노화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이 책에서 제시한 인위적 처방(메타포르민, NMN, 레스베라트롤 등)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토론해 봤습니다. 의견이 조금씩 다르기도 하고 같기도 했는데, 재밌고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책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제 의견은 생략하고, 저와 조금 다른 의견, 그리고 책 내용에 대해서는 아래 수피아 님의 두 글에 훌륭하게 잘 정리가 되어 있으니 참고 바랍니다.
조금 덧붙이면, 저는 이 책(노화의 종말)과 김혜성 원장님의 책(건강수명 100세, 통생명 이론)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노화의 종말’은 특정 질병을 낫게 하기 위한 의학적 처방에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통생명 이론 역시 특정 질병을 낫게 하기 위한 약의 오남용에 반대합니다. 둘 다 아날로그적 생명의 활력, 즉 타고난 유전자를 조절하는 후성 유전체의 건강한 활동을 강조합니다. 둘 다 굵고 짧은 운동의 반복(HIIT)과 소식을 추천합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전자는 노화를 질병으로 보고 다소 인위적인 방식과 노력으로 노화를 늦출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후자는 노화를 성숙함으로 해석하고 인위적인 처방과 접근에 원칙적으로 반대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인위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의 경계가 모호하다고 느꼈습니다. 둘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다면 이 책과 김혜성 원장님의 책의 경계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이 활동하는 생건방에서 노화의 종말을 읽고 이런 문제에 대해 토론해 봤으면 하는 기대를 가져 봅니다.
임책방의 다음 책은 존 맥피 저, ‘네번째 원고’(글항아리 출판)입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미국 어느 교수의 구조적 글쓰기에 관한 지침서라고 합니다. 저는 글쓰기는 지침서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애니메이션 학과에 들어간다고 해서 좋은 만화를 그릴 수 있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 이런 고정관념이 이 책을 읽으면서 어떻게 바뀔 지 두 달 후가 기다려집니다. 다음 임책방은 12월 26일(토) 오후 4시입니다. 장소는 코로나 상황을 보면서 결정하고 아울러 코로나 상황에 맞춰 전체 공지를 할지, 단골 손님과 신청자 위주로 부분 공지할 지도 결정하겠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첫댓글 역시나 후기글^^ 잘 읽었습니다 잭모임 반장다운 자기성찰적 사유가 담긴 글입니다
책모임에는 못가고 후기를 통해 조금이나마 느낌을 얻어갑니다~^^
노반장님의 맛깔스런 글, 잘 읽고 갑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