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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영 시인 소개
1월~12월
안개꽃
이별의 말
꽃불
달관
원시
눈물
언제인가 한 번은
뜨락
나를 지우고
동백꽃
라일락 그늘 아래서
추전역
구절초
너, 없음으로
욕정
피는 꽃이 지는 꽃을 만나듯
봄은 바이러스처럼
그리운 이 그리워
그리운 사람 다시 그리워
별 하나
바닷가에서
음악
블루스
봄은 전쟁처럼
화약
질그릇
장작을 패며
모순(矛盾)의 흙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양귀비빛
고향
벗꽃
겨울길
사랑의 방식
이별
사랑의 묘약
사랑
사랑의 고통
먼 그대
적의敵意
매화꽃 피어 봄이라는데
낙엽
새
떡갈잎 흔드는 저 바람이
더불어 살자
겨울 노래
설날
국화꽃
이별이란
라일락 그늘에 앉아
언어
낮잠
겨울밤에
봄은 무엇하러 오는가
바위는 무엇하러
지상의 꽃
흙의 얼음
세상은
자화상
이슬
밤비
스스로
불면(不眠)
산의 잠
빗속을 걸으며
당신의 피리
산문(山門)에 기대어
찻잔
살아있는 흙
난을 기르며
신神의 하늘에도 어둠은 있다
하나의 별
먹물 장삼
슬픔
이 그리움
피리
별
병
나무
우리는 너무 가까이 있다
천년의 잠
제자리
향기로운 꽃
문 밖에서
그리움에 지치거든
바위
젖은 눈
사랑하는 이에게...
편지
이별이 가슴아픈 까닭
어머니
의상대義湘臺
은산철벽
새해 새날은
보리가 저렇게
백담사 시편
배롱꽃
고해성사
사랑한다고 말할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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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영 시인 소개
대학 교수, 시인
출생
1942년 5월 2일, 전남 영광군
데뷔
1968년 현대문학 '잠 깨는 추상' 등단
학력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문학
경력
2006년 제35대 한국시인협회 회장
1995년 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 강의
수상
1999년 공초문학상
1986년 소월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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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 오세영
1월이 색깔이라면
아마도 흰색일 게다.
아직 채색되지 않은
신(神)의 캔버스,
산도 희고 강물도 희고
꿈꾸는 짐승 같은
내 영혼의 이마도 희고,
1월이 음악이라면
속삭이는 저음일 게다.
아직 트이지 않은
신(神)의 발성법(發聲法).
가지 끝에서 풀잎 끝에서
내 영혼의 현(絃) 끝에서
바람은 설레고,
1월이 말씀이라면
어머니의 부드러운 육성일 게다.
유년의 꿈길에서
문득 들려오는 그녀의 질책,
아가, 일어나거라,
벌써 해가 떴단다.
아, 1월은
침묵으로 맞이하는
눈부신 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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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 오세영
'벌써'라는 말이
2월처럼 잘 어울리는 달은 아마
없을 것이다.
새해 맞이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월,
지나치지 말고 오늘은
뜰의 매화 가지를 살펴보아라.
항상 비어 있던 그 자리에
어느덧 벙글고 있는
꽃,
세계는
부르는 이름 앞에서만 존재를
드러내 밝힌다.
외출을 하려다 말고 돌아와
문득
털 외투를 벗는 2월은
현상이 결코 본질일 수 없음을
보여 주는 달,
'벌써'라는 말이
2월만큼 잘 어울리는 달은 아마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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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월
흐르는 계곡 물에
귀기울이면
3월은
겨울 옷을 빨래하는 여인네의
방망이질 소리로 오는 것 같다.
만발한 진달래 꽃숲에
귀기울이면
3월은
운동장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함성으로 오는 것 같다.
새순을 움틔우는 대지에
귀기울이면
3월은
아가의 젖 빠는 소리로
오는 것 같다.
아아, 눈부신 태양을 향해
연녹색 잎들이 손짓하는 달, 3월은
그날, 아우내 장터에서 외치던
만세 소리로 오는 것 같다.
꽃들은 별을 우러르며 산다 / 시와시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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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언제 우리 소리 그쳤던가,
문득 내다보면
4월이 거기 있어라.
우르르 우르르
빈 가슴 울리던 격정은 자고
언제 먹구름 개었던가,
문득 내다보면
푸르게 빛나는 강물,
4월은 거기 있어라.
젊은 날은 또 얼마나 괴로웠던가,
열병의 뜨거운 입술이
꽃잎으로 벙그는 4월.
눈 뜨면 문득
너는 한 송이 목련인 것을,
누가 이별을 서럽다고 했던가.
우르르 우르르 빈 가슴 울리던 격정은 자고
돌아보면 문득
사방은 눈부시게 푸르른 강물.
꽃들은 별을 우러르며 산다 / 시와시학사
~~~~~~~~~~~~~
5월
어떻게 하라는
말씀입니까.
부신 초록으로 두 눈 머는데
진한 향기로 숨 막히는데
마약처럼 황홀하게 타오르는
육신을 붙들고
나는 어떻게 하라는
말씀입니까.
아아, 살아 있는 것도 죄스러운
푸르디 푸른 이 봄날,
그리움에 지친 장미는 끝내
가시를 품었습니다.
먼 하늘가에 서서 당신은
자꾸만 손짓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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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바람은 꽃향기의 길이고
꽃향기는 그리움의 길인데
내겐 길이 없습니다.
밤꽃이 저렇게 무시로 향기를 쏟는 날,
나는 숲속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님의 체취에
그만 정신이 아득해졌기 때문입니다.
강물은 꽃잎의 길이고
꽃잎은 기다림의 길인데
내겐 길이 없습니다.
개구리가 저렇게
푸른 울음 우는 밤,
나는 들녘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님의 말씀에
그만 정신이 황홀해졌기 때문입니다.
숲은 숲더러 길이라 하고
들은 들더러 길이라는데
눈먼 나는 아아,
어디로 가야 하나요.
녹음도 지치면 타오르는 불길인 것을,
숨막힐 듯, 숨막힐 듯 푸른 연기 헤치고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요,
강물은 강물로 흐르는데
바람은 바람으로 흐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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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8월은 분별을
일깨워 주는 달이다.
사랑에 빠져
철 없이 입맞춤하던 꽃들이
화상을 입고 돌아온 한낮,
우리는 안다.
태양이 우리만의 것이 아님을,
저 눈부신 하늘이
절망이 될 수도 있음을,
누구나 홀로
태양을 안은 자는
상철 입는다.
쓰린 아픔 속에서만 눈 뜨는
성숙,
노오랗게 타버린 가슴을 안고
나무는 나무끼리
풀잎은 풀잎끼리
비로소 시력을 되찾는다.
8월은
태양이 왜,
黃道에만 머무는 것인가를
가장 확실하게
가르쳐 주는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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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코스모스는
왜 들길에서만 피는 것일까,
아스팔트가
인간으로 가는 길이라면
들길은 하늘로 가는 길,
코스모스 들길에서는 문득
죽은 누이를 만날 것만 같다.
피는 꽃이 지는 꽃을 만나듯
9월은 그렇게
삶과 죽음이 지나치는 달.
코스모스 꽃잎에서는 항상
하늘 냄새가 난다.
문득 고개를 들면
벌써 엷어지기 시작하는 햇살,
태양은 황도에서 이미 기울었는데
코스모스는 왜
꽃이 지는 계절에 피는 것일까,
사랑이 기다림에 앞서듯
기다림은 성숙에 앞서는 것,
코스모스 피어나듯 9월은
그렇게
하늘이 열리는 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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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
무언가 잃어 간다는 것은
하나씩 성숙해 간다는 것이다
지금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때
돌아보면 문득
나 홀로 남아 있다.
그리움에 목마르던 봄날 저녁
분분히 지던 꽃잎은 얼마나 슬펐던가
욕정으로 타오르던 여름 한낮
화상 입은 잎새들은 또 얼마나 아팠던가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때
이 지상에는
외로운 목숨 하나 걸려 있을 뿐이다.
낙과(落果)여
네 마지막의 투신을 슬퍼하지 말라
마지막의 이별이란 이미 이별이 아닌 것
빛과 향이 어울린 또 한번의 만남인 것을
우리는
하나의 아름다운 이별을 갖기 위해서
오늘도
잃어 가는 연습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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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 오세영
지금은 태양이 낮게 뜨는 계절,
돌아보면
다들 떠나갔구나,
제 있을 꽃자리
게 있을 잎자리
빈들을 지키는 건 갈대뿐이다.
상강(霜降).
서릿발 차가운 칼날 앞에서
꽃은 꽃끼리, 잎은 잎끼리
맨땅에
스스로 목숨을 던지지만
갈대는 호올로 빈 하늘을 우러러
시대를 통곡한다.
시들어 썩기보다
말라 부서지기를 택하는 그의
인동(忍冬),
갈대는
목숨들이 가장 낮은 땅을 찾아
몸을 눕힐 때
오히려 하늘을 향해 선다.
