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만하다(최인아)
최인아 ‘최인아책방’ 대표
“제가 그렇게 만만해 보여요?” 당신도 한 번쯤은 이 말을 해본 적이 있을 것 같다. 특히 나이도 어리고 직급도 낮은 사회 초년병 시절에. 만만하다는 것은 무서울 것이 없어 쉽게 다루거나 대할 만하다는 뜻이다. 그러니 약자들은 만만해 보일까 봐, 무시당할까 봐, 불이익을 당할까 봐 전전긍긍한다. 나도 그랬다. 내 의견을 굽히지 않았고 자주 고집을 피웠다. 80·90년대 여성 재킷은 어깨가 높고 뽕이 들어간 스타일이 유행이었는데 재킷뿐 아니라 어깨에도 잔뜩 힘을 주고 산 것 같다.
어느 해 회식 자리였다. 술이 몇 순배 돌자 꽤 떨어진 자리에 앉았던 선배 한 분이 내 쪽으로 오셨다. 평소엔 십 년이나 아래인 내게 꼬박 존대하는 분이었다. 그런데 술기운 탓이었을까. 그날은 다짜고짜 이랬다. "얘는 쪼끄만 게 어려워. 만만하지가 않아."
그러니까 만만해지지 말자는 목표는 이룬 거였다. 하지만 세상사는 좋기만 하거나 나쁘기만 한 건 없어서, 만만하지 않다는 건 달리 보면 쉽게 말 붙이기 어려운 사람, 곁을 주지 않는 사람이란 뜻이었다. 함께 일하기 어려운 사람일 수도 있었다.
잘해주면 권리인 줄 안다고, 반대 의견을 받아준다 싶으면 마구 넘어와 흔들고 무시할 것 같아 센 척했고 휘둘리지 않도록 벽도 쌓았는데 그러는 사이 혹시 내가 벽 안에 단절되지는 않았을까. 중요한 이견이 쉬 말해지지 못해 실패를 부르지는 않았을까. 머리를 맞대고 함께 궁리했더라면 훌륭하게 자라 꽃피웠을 아이디어들이 그냥 스러지진 않았을까….
지나야 보인다고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조금은 만만해지고 싶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이 어린 사람이 만만하기까지 하면 얕보이기 십상이지만, 일은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 철저히 고민하는 사람 중심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 겉으론 이리저리 치이는 듯 보여도 심지가 굳으면 머잖아 꽃피고 열매 맺는 것이 세상 이치인 듯도 하고.
만만하다…. 가만히 소리 내 보니 말도 만만한 것 같다. 청춘 시절은 이 말을 한사코 밀어내며 통과했는데 앞으론 좀 친해지려 한다.
첫댓글 똑부러지면서도 유연한 사고를 가진 분으로 읽혔습니다. 강의를 들을 때도 느꼈는데 글 속에서도 역시나 보입니다. 참 멋진 여성으로 기억합니다. 사회적으로 소위 성공하신 분이니 누가 봐도 만만해보이기는 어렵겠으나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의식하고 있다면 곁을 내어줄 수 있는 기회도 더 생기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분을 멘토로 여기는 많은 여성이 있을 것 같으니 부디 그리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