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죽박죽(안대회)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
기억에 또렷하게 각인된 우리말에 ‘뒤죽박죽’이 있다. 뜻이 깊거나 말이 예뻐서 기억나는 것은 아니다. 정조가 한문으로 써서 심환지에게 보낸 비밀 편지에 생뚱맞게 들어가서 기억에 남아 있다. 정조는 한 패거리 신하들이 뒤섞여 엉망으로 행동하는 짓을 보고 화가 나서 한문으로 편지를 쓰던 중에 이 말만은 한글로 썼다. 적합한 한자 어휘를 찾지 못한 탓은 아니다. ‘뒤죽박죽’이라는 우리말 어휘가 아니면 상황과 감정을 살리기 어려웠기에 구태여 가져다 쓴 말이었다. 아마도 정조는 속이 후련했을 것이다.
'뒤죽박죽'이란 말에서는 말과 글이 일치되지 않았던 시대의 답답함을 읽게 된다. 입에서 나오는 대로 자유롭게 글을 쓰는 사람은 그 답답함을 이해하기 힘들다. 언젠가 필사본 한문책 끄트머리에서 '순창고추장 담그는 법'이란 글을 본 적이 있다. 한문으로 조리법을 설명해 나가다 중간부터는 아예 우리말로 써 내려간 글이었다. 파탄이 난 그 글은 우리말로 쓰지 않으면 도저히 표현하지 못할 조리법을 적어보려 했던 고충이 보였다. 숙종 때 한문으로 쓴 책 '소문사설'에도 '순창고추장 담그는 법'이 있다. 여기서도 한문으로 쓰다가 '가루를 되게 쑤고' (메주를) '띄워', 전복을 '비슷비슷 저미고'와 같은 표현만은 우리말로 쓰고 있었다. 한문으로 쓴 조리법을 읽다가 우리말 표현을 보니 정겹기도 한량이 없고, 의미도 쏙쏙 들어왔다.
우리말은 의태어, 의성어가 발달하였다. 자연히 번역되기 어려운 표현이 많다. 말과 글이 일치되지 않은 시대를 살던 옛 한국인이 글에서 의태어를 살려서 쓰고 싶은 욕망이 얼마나 간절했을까? 정조의 편지에 생뚱맞게 들어간 ‘뒤죽박죽’은 그 간절한 소망을 살짝 드러낸 말이다. ‘뒤죽박죽’이란 말에서 나는 한국인다운 표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이 시대의 행복을 느낀다.
첫댓글 의태어 의성어. 얼마나 빨리 흡수되는 정겨운 언어인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