해를 받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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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 오세영
불꽃처럼 남김없이 사라져 간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스스로 선택한 어둠을 위해서
마지막 그 빛이 꺼질 때,
유성처럼 소리 없이 이 지상에 깊이 잠든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허무를 위해서 꿈이
찬란하게 무너져 내릴 때,
젊은 날을 쓸쓸히 돌이키는 눈이여,
안쓰러 마라.
생애의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
사랑은 성숙하는 것.
화안히 밝아 오는 어둠 속으로
시간의 마지막 심지가 연소할 때,
눈 떠라,
절망의 그 빛나는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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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꽃 / 오세영
지상에서나 하늘에서나
멀리 있는 것은 별이 된다.
멀리 있으므로 기억이 흐린,
흐려서 윤곽이 선명치 않는 너의
이,
목,
구,
비,
강 건너 반짝이는 불빛, 혹은
대숲에 비끼는 노을 같은 것,
사랑은
멀리서 바라보아야만 아름다운
안개꽃이다.
지상에서 천상으로 흐르는 은하
한 줄기.
~~~~~~~~~~~~~~~
푸르른 하늘을 위하여
// 사랑아,
너는 항상 행복해서만은 안 된다.
마른 가지 끝에 하늬 바람 불어
푸르게 열린 하늘,
그 하늘을 보기 위해선
조금은 슬픈 일도 있어야 한다.
굽이쳐 흐르는 강,
분분한 낙화,
먼 산등성에 외로 서 문득 뒤돌아보는
늙은 사슴의 맑은 눈,
달더냐,
수밀도 고운 살 속 눈먼 한마리 벌레처럼
붉은 입술을 하고서 사랑아,
아른 아른 피던 봄 안개는,
여름내 쩡쩡 울던 먹구름 속의 천둥은
이미 지평선 너머 사라졌는데
하늬 바람 불어
푸르게 열리는 그 하늘을 위해선 사랑아
조금은 슬픈 일도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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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의 말 / 오세영
설령 그것이
마지막의 말이 된다 하더라도
기다려달라는 말은 헤어지자는 말보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별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하는 것이다
'안녕'
손을 내미는 그의 눈에
어리는 꽃잎
한때 격정으로 휘몰아치던 나의 사랑은
이제 꽃잎으로 지고 있다
이별은 봄에도 오는 것,
우리의 슬픈 가을은 아직도 멀다
기다려달라고 말해다오
설령 그것이
마지막의 말이 된다 하더라도.
~~~~~~~~~~~~~~~
꽃불 / 오세영
추락보다는
차라리 파멸을 선택했다.
비상의 절정에서 터지는
꽃불.
지상은 축제로 무르익고
축등(祝燈)은 화려하게 걸려 있는데
그 늘어선 전깃줄 너머
무한으로 사라지는 빛 한 줄기.
소멸은 죽음과 다르다.
해후의 눈물로 글썽이는
이 지상의 축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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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관 / 오세영
하루로 보면
밤과 낮이 별개 아니고,
삶으로 보면
낳고 죽음이 또한 별개가 아니라는 것은
오랜 동양의 가르침이지만
사랑과 미움 역시 그렇다는 것도
물을 보면 안다.수력 발전을 보아라.
물이 또한 불을 만들어 냄이니
흐르는 불은 물이요, 위로 오르는 물은 불.
환하게 등을 켜 든 황혼의 장미는
수직으로 솟은 물이고
서늘하게 내 발등을 스치는 꽃뱀은
수평으로 흐르는 불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 살면서 굳이
사랑과 미움을 애써 분별치
말기를.........
봄은 전쟁처럼 / 세계사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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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 / 오세영
멀리 있는 것은
아름답다
무지개나 별이나 벼랑에 피는 꽃이나
멀리 있는 것은
손에 닿을 수 없는 까닭에
아름답다.
사랑하는 사람아,
이별을 서러워하지 마라.
내 나이에 이별이란
헤어지는 일이 아니라 단지
멀어지는 일일 뿐이다.
네가 보낸 마지막 편지를 읽기 위해서
이제
돋보기가 필요한 나이,
늙는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멀리 보낸다는
것이다.
머얼리서 바라볼 줄을
안다는 것이다.
잠들지 못하는 건 사랑이다 / 책만드는집 | 2002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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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 오세영
인생이란
기쁨과 슬픔이 짜아올린 집,
그 안에 삶이 있다.
굳이 피하지 말라. 슬픔을 …
묵은 때를 씻기 위하여 걸레에
물기가 필요하듯
정신을 말갛게 닦기 위해선
눈물이 있어야 하는 법,
마른 걸레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
오늘은 모처럼 방을 비우고 걸레로
구석구석 닦는다.
내일은
우리들의 축일祝日 아닌가.
시집 ; 적멸의 불빛 / 문학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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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인가 한 번은 / 오세영
우지마라 냇물이여.
언제인가 한 번은 떠나는 것이란다.
우지마라 바람이여.
언제인가 한 번은 버리는 것이란다.
계곡에 구르는 돌처럼,
마른 가지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삶이란 이렇듯 꿈꾸는 것.
어차피 한 번은 헤어지는 길인데
슬픔에 지치거든 나의 사람아,
청솔 푸른 그늘 아래 누워서
소리없이 흐르는 흰 구름을 보아라.
격정激精에 지쳐 우는 냇물도
어차피 한 번은 떠나는 것이란다.
시집 ; 벼랑의 꿈 / 시와시학사.1999.
~~~~~~~~~~~~~~~~~~
뜨락
뜨락
쓸어 무엇 하리요
사미야
비를 거두어라
뜰은 원래 그들의 침실
먼 여행에서 돌아와 피곤하게 잠든
숨소리가 들리지 않느냐
이제껏 허공에 매달려 살다가
드디어 찾은 대지의 안식
팔랑
도토리 잎새 하나 떨어져
상수리 갈잎을 다소곳이
감싸안는다
사랑은 인간만이 하는것은 아닌법
그위로 후두둑
가을 햇살이 내린다
낙엽이나 들풀에 맺힌 이슬이나 이리 저리 구르는 돌맹이나
심지어는 깨진 사금파리 까지도
사물이 자리한 이 지상의 모든곳은
가장 편안한 존재의 침실
사미야
그만 비를 거두어라
우주의 피곤한 숨소리가 들리지 않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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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지우고 / 오세영
산에서
산과 더불어 산다는 것은
산이 된다는 것이다.
나무가 나무를 지우면
숲이 되고,
숲이 숲을 지우면
산이 되고,
산에서
산과 벗하여 산다는 것은
나를 지우는 일이다.
나를 지운다는 것은 곧
너를 지운다는 것,
밤새
그리움을 살라 먹고 피는
초롱꽃처럼
이슬이 이슬을 지우면
안개가 되고,
안개가 안개를 지우면
푸른 하늘이 되듯
산에서
산과 더불어 산다는 것은
나를 지우는 일이다.
~~~~~~~~~~~~~~~~~
동백꽃 / 오세영
괜찮다.
괜찮다.
부풀어오르는 밀물 탓이다.
개펄을 채우고 둑을 넘쳐서
마당까지 벙벙히 넘실대는
물,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탓이다.
옷고름 풀어헤치고 치마를 들치며
속살 간질이는
갯바람,
괜찮다.
괜찮다.
사릿날
초조(初潮)의 부끄러움으로
발갛게 달아오르는
처녀의
볼.
꽃들은 별을 우러르며 산다 / 시와시학사.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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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락 그늘 아래서
맑은날
네 편지를 들면
아프도록 눈이 부시고
흐린날
네 편지를 들면
서롭도록 눈이 어둡다
아무래도 보이질 않는구나
네가 보낸 편지의 마지막
한 줄
무슨 말을 썼을까
오늘은 햇빛이 푸르른날
라일락 그늘에 앉아
네 편지를 읽는다
흐린 시야엔 바람이 불고
꽃잎은 분분히 흩날리는데
무슨 말을 썼을까
날리는 꽃잎에 가려
끝내
읽지 못한 마지막 그
한 줄
~~~~~~~~~~~~~~~~~~
추전역
세속도시를 버리고
등고선을 좇아 높이 높이 올라왔나니
활엽수림대(闊葉樹林帶)를 지나서 침엽수림대(針葉樹林帶)를 지나서
숨가쁘게 달려온 한 생
드디어
하늘의 문턱을 넘는다.
이번의 정차 역은 하늘역
잊지 말고 내리자.
아차 놓치면 다시 돌아가는 지상은
슬픈 열대(熱帶),
내 여기 오르기 위해 얼마나
고심했던가. 추전역
허공에
무지개를 하나 끌어와 다리를 놓고
구름밭을 다져 레일을 깔았나니
한 생이 가는 길은 여로(旅路)
하늘 가는 티켓 하나 덜렁 사서
야간 열차에 오른다.
아, 태백준령(太白峻嶺),
그 빛나는 태양 아래 문을 연
천제단(天祭壇) 입구의 그 추전역.
시집 ; 임을 부르는 물소리 그 물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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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절초
하늘의 별들은 왜 항상
외로워야 하는가.
왜 서로 대화를 트지않고
먼 지상만을
바라다보아야 하는가.
무리를 이루어도 별들은 항상
홀로다.
늦가을 어스름
저녁답을 보아라
난만히 핀 한 떼의 구절초꽃들은
푸른 초원에서만 뜨는 별.
그가 응시하는 것은 왜 항상
먼 산맥이어야 하는가.
꽃피는 처녀들의 그늘 아래서 / 고요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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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없음으로 / 오세영
너 없으므로
나 있음이 아니어라.
너로 하여 이 세상 밝아오듯
너로 하여 이 세상 차오르듯
홀로 있음은 이미
있음이 아니어라.
이승의 강변 바람도 많고
풀꽃은 어우러져 피었더라만
흐르는 것 어이 바람과 꽃뿐이랴
흘러 흘러 남는 것은 그리움,
아, 살아 있음의 이 막막함이여.
홀로 있으므로 이미
있음이 아니어라.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 / 문학사상사,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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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정
갑작스런 화재로 온 집이 전소되었다.
화인은 난로의 과열,
아빠는 죽고 엄마는 화상을 입고
단란한 가정은 깨져버렸다.
물질도 때로는 욕정으로 몸부림을 치는 것일까.
콘센트에 플러그를 꽂자 일순,
본능으로 전율하는 쇠붙이는
뜨겁게 달아오른다.
건드리지 마라
오늘밤 나는 너와 더불어 온몸을
불사를 수도 있다.
전류電流,
밤마다 정사情事를 꿈꾸는
물질의 애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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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는 꽃이 지는 꽃을 만나듯 / 오세영
8월은
오르는 길을 잠시 멈추고
산등성 마루턱에 앉아
한번쯤 온 길을
뒤돌아보게 만드는 달이다.
발 아래 까마득히 도시가,
도시엔 인간이,
인간에겐 삶과 죽음이 있을 터인데
보이는 것은 다만 파아란 대지,
하늘을 향해 굽이도는 강과
꿈꾸는 들이 있을 뿐이다.
정상은 아직도 먼데
참으로 험한 길을 걸어왔다.
벼랑을 끼고 계곡을 넘어서
가까스로 발을 디딘 난코스,
8월은
산등성 마루턱에 앉아
한번쯤 하늘을 쳐다보게 만드는
달이다.
오르기에 급급하여
오로지 땅만 보고 살아온 반평생,
과장에서 차장으로 차장에서 부장으로
아, 나는 지금 어디메쯤 서 있는가,
어디서나 항상 하늘은 푸르고
흰 구름은 하염없이 흐르기만 하는데
우러르면
먼
별들의 마을에서 보내 오는 손짓,
그러나 지상의 인간은
오늘도 손으로
지폐를 세고 있구나.
8월은
오르는 길을 멈추고 한번쯤
돌아가는 길을 생각하게 만드는
달이다.
피는 꽃이 지는 꽃을 만나듯
가는 파도가 오는 파도를 만나듯
인생이란 가는 것이 또한
오는 것.
풀섶에 산나리, 초롱꽃이 한창인데
세상은 온통 초록으로 법석이는데
8월은
정상에 오르기 전, 한번쯤
녹음에 지쳐 단풍이 드는
가을 산을 생각케 하는 달이다.
꽃들은 별을 우러르며 산다 / 시와시학사,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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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바이러스처럼
바위 속보다 더 무거운
적막,
과일 속보다 더 달콤한 잠,
나[飛]는 새도 능구렝이도 윙윙거리던 벌떼들도
다 어디를 갔나.
이 어둡고 추운 날을 살아 남기 위해선,선아 나는 이제
열병이라도 앓아야겠다.
항생제도 없이.....
바이러스로 침투하는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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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이 그리워 / 오세영
그리운 이 그리워
마음 둘 곳 없는 봄날엔
홀로 어디론가 떠나 버리자.
사람들은
행선지가 확실한 티켓을 들고
부지런히 역구를 빠져 나가고
또 들어오고,
이별과 만남의 격정으로
눈물 짓는데
방금 도착한 저 열차는
먼 남쪽 푸른 바닷가에서 온
완행.
실어 온 동백꽃잎들을
축제처럼 역두에 뿌리고 떠난다.
나도 과거로 가는 차표를 끊고
저 열차를 타면
어제의 어제를 달려서
잃어버린 사랑을 만날 수 있을까.
그리운 이 그리워
문득 타 보는 완행 열차
그 차창에 어리는 봄날의
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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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사람 다시 그리워
그리운 사람 다시 그리워
사람을 멀리 하고 길을 걷는다
살아갈수록 외로워진다는
사람들의 말이 더욱 외로워
외롭고 마음 쓰라리게 걸어가는
들길에 서서
타오르는 들불을 지키는 일은
언제나 고독하다
그리운 사람 다시 그리워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면
어둠 속에서 그의 등불이 꺼지고
가랑잎 위에는 가랑비가 내린다
~~~~~~~~~~~~~~~~~
별 하나
너로 인해 알았다.
그것이 내게 주는 눈짓인 것을,
수 많은 별 중에서 작은 별 하나
어둠 속에 반짝 불 밝힘은
너로 인해 알았다.
그것이 내게 주는 손짓인 것을
빈 가지에 매달린 가을 잎 하나,
허공에 파르르 떨고 있음을
너로 인해서
나는 밤이 항상 그리운 사람,
수 없이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너를 바라보는 희미한 별,
너로 인해 알았다.
그것이 시방 내게 슬픔인 것을
먼 하늘에 반짝이는 별 하나,
닿을 수 없는 별 하나,
불타는 별 / 문학사상사. 1988
~~~~~~~~~~~~~~~~~~
바닷가에서
사는 길이 높고 가파르거든
바닷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보아라
아래로 아래로 흐르는 물이
하나 되어 가득히 차오르는 수평선,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자가 얻는 평안이
거기 있다
사는길이 어둡고 막막하거든
바닷가
아득히 지는 일몰을 보아라
어둠 속에서 어둠 속으로 고이는 빛이
마침내 밝히는 여명,
스스로 자신을 포기하는 자가 얻는 충족이
거기있다
사는 길이 슬프고 외롭거든
바닷가
가물 가물 멀리 떠있는 섬을 보아라
홀로 견디는것은 순결한것,
멀리 있는 것은 아름다운것,
스스로 자신을 감내하는 자의 의지가
거기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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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잎이 지면
겨울 나무들은 이내
악기가 된다.
하늘에 걸린 음표에 맞춰
바람의 손끝에서 우는
악기.
나무만은 아니다.
계곡의 물소리를 들어보아라.
얼음장 밑으로 공명하면서
바위에 부딪쳐 흐르는 물도
음악이다.
윗가지에서는 고음이,
아랫가지에서는 저음이 울리는 나무는
현악기,
큰 바위에서는 강음이
작은 바위에서는 약음이 울리는 계곡은
관악기.
오늘처럼
천지에 흰 눈이 하얗게 내려
그리운 이의 모습이 지워진 날은
창가에 기대어 음악을
듣자.
감동은 눈으로 오기보다
귀로 오는 것,
겨울은 청각으로 떠오르는 무지개다
어리석은 헤겔 / 고려원, 1994
~~~~~~~~~~~~~~~
블루스
마음이 슬플 때는 가세요. 남쪽 나라,
애슈빌 지나 내슈빌 지나
미시시피 강가의 작은 마을
클락스데일*로 가세요
거기 가면 아무데나 이발소 찾아
귀밑머리 가지런히 다듬으세요.
이발사 아가씨의 검은 눈 속을
말없이 말없이 들여다보면
그 슬픔 소리 없이 빨려가리다.
마음이 아플 때는 두 눈을 감고
이발사 아가씨의 기타 소리에
고즈넉이 낮잠을 청해보세요.
그 아픔 소리 없이 쏠려가리다.
그리고 살며시 눈을 뜨시면
코끝엔
아련한 오렌지 향기,
눈썹엔 파랗게 젖은 강바람,
귀볼엔 애잔한 블루스 리듬,
당신은 아시나요, 저 남쪽 나라를
유도화, 올리브꽃 향그럽게 핀
미시시피 강가의 작은 마을
애슈빌 지나 내슈빌 지나
블루스의 슬픔 어린
흑인의 땅.
* 클락스데일(Clarksdale) : 미시시피 주 미시시피 강가에 있는 작은
읍. 미국 블루스 음악의 발생지, 가수 내트 킹콜의 고향. 이곳의 이발
소들은 항상 악기를 준비해놓고 손님이 이발을 하는 동안 이발사 자신
이 기타 등의 반주에 맞춰 블루스 음악을 선사함. 윌리엄 포크너의 고
향 옥스퍼드도 지척에 있음.
~~~~~~~~~~~~~~~~~
봄은 전쟁처럼
산천(山川)은 지뢰밭인가
봄이 밟고 간 땅마다 온통
지뢰의 폭발로 수라장이다.
대지를 뚫고 솟아오른, 푸르고 붉은
꽃과 풀과 나무의 여린 새싹들.
전선엔 하얀 연기 피어오르고
아지랑이 손짓을 신호로
은폐 중인 다람쥐, 너구리, 고슴도치, 꽃뱀......
일제히 참호를 뛰쳐나온다.
한 치의 땅, 한 뼘의 하늘을 점령하기 위한
격돌,
그 무참한 생존을 위하여
봄은 잠깐의 휴전을 파기하고 다시
전쟁의 포문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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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약
무색으로 녹는 물이 있다면
하얗게 굳는 불도 있다.
녹기만은 싫다.
굳고 굳어서 더 이상 자신을 지키지 못할 땐
차라리
부서져 가루가 되리라.
우정도 사랑도 이 세상 모두가 싫어
오직 잠들 수 있는 곳은 소외된
약실(藥室)뿐,
깨우지 마라.
이 불안한 평화를 깨뜨리고 싶지 않다.
분노는
총구에 든 화약,
증오는
한순간의 격발.
봄은 전쟁처럼 / 세계사, 2004
~~~~~~~~~~~~~~~
질그릇 / 오세영
질그릇 하나 부서지고 있다.
질그릇의 밑바닥에 잠긴 바다가
조용히 부서지고 있다.
스스로 부서져 흙이 되는
저 흔들리는 바다.
질그릇에 담긴 生鮮의 뼈,
질그릇에 담긴 暴風,
질그릇에 담긴 空間,
그 空間 하나 스스로 부서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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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작을 패며 / 오세영
장작은 나무가 아니다
잘리고 토막나서 헛간에
내동댕이친 화목火木,
영혼이 금간불목하니.
한때 굳건히 대지에 뿌리를 박고
가지마다 무성하게 피워올린 잎새들로
길가에 푸른 그늘을 드리우기도 하지만,
탐스런 과육果肉으로
지나던 길손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기도 했다만
잘려 뽀개진 나무는 더 이상
나무가 아니다.
안으로, 안으로 분노를 되새기며
미구에 닥칠 그 인내의 한계점에 서면
내 무엇이 무서우랴, 확
불 지르리라
존재의 빈터에 버려져
처절히 복수를 노리는 저
차가운 이성,
잘린 나무는 나무가 아니다
금간 것들은 이미 어떤 것도,
아무것도 아니다.
~~~~~~~~~~~~~~~
모순(矛盾)의 흙
흙이 되기 위하여
흙으로 빚어진 그릇
언제인가 접시는
깨진다.
생애의 영광을 잔치하는
순간에
바싹
깨지는 그릇,
인간은 한 번
죽는다.
물로 반죽되고 불에 그슬려서
비로소 살아 있는 흙,
누구나 인간은
한 번쯤 물에 젖고
불에 탄다.
하나의 접시가 되리라.
깨어져서 완성되는
저 절대의 파멸이 있다면
흙이 되기 위하여
흙으로 빚어진
~~~~~~~~~~~~~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처녀의 따뜻한 혀끝에서
녹는 아이스크림
그 완전한 소멸의 쾌락을 위하여
크림은 얼마나
자신을 굳혀야 했던가,
이념의 단단한 틀에 갇히고
서릿발 싸늘한 증오에 떨며
파아랗게 날 세운 눈빛,
그러나 침묵의 절정에선
모든 존재는 물체가 된다.
해방시켜다오,
나는 자유롭고 싶다.
한 처녀의 순결한 입맞춤으로
사르르 풀리는 육신의
속박.
~~~~~~~~~~~~~~~~~~~~
양귀비빛
다가서면 관능이고
물러서면 슬픔이다.
아름다움은 적당한 거리에만 있는 것.
너무 가까워도 너무 멀어도
안 된다.
다가서면 눈 멀고
물러서면 어두운 사랑처럼
활활
타오르는 꽃.
아름다움은
관능과 슬픔이 태워올리는
빛이다.
현대시 1992
~~~~~~~~~~~~~
고향
고향은 누군가가 기다려지는
얕으막한 산등성이 있어 고향이다.
그 산등성 너머 흰 연기를 토하고 달리던 하오 두시
완행열차의 기적이 있어 고향이다.
기적 끊긴 적막한 겨울 오후, 긴 날개의 그림자를 땅위에 드리우며
하루 종일 하늘을 맴돌다가 사라지던 소리개가 있어 고향이다.
소리개를 쫓아 불현듯 줄을 끊고 산 너머로 달아나버린 연, 그 연을
찾으러
함부러 뛰어다니던 언덕이 있어 고향이다.
머리 희끗희끗
한번 떠난 고향으로 다시 돌아오는 길은
멀었다.
먼 항구의 불빛과 낯선 거리의 술집과 붉은 벽돌담과 교회당의 뒤뜰
을 걸어서
그 언덕에 다시 섰는데
왜 이제는 이다지도 기다릴 사람이 없는가
고향은 누군가를 기다릴 수 있어
고향이다.
시와시학 / 2001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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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죽음은 다시 죽을 수 없음으로
영원하다.
이 지상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
영원을 위해 스스로
독배(毒杯)를 드는 연인들의
마지막 입맞춤같이
벚꽃은
아름다움의 절정에서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종말을 거부하는 죽음의 의식(儀式),
정사(情死)의
미학.
~~~~~~~~~~~~~~~~
겨울길
너 어디서 걸어왔더냐.
눈 쌓인 비탈에 선
자작 한 그루,
발자국 하나 남기지 않고
곁눈질 한번 주지 않고
용케 예까지 걸어왔구나.
너 어디로 가는 길이더냐.
이 벼랑 건너뛰면 또 다른 벼랑,
이 봉우리 넘어서면 또
흐르는 흰 구름,
가도 가도 길은 끝이 없는데
자작나무야,
산문에 기대선 늙은 중처럼
꽃잎을 버려
잎새를 버려
너 지금 허공에 몸 기대고
있구나.
어디로 가려느냐.
어린 까치, 집 버려야 하늘 날 듯이
자작나무야.
까치 집 하나 지고 겨울나무야.
시집 / 벼랑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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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방식 / 오세영
-그릇 38
얼릴 수만 있다면
불은 아마도 꽃이 될 것이다.
끓어오르는 불길을
싸늘하게 얼리는 튜립,
불은 가슴으로 사랑하지만
얼음은 눈빛으로 사랑한다.
어찌할꺼나
슬프도록 화려한 이 봄날에
나는 열병에 걸렸어라.
추위에 떨면서 닳아오르는
내 투명한 이성,
꽃은 결코 꺾어서는 안 되는 까닭에
눈빛으로 사랑해야 한다.
밤새 열병으로 맑아진
내 시선 앞에
싸늘하게 타오르는 한 떨기 튜립.
시집 ; 神의 하늘에도 어둠은 있다 / 미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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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 / 오세영
우리들의 만남은
잎새에 흐르는 바람이 되랴,
뺨에 흐르는 눈물이 되랴,
우리들의 만남은
헝클어진 머리털에 내리는 서리처럼
싸늘한 가슴으로 오는구나.
생각하지 마라,
길섶의 시든 풀잎 위에 부는 바람도
한때는 熱情(열정)으로 타던 불길인 것을.
불은 불대로, 물은 물대로
있는 것들은 있게 하여라.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 / 문학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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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묘약 / 오세영
비누는
스스로 풀어질 줄 안다
자신을 허물어야 결국 남도
허물어짐을 아는 까닭에
오래될수록 굳는
옷의 때
세탁이든 세수든
굳어버린 이념은
유액질의 부드러운 애무로써만
풀어진다.
섬세한 감정의 올을 하나씩 붙들고
전신으로 애무하는 비누,
그 사랑의 묘약
비누는 결코
자신을 고집하지 않는 까닭에
이념보다 큰 사랑을 안는다.
~~~~~~~~~~~~~~~~~~~
사랑
잠들지 못하는 건
波濤파도다. 부서지며 한가지로
키워내는 외로움
잠들지 못하는 건
바람이다. 꺼지면서 한가지로
타오르는 빛
잠들지 못하는 건
별이다. 빛나면서 한가지로
지켜가는 어두움
잠들지 못하는 건
사랑이다. 끝끝내 목숨을
拒否거부하는 칼.
~~~~~~~~~~~~~~~~
사랑의 고통
한 밤 동안
가습기에 갇혀 펄펄 끓던 물이
아침 되어 모두 증발해 버리고 없다.
고통 속에 신음하고 나딩굴던
육신이 이제 지상을 벗어나
완전한 자유를 찾았구나.
날개도 부질 없는 것,
스스로 가벼워져 기화氣化되지 않고선
그 누구도 천상에
도달할 수 없다.
네 이마에 맺히는 이슬
심장의 뜨거운 열
인간도 피를 데워서 끓이는
가마솥이 아닐까.
불로서 물을 끓이듯
심장을 달구는 불꽃은 사랑의 불꽃이 아니라
그 고통일지도 모른다.
시집 ; 적멸의 불빛 / 문학사상사.20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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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그대 / 오세영
꽃들은 별을 우러르며 산다.
이별의 뒤안길에서
촉촉히 옷섶을 적시는 이슬,
강물은
흰 구름을 우러르며 산다.
만날 수 없는 갈림길에서
온몸으로 우는 울음.
바다는
하늘을 우러르며 산다.
솟구치는 목숨을 끌어 안고
밤새 뒹구는 육신.
세상의 모든 것은
그리움에 산다.
닿을 수 없는 거리에
별 하나 두고,
이룰 수 없는 거리에
흰 구름 하나 두고,
~~~~~~~~~~~~~~~~~~
적의敵意
물이 차가운 얼음이 되듯
증오가 굳으면 싸늘한
침묵이 된다.
말이 없다고 해서 호사롭다 하지 마라
화약은 소리를 내지 않는다.
어둡고 밀폐된 약실에 갇혀
한순간의 격발을 노리는 그
적의(敵意).
순종은 오직 사랑에서만 오는 것
갇힌 모든 것은
반항으로 전율한다.
사랑도 굳으면
마약(痲藥)이 되지 않던가. 필로폰
하얀 분말의 그 달콤한 살의(殺意)
싸늘하던, 달콤하던 굳은 것은 모두
침묵이 된다.
화약처럼. 마약처럼 …….
2000한국시인협회시선집 / 시간의 스케치 / 오성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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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꽃 피어 봄이라는데
우뢰도
서릿발도 치지 않는 곳에서
허공에 몸 기댄 채 홀로
향기 머금는 난蘭이여.
더위 피해 추위 피해 스스로 갇힌
사기분합沙器盆盒엔
햇빛조차 머물지를 못하는구나.
사랑도 미움도 버려 맑은
이슬만 먹고
생애에 단 한 번 꽃 피운다 하건만
난蘭 한 분盆 안고
온철을 먼 하늘 우러르는 사람아.
밖엔 매화꽃 피어 봄이라는데
매화꽃 지고 오동꽃 피어 여름이라는데
국화꽃 피어 가을이라는데
국화꽃 지고 동백꽃 피어 겨울이라는데
시집 ; 벼랑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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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落葉
꽃잎 스스로 허물어져 흙이 되는
이승의 가을은 황홀하여라,
가자,
싱싱한 한알의 능금만을 남겨두고
나의 진실, 나의 虛無,
消滅소멸해가는 내 靈魂의 어두운 등불.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 / 문학사상사.
~~~~~~~~~~~~~~~~
새
나무를 심는다.
꿈꾸는 한마리 새를
붙들기 위하여
피곤한 하늘이 내려와
땅에 적시는 四月,
새는
비내리는 地平을
울며 난다.
사람은 누구나 生涯의 한번은
새를 날린다.
나의 가지 위에 날아와
문득 意味가 되는
너의 새.
시집 ;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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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갈잎 흔드는 저 바람이
떡갈잎 흔드는 저 바람이
후박잎 스치는 이 바람이듯,
깊은 소 휘도는 저 냇물이
널바위 휘감는 이 냇물이듯
슬픔이 기쁨된들 어이하리요.
기쁨이 슬픔된들 또 어이하리요.
벼랑 끝 서 있는 청솔 한 그루,
어제 속눈썹 스치던 저 바람이
오늘은 머리칼 날리는 이 바람이듯,
어제 뺨에 흐르던 저 눈물이
오늘은 가슴을 적시는 이 눈물이듯
바람 불고, 천둥 울고, 어두운 날은
물에 젖어 멍청히
땅만 바래고,
바람 자고, 꽃잎 벌고, 푸르른 날은
빛을 좇아 아득히
하늘 바래고.
벼랑의 꿈 / 시와 시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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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살자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
양떼보다 더 간절한 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
봄이 오는 소리를 행여 놓칠까,
긴 겨울, 대지에 귀를 열고 견디는 양.
양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은 까닭에
결코 오는 봄을 의심치 않는다.
봄을 맞이하는 마음이
양떼보다 더 고운 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
먼 데서 오는 그가 행여 추위에 떨까,
포근한 털옷으로 감싸 안은 양.
양은 항상 이웃과 더불어 사는 까닭에
남의 고통을 안다.
봄을 간직하는 마음이
양떼보다 더 순결한 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
그 찬란한 봄빛이 행여 더렵혀질까,
정결한 흰옷으로 갈아입고 강가에 서는 양.
양은 결코 서로 다투지 않은 까닭에
한 모금의 사랑도 나누어 마실 줄 안다.
대지에 귀를 대면 아아,
지금은 멀리서 봄이 오는 소리.
들린다, 어디선가 강물 풀리는 소리.
졸졸졸 어디선가 눈 녹는 소리.
온 누리 빛 밝은 그 날이 오면
온 누리 찬란한 새 봄이 오면
강물에 풀리는 얼음장처럼
우리도 하나되어 남북으로 흐르자.
우리도 양떼 되어 이제는
더불어 살자.
시집 ; 꽃들은 별을 우러르며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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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노래 / 오세영
산자락 덮고 잔들
산이겠느냐.
산그늘 지고 산들
산이겠느냐.
산이 산인들 또 어쩌겠느냐.
아침마다 우짖던 산까치도
간 데 없고
저녁마다 문살 긁던 다람쥐도
온 데 없다.
길 끝나 산에 들어섰기로
그들은 또 어디 갔단 말이냐.
어제는 온종일 진눈깨비 뿌리더니
오늘은 하루 종일 내리는 폭설(暴雪)
빈 하늘 빈 가지엔
어제는 온종일 난(蘭)을 치고
빈 하늘 빈 가지엔
홍시 하나 떨 뿐인데
오늘은 하루 종일 물소리를 들었다.
산이 산인들 또
어쩌겠느냐.
~~~~~~~~~~~~~~~~
설날
새해 첫날은
빈 노트의 안 표지 같은 것,
쓸 말은 많아도
아까워 소중히 접어 둔
여백이다.
가장 순결한 한 음절의 모국어(母國語)를 기다리며
홀로 견디는 그의 고독,
백지는 순수한 까닭에 그 자체로 이미
충만하다.
새해 첫날 새벽
창을 열고 밖을 보아라.
눈에 덮혀 하이얀 산과 들,
그리고 물상들의 눈부신
고요는
신(神)의 비어 있는 화폭 같지 않은가.
아직 채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
눈길에
문득 모국어로 우짖는
까치 한 마리.
~~~~~~~~~~~~~~~~
국화꽃
영혼이 육체를 벗어나듯
국화는
계절의 절정에서
목숨을 초월할 줄 안다.
지상의 사물이 조각으로,
굳어 있는 조각이 그림으로,
틀에 끼인 그림이 음악으로,
음악이 드디어 하늘로, 하늘로
비상하듯
국화는
하늘이 가장 높고 푸르른 날을 택하여
자신을 던진다.
서릿발 싸늘한 칼날에도 굴하지 않고
뿜어 올리는
그 향기.
~~~~~~~~~~~~~~~~~
이별이란
어디에나 너는 있다.
산 여울 맑은 물에 어리는
서늘한 너의 눈매,
눈은 젖어 있구나.
솔 숲 바람에 어리는
청아한 너의 음성,
너는 속삭이고 있구나.
더 이상 연연해 하지 않기로 했다.
이별이란 흐르는 강물인 것을,
이별이란 흐르는 바람인 것을,
더 이상 돌아보지 않기로 했다.
싸락눈 흩뿌리는 겨울 산방山房에
서러운 듯 피어오른 난 한 송이,
시방 너는 내 앞에서 울고 있구나.
벼랑의 꿈 / 시와시학사. 1999.
~~~~~~~~~~~~~~~~~~
라일락 그늘에 앉아
맑은 날,
네 편지를 들면
아프도록 눈이 부시고
흐린 날,
네 편지를 들면
서럽도록 눈이 어둡다.
아무래도 보이질 않는구나.
네가 보낸 편지의 마지막
한 줄,
무슨 말을 썼을까.
오늘은
햇빛이 푸르른 날,
라일락 그늘에 앉아
네 편지를 읽는다.
흐린 시야엔 바람이 불고
꽃잎은 분분히 흩날리는데
무슨 말을 썼을까.
날리는 꽃잎에 가려
끝내
읽지 못한 마지막 그
한 줄.
벼랑의 꿈 / 시와시학사. 1999.
~~~~~~~~~~~~~~~~~~~
언어
'안돼'라는 말끝에
'너를 위해서'라고 덧붙인다.
사실은 나를 위해서인데
진실을 호도하는 말의 양념,
인간은 언어에도 양념을 친다.
잘게 썬 육편을 초장에 찍어 먹듯
자른 두부와 무와 토막낸 생선에
양념을 쳐서 끓인
한 그릇의 매운탕,
양념은 원래
칼로 요리한 음식에만 치는 것인데
말에 양념을 치는 것은
인간의 언어엔 칼을 댄 까닭이다.
ㅇ, ㅏ, ㄴ, ㄷ, ㅗ, ㅐ 로 분철된
그 말, '안 돼'.
신어 언어에도 칼질이 있을까.
'멍멍' 혹은 '으르렁'
'철썩철썩' 혹은 '솨솨'
짐승의 먹이에 양념이 없듯
그의 언어엔 칼질도 없다.
어리석은 헤겔 / 1994 고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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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잠
살풋 봄잠이 들었던가.
후두둑......
창문 두드리는 소리에 미닫이 여니
소나기 먼 산 너머 황망히 사라지고
울안은 온통
출렁대는 바다다.
점점이 떠 있는 꽃잎 배에 실려
나 어디로 가란 말이냐.
무인도에 표류한 뱃사람처럼
햇빛 밝은 산방山房의 마루에 걸터앉아
한나절 조을고 있는
봄.
벼랑의 꿈 / 시와시학사. 1999.
~~~~~~~~~~~~~~~~~~~~
겨울밤에
밤에
등불을 밝히는 것은
더불어 눈빛을 나누고자 함이다.
사랑은 눈으로 오는 것,
어둠 속에서 보는 얼굴이 더 뚜렷하다.
존재의 거리를 좁히는
그 빛,
밤이 오면
램프에
불 밝힐 수 있어 좋다.
겨울에 난로를 지피는 것은
더불어 체온을 나누고자 함이다.
사랑은 가슴으로 오는 것,
추위 속에서 마주잡는 손이
더 따뜻하다.
존재의 결빙을 녹이는
그 체온,
겨울이 오면 너와 나
가슴에 불을 지필 수 있어 좋다.
어리석은 헤겔 / 고려원
~~~~~~~~~~~~~~~~~~
봄은 무엇하러 오는가
봄은 무엇하러 오는가,
이 눈 녹으면
떡갈 마른 등걸에도 물기가 돌아
앞 다투어 새 잎을 피워내겠지.
바위 틈에 자라던 제비초롱도
살포시 고개 들어 하늘 보겠지.
물웅덩이 얼어 있던 송사리떼도
부지런히 햇빛 쪼아 새끼치겠지.
종달새 지지배배 솟아올라서
서럽도록 옛이야기 쏟아놓겠지.
진달래, 산당화 제철을 맞아
온 산은 까르르 웃음판인데
봄은 무엇하러 오는가.
이 눈 녹으면
구만리 후미진 길 떠나갈 당신,
봄강물 얼음 풀려 울어 예듯이
강물 따라 구만리 가야 할 당신.
너,없음으로 / 좋은날
~~~~~~~~~~~~~~~~~
바위는 무엇하러
바위는 무엇하러 바위인가?
흙에서 뛰쳐나와 홀로
절벽과 마주 선 바위,
난만하게 핀 꽃들의 향기에도 취하지 않고,
거친 비바람에도 흔들림 없고,
애틋한 물 소리에도 격하지 않아 그것을
바위라 하지만
그의 무심無心은 대체 무엇이 되려 하는가?
면벽천년面壁千年, 하늘이 되려는가?
묵언만년默言萬年, 바람이 되려는가?
스스로 길을 막고 절벽과 마주서서
바위는 흙이기를 거부하지만
보아라,
네 가슴에 자라는 한 포기 난蘭을,
감정처럼 축축히 젖는
이끼를.
시집 / 벼랑의 꿈
~~~~~~~~~~~~~~~~~~~~
지상의 꽃
나는 푸른 하늘을 보아버렸다.
설령 그것이 죄가 된다 해도
이제 어찌 할 수 없구나.
아침마다 우짖는 산새도,
저녁마다 바자니는 다람쥐도
지금은 눈에 없어.
나는 다만 하늘을 우러르는 한 마리
슬픈 짐승,
낮에는 햇빛으로 환하게 눈멀고
밤에는 등불로 활활 타오를 뿐이다.
지상은
어느덧 가을,
태양은 황도에서 이미 기울었는데
어이 할꺼나,
나는 푸른 하늘을 보아버렸다.
영원한 그리움이 끝내
한 떨기 불길로 타오르다 사라지는
이 지상의
꽃.
시집 ; 벼랑의 꿈
~~~~~~~~~~~~~~~~~~~
흙의 얼음
-그릇28.
그 어떤 이념이
이토록 생각을 굳혀놨을까.
그에게서는 사랑을 찾을 수 없다
관용도 그리고 미움도.....
부드러운 흙에 도는 따뜻한 물이
한송이 꽃을 피우듯
부드러운 살에 도는 따뜻한 피가
사랑을 싹틔울 텐데
어떤 이념이 그토록 싸늘하게
그의 육신을 얼려놨을까.
모래와 철근으로 더불어 굳어버린
시멘트,
생명을 완강히 거부하는 저
흙의 얼음.
神의 하늘에도 어둠은 있다 / 미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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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누굴 사랑했던 게지.
화사하게 달아오른 그녀의 혈색,
까르르 세상은 온통 꽃들의 웃음판이다.
누굴 미워했던 게지,
시퍼렇게 얼어붙은 그녀의 낯색,
파르르 세상은 온통 헐벗은 나무들의 울음판이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하지만 산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미움도 사랑도 버려야만 산문山門에
든다 하건만
노여움도 슬픔도 버려야만 하늘문
든다 하건만
먼 산 계곡에선 오늘도 눈 녹는 소리,
사랑보다 더 깊은 사랑은 이미
사랑이 아니더란 말인가,
흐르는 물 위엔 뚝뚝
꽃잎만 져 내리고......
벼랑의 꿈 / 시와시학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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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울음 끝에서 슬픔은 무너지고 길이 보인다
울음은 사람이 만드는 아주 작은 창문인 것
창문 밖에서
한 여자가 삶의 극락을 꿈꾸며
잊을 수 없는 저녁 바다를 닦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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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
이슬 속으로
한 사내가 사라져 갔다.
이슬 속에
한 사내가 켜든 世界의 불빛
이슬 속으로
한 女子가 사라져 갔다.
이슬 속에
떨리는 한방울의 눈물.
이슬 속으로
時間이 사라져 갔다.
이슬 속에
흙이 묻은 하나의 이름
풀잎에 맺힌
이 싸늘한 그리움
불러도 불러도 못한
흙이 묻은 이승의 그리움.
시집 ;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 / 문학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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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비
밤에
홀로 듣는 빗소리.
비는 깨어 있는 자에게만
비가 된다.
잠든 흙 속에서
라일락이 깨어나듯
한 사내의 두 뺨이 비에 적실 때
비로소 눈뜨는 영혼.
외로운 등불
밝히는 밤,
소리 없이 몇천 년 흐르는 江물.
눈물은
뜨거운 가슴속에서만
사랑이 된다.
시집 ; 神의 하늘에도 어둠은 있다 / 미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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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꽃들은
자신을 피워올린다.
스스로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이다.
향기 좇아
다투어 날아드는 벌처럼
바람에 휩쓸려
떨어지길 기다리는 낙엽같이
운명이란 그러나
수동으로 오는 것,
그러므로 기다림은
스스로를 죽이는 일이다.
지금은 봄,
세상은 빛과 향으로 어우러진
꽃밭인데
그늘 아래
묵묵히 웅크린 바위 하나,
그러나 바위여
너의 기다림이 설령
천 년의 바램이라 하더라도
움직일 수 없거든 차라리
깨져라.
스스로 깨지는 것이 때로
이루는 일이 되는 까닭에
시집 ; 꽃들은 별을 우러르며 산다 / 시와 시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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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면(不眠)
잠이 오지 않는 밤
수면제(睡眠劑)를 한알, 혹은 러시아産 워드카에 취해
마른 肉體를 버린 靑春은 가서 오지 않는다.
수심(愁心)에 가득찬 표범처럼
암흑을 건너온 사랑의 이야기도 끝내
돌이키지 못한다.
안녕(安寧)을 알리는 전화(電話)가 울고 회선(回線)에 목이 잠긴
少女가 울었다.
마른 입술을 태우는 담배처럼
마른 肉體를 불사른 靑春은 오지 않는다.
욕망(慾望)이 죽고, 眞理가 죽고, 전설(傳說)로 떠난 木馬는
시든 꽃과 슬퍼하는 公主를 남긴 채
恨처럼 흐르는 江을 건넜다.
木馬에 끌려가는 時間의 사슬소리
계절(季節)이 말라붙은 창(窓)을 글썽이는 별들이
들여다 보고
가장 아픈 말 한마디를 차마 쓰지 못한 詩人은
끌려가는 木馬의 울음소리만 들을 뿐이다.
대답하지 않으리라
암흑을 건너 암흑에 도달한 운석(隕石)처럼
깊이깊이 묻히리라.
잠이 오지 않는 밤,
수면제(睡眠劑)를 한알, 혹은 러시아産 워드카에 취해
마른 肉體를 버린 靑春은 한번 가서
오지 않는다.
60년대 한국시선집 / 젊은 시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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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의 잠 / 오세영
어젯밤 하늘이 몰래 내려와
산과 잠자고 가더니
이 아침
고사리 새순 도르르 말려
그것이 한 개 우주로구나.
풀잎에 떨어뜨린 별들을 보고
내 알았지.
쫑긋 귀기울여 천둥소리 듣고
배시시 눈 떠 흰 구름 보고......
그러므로 누구에게 물어보랴.
한 방울의 이슬 속에서 푸른 하늘을 보거니.
시집 ; 벼랑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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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속을 걸으며
담배를 핀다.
적막한 一身의 저 끝에서
타면서 꺼지면서 연소(燃燒)한다.
창밖엔 비가 내리고
항우울제(抗憂鬱劑)를 사든 소녀가
빗속을 걸어간다.
콜라병을 든 직공(織工)이 핸들을 쥐고 있는
영화광고(映畵廣告) 위에 비가 내린다.
축축히 젖으면서 그는 담배를 핀다.
흐린 자막(字幕) 위에도 비가 내린다.
'현실(現實)'이란 글자는 지워져 있다.
그는 행복(幸福)이라는 것을 믿고, 또 모든 것을
믿었다.
時間은 함부로 태엽에서 풀려나와
고향의 봄에 피는 꽃잎을 떨어뜨리고
앓아누운 아내 이마의 땀방울을 떨어뜨리고
지켜보는 어린것의 글썽이는 눈물을
떨어뜨렸다.
비연(悲戀)의 主人公은 빗속에서 떠났다.
호올로 담배를 피며,
돌아오지 않는 미래를 향해 떠났다.
60년대 한국시선집 젊은 시인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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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는 무엇하러
바위는 무엇하러 바위인가?
흙에서 뛰쳐나와 홀로
절벽과 마주 선 바위,
난만하게 핀 꽃들의 향기에도 취하지 않고,
거친 비바람에도 흔들림 없고,
애틋한 물 소리에도 격하지 않아 그것을
바위라 하지만
그의 무심無心은 대체 무엇이 되려 하는가?
면벽천년面壁千年, 하늘이 되려는가?
묵언만년默言萬年, 바람이 되려는가?
스스로 길을 막고 절벽과 마주서서
바위는 흙이기를 거부하지만
보아라,
네 가슴에 자라는 한 포기 난蘭을,
감정처럼 축축히 젖는
이끼를.
시집 / 벼랑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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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피리
나는 당신의
피리인지 모릅니다.
당신의 부드러운 손길이 내 육신을 애무할 때마다
이, 목, 구, 비-
다섯 개의 구멍에서
솟아나는 음률,
푸르른 봄날 당신이
강언덕에 앉아 피리를 불면
나는 아지랑이가 되어
이 세상의 꽃봉오리들을 터뜨리고,
쓸쓸한 가을날 당신이
산언덕에 앉아서 피리를 불면
나는 갈바람이 되어
이 지상의 나뭇잎들을 떨어뜨리고,
나는 꿈꾸는 허공,
텅 빈 구멍,
당신의 피리인지 모릅니다.
아니 당신의
피리랍니다.
2000. 시와시학. 가을호 / 당신의 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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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山門)에 기대어
산이 온종일
흰 구름 우러러 사는 것처럼
그렇게 소리 없이 살 일이다.
여울이 온종일
산 그늘 드리워 사는 것처럼
그렇게 무심히 살 일이다.
꽃이 피면 무엇하리요.
오늘도 산문(山門)에 기대어
하염없이
먼 길을 바래는 사람아,
산이 온종일
흰 구름 우러르듯이
그렇게 부질없이 살 일이다.
물이 온종일
산 그늘 드리우듯이
그렇게
속절없이 살 일이다.
~~~~~~~~~~~~~~~~~~~~
찻잔
차를 끓인다.
欲情욕정의 불이 쇠할 때까지
주발의 물을
달구고
사랑하는 사람 앞에
꿇어앉아
靑磁茶器청자다기를 편다.
육신은
영혼이 갈할 때만
켜지는 등불,
그 등불 앞에서
입술을 적시고
盞잔을 비운다.
진실로 사랑이란
비움으로써 가득 차는
공간,
그대 손으로
채워지는 盞잔,
차를 끓인다.
欲情욕정의 불을 삭힌다.
시집 ; 너 없음으로 / 좋은날.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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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흙
-그릇14
차라리 깨진다.
바닥으로 밀려난 그릇.
자리를 찾지 못한
인생은 서성이는데,
손님은 아직도
밀려드는데,
잔칫상 모퉁이에서
바싹
깨지는 그릇.
자리에서 밀린 그릇은
차라리 깨진다.
깨짐으로써 본분을 지키는
살아 있는 흙,
살아 있다는 것은
스스로 깨진다는 것이다.
제 몫의 빵을 얻지못해
자리를 다투는 인간이여,
언제인가 썩을
한 개의 빵을 먹기 위해
너는 그릇을 움켜쥐지만
영원히 주어진 자리란 없다.
잔칫상의 타오르는 불꽃 아래서
스스로 깨지는 그릇 하나,
사기 그릇 하나.
시집 ; 神의 하늘에도 어둠은 있다 / 미래사.
~~~~~~~~~~~~~~~~~~~~~
난을 기르며
난을 기르며
한겨울 난다.
밖에는 여인의 원한 같은
서릿발이 치고
사는 것이 서럽다고 서럽다고
눈보라 에우는데,
병든 지어미의 머리맡을
다소곳이 지키는 한 포기의
난,
난은
겨울을 먹고 사는 꽃이다.
꽃을 꺾기 위하여
사랑하는 사람들은
난을 기를 일이다.
여윈 암노루
사향 찾아 떠나간 빈 골을
싸늘한 향기로 피어나는
꽃,
난을 기르며 보낸 한 철은
서러운 듯 서러운 듯
아름다워라.
시집 ; 반란하는 빛 / 문학동네.1997.
~~~~~~~~~~~~~~~~~~~~
신神의 하늘에도 어둠은 있다
----그릇39
내가 원고지의 빈칸에
ㄱ, ㄴ, ㄷ,ㄹ......
글자를 뿌리듯
神은 밤하늘에
별들을 뿌린다,
빈 공간은 왜 두려운 것일까,
절대의 허무를
빛으로 메꾸려는 저, 神의
공간,
그러나 나는 그것을
말씀으로 채우려 한다.
내가 원고지의 빈칸에
ㄱ,ㄴ,ㄷ,ㄹ.....글자를 뿌릴 때
지상에 떨어지는 씨앗들은
꽃이 되고 풀이 되고 또
나무가 되지만
언제인가 그들 또한
빈 공간으로 되돌아간다.
나와 너의 먼 거리에서
유성의 불꽃으로 소멸하는
언어,
빛이 있으므로 神의 하늘에도
어둠은 있다.
시집 ; 神의 하늘에도 어둠은 있다 / 미래사
~~~~~~~~~~~~~~~~~~~~
하나의 별
흙이 묻은 하나의
별이 있다면
진실로 물에 젖은 한줄기
별빛이 있다면,
별빛이 밟고 올 길섶의
꽃 이슬과 깨진 心臟심장 같은 破片파편으로
정말 부둥켜 안고 딩굴 눈물이 있다면,
그늘진 이마에 내리는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쓸어넘기며,
우리들의 죽음을 마련할 한평의 땅은
별이 되리
眞實진실이 되리,
흙이 묻은 하나의 별이 있다면
진실로 물에 젖은
한줄기 별빛이 있다면.
시집 ;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 / 문학사상사
~~~~~~~~~~~~~~~~~~~~~~
먹물 장삼
슬픔도 없다.
기쁨도 없다.
양지 바른 툇마루에 홀로 앉아
꿈꾸는 듯 조으는 듯 먼 산 바래는
홑무명 먹물장삼 매마른 어깨,
앞뜰의 불두화佛頭花 낙엽 지는데
뒤뜰의 돌미륵 금이 가는데
코스모스 꽃 대궁에 단정히 앉아
하아얗게 굳어가는 잠자리 하나,
텅
비워낸 육신의
날갯짓 하나.
시집 ; 벼랑의 꿈 / 시와시학사. 1999
~~~~~~~~~~~~~~~~~~~~
슬픔
비 갠 후
창문을 열고 내다보면
먼 산은 가까이 다가서고
흐렸던 산색은 더욱 푸르다.
그렇지 않으랴,
한 줄기 시원한 소낙비가
더렵혀진 대기, 그 몽롱한 시야를
저렇게 말끔히 닦아 놨으니.
그러므로 알겠다.
하늘은 신(神)의 슬픈 눈동자,
왜 그는 이따금씩 울어서
그의 망막을
푸르게 닦아야 하는지를,
오늘도
눈이 흐린 나는
확실한 사랑을 얻기 위하여
이제
하나의 슬픔을 가져야겠다.
시집 ; 꽃들은 별을 우러르며 산다 / 시와시학사. 1992
~~~~~~~~~~~~~~~~~~~~~~
이 그리움
푸르른 봄날엔
편지를 쓰자,
이 그리움 시로 써서
멀리 보내자,
옷깃 풀어헤친 꽃향기 태워
팔랑 팔랑 나비 하나 날려 보내자.
푸르른 봄날엔
피리를 불자,
이 그리움 선율 엮어
멀리 보내자,
귀밑 머리 간질이는 꽃바람 태워
하롱하롱 꽃잎들을 날려 보내자.
기다림에 지친 사람아
외로움에 지친 사람아
갈 산 빈자리에 봄 눈 녹는데,
갈 꽃 빈자리에 초록 드는데,
푸르른 봄날엔
강가에 가서
이 그리움 시로 써
물에 띄우자
~~~~~~~~~~~~~~~~~~
피리
외로운 날에는
피릴 불었다.
텅 빈 가슴을 울리는
바람 소리.
喜희, 怒노, 哀애, 樂락
네 개의 구멍은 깨졌구나.
여윈 손으로
등을 두드리며
마주대는 입술과 입술.
피리는
목이 渴갈한 자에게만
선율이 된다.
비어 있으므로 飛翔비상하는
날개.
외로운 날에는
江강가에 홀로 앉아
피릴 불었다.
깨진 肉身육신은 비에 젖는데
虛無허무의 空間공간을 울리는
바람 소리,파도 소리,
또 바람 소리
시집 ; 너, 없음으로 / 좋은날.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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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님의 기침 소리는
하늘의 별들을 떨어뜨리고
지상의 나는 치마폭으로
추락한 寶石보석들을 줍는다.
치마폭에는 또 하나의 하늘.
흰구름이 흐르고,
붙박이 새가 날고,
銀箔은박으로 수놓인 가을이 있고.
나는 내 하늘의 가을의
왕이더니라.
王冠왕관의 그 어즈러운 寶石보석처럼
내 이마 위에서 찬란하게 부서지는
消滅소멸.
님의 기침 소리가
하늘의 별들을 하나씩
떨어뜨릴 때마다
地上지상의 나는 치마폭으로
추락한 그리움들을 줍고.
시집 ; 너 없음으로 / 좋은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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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病
병이란
인간으로 태어난 특권에
지불해야 할 특별
소비세,
누구나 생애의 한번쯤은
세금을 내야 한다
~~~~~~~~~~~~~~~~
나무 / 오세영
나무가 나무끼리 어울려 살듯
우리도 그렇게
살 일이다.
가지와 가지가 손목을 잡고
긴 추위를 견디어 내듯
나무가 맑은 하늘을 우러러 살듯
우리도 그렇게
살 일이다.
잎과 잎들이 가슴을 열고
고운 햇살을 받아 안듯
나무가 비바람 속에서도 크듯
우리도 그렇게
클 일이다.
대지에 깊숙히 내린 뿌리로
사나운 태풍앞에 당당히 서듯
나무가 스스로 철을 분별할 줄을 알듯
우리도 그렇게 살 일이다.
꽃과 잎이 피고 질 때를
그 스스로 물러설 때를 알듯
~~~~~~~~~~~~~~~~~~~~~~~~
우리는 너무 가까이 있다 / 오세영
날리는 꽃잎들은
어디로 갈까,
꽃의 무덤은 아마도 하늘에
있을 것이다.
해질 무렵
꽃잎처럼 붉게 물드는 노을.
떨어지는 별빛들은
어디로 갈까,
별의 무덤은 아마도 바다에
있을 것이다.
해질 무렵
별빛 반짝이는 파도,
삶과 죽음이란 이렇듯
뒤바뀌는 것
지상의 꽃잎은 하늘로
하늘의 별은 지상으로......
그러므로 사랑하는 이여,
우리 이제부터는
멀리 있는 것들을 그리워하자.
우리는 시방 너무나
너무나,
가까이 있다.
~~~~~~~~~~~~~~~~~~~~
천년의 잠 / 오세영
강변의 저 수 많은 돌들 중에서
당신이 집어 지금
손 안에 든 돌,
어떤 돌은
화암사(禾巖寺) 중창 미타전(彌陀殿)의 셋째 기둥 주춧돌로
놓이기를 바라고,
어떤 돌은
어느 시인의 서재 한 귀퉁이에 나붓이 앉아
시가 씌어지지 않는 밤, 그의 빈 원고지 칸을 지키기를 바라고
또 어떤 돌은
어느 순결한 죽음 앞에서 만대(萬代)의 의(義)를 그의 붉은
가슴에 새기기를 바라지만
아, 나는 다만 당신이
물 수재비 뜨듯 또 다시 강가에 나를
팽개치지 않기만을------
아무도 깨워주지 않는 천년의 잠은
죽음보다 더 잔인할지니
흙 위에 엎드려 잠들기 보다는
급류 속의 일개
징검다리가 되리라.
그러므로 님이여, 장난 삼아 던질 양이면 차라리
거친 물살에 던지시라.
그리하여 먼 후일 당신이 다시 찾아오시는 날,
나는 즐겨 내 몸을 당신 앞에 바치리니
당신은 주저 말고 내 등을
밟고 건너시기를------.
~~~~~~~~~~~~~~~~~~~~~~~
제자리 / 오세영
급류(急流)에
돌멩이 하나 버티고 있다.
떼밀리지 않으려고 안간힘 쓰며
안간힘 쓰며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꽃잎처럼
풀잎처럼
흐르는 물에 맡기면 그만일 텐데
어인 일로 굳이 생고집을 부리는지.
하늘의 흰구름 우러러보기가
가장 좋은 자리라서 그런다 한다.
이제 보니 계곡의 그 수많은 자갈들도
각각 제 놓일 자리에 놓여있구나. 그러므로
일개 돌멩이라도
함부로 옮길 일이 아니다.
뒤집을 일도 아니다.
~~~~~~~~~~~~~~~~~~~
향기로운 꽃
하늘 맑은
햇빛 밝은 가을입니다.
가을에 피는 꽃은
향기롭습니다.
드러냄에 서두르지 않고
때의 유혹에 삼갈 줄 알아
겨울, 봄, 여름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을 농염하게 익혔기 때문이지요.
하늘 높고
햇빛 푸른 가을입니다.
숨어서 피는 꽃은 더
향기롭습니다.
세속의 욕망을 다스릴 줄 알고
때의 부름을 기다릴 줄 알아
스스로 자신을 낮춰 오히려
더 높고 푸른 세계를
껴 안는 꽃.
관악 준봉의
그 변함없는 바위틈에
홀로
난 한그루 꽃을 피웠습니다.
숨어서 더 향기로운
가을 꽃이 피었습니다
~~~~~~~~~~~~~~~~~~~
문 밖에서
당신은
어디에 숨어 계십니까,
당신이 계신 곳을 찾으려고
나는
꽃의 문 앞에서 서성거렸습니다.
당신은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꽃의 문을 열자 향기가 있었습니다. 향기의 문을 열자
바람이 있었습니다. 바람의 문을 열자 하늘이 있었습니다.
하늘의 문을 열자 빛이 있었습니다.빛의 문을 열자 무지개
가 있었습니다. 무지개의 문을 열자 비가 내렸습니다. 비의
문을 열자 나무가 있었습니다. 나무의 문을 열자 다시 꽃이
있었습니다.
당신은 어디에 숨어 계십니까.
나는 항상 당신의
문밖에 서 있습니다.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언제나 문밖에
서 있습니다.
~~~~~~~~~~~~~~~~~~
그리움에 지치거든
---ㅈ에게
그리움에 지치거든
나의 사람아,
등꽃 푸른 그늘 아래 앉아
한잔의 차를 들자.
들끓는 격정은 자고
지금은
평형을 지키는 불의 물,
靑磁 茶器에 고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구나,
누가 사랑을 열병이라 했던가,
들뜬 꽃잎에 내리는 이슬처럼
마른 입술을 적시는 한 모금의 물.
기다림에 지치거든
나의 사람아,
등꽃 푸른 그늘 아래 앉아
한잔의 茶를 들자.
시집 ; 神의 하늘에도 어둠이 있다 / 미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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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
무념무상이다.
애욕도 집착도 버려
벽을 마주하하고 결부좌한
노 스님
그의 화두는 중생화석衆生化石.
절벽을 바라보고 선정禪定에 든
바위 하나
그의 화두는 石化衆生.
어느 절에선가 석공은 오늘도
돌을 깨
불상佛象 하나 찾고 있다.
~~~~~~~~~~~~~~~~~~
젖은 눈
세숫물에 마른 갈잎 하나 파르르
떨어져 가을이다.
한 움큼 물을 뜨다 만채 물끄러미
들여다 보는 수면水面,
흔들리는 파문 사이로
하얗게 머리 센 사내 하나가
하늘 끝자락을 붙들고 망연히
나를 치어다보고 있다.
어디서 보았을까,깊고 짙은 속 눈썹,
그 젖은 눈에
하얗게 소복한 어머니의 손을 잡고
초등학교 운동장을 들어서던
어린 소년이 보이고
팔랑팔랑
나비처럼 뿌리치고 사라지던
꽃밭의 소녀가 보이고
바람벽을 등지고 쓸쓸히
소줏잔을 기울이던 원고지칸 사이의
사내가 보인다
한 움큼의 세숫물 마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려 텅
비어버린 손바닥,
문득
이가 시리다.
적멸의 불빛 / 문학사상사. 2001
~~~~~~~~~~~~~~~~~~~~~
사랑하는 이에게... / 오세영
집으로 오르는 계단을 하나 둘 밟는데
문득 당신이 보고 싶어집니다
아니, 문득이 아니예요
어느 때고 당신을 생각하지 않은 순간은
없었으니까요
언제나 당신이 보고 싶으니까요
오늘은 유난히 당신이 그립습니다
이 계단을 다 올라가면
당신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어요
얼른 뛰어 올라갔죠
빈 하늘만 있네요
당신 너무 멀리 있어요
왜 당신만 생각하면 눈앞에 물결이
일렁이는지요.
두 눈에 마음의 물이 고여서
세상이 찰랑거려요
그래서 얼른 다시 빈 하늘을 올려다 보니
당신은 거기 나는 여기
이렇게 떨어져 있네요
나..당신을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어요
햇살 가득한 눈부신 날에도
검은 구름 가득한 비오는 날에도
사람들속에 섞여서 웃고 있을때도
당신은 늘 그 안에 있었어요
차을 타면 당신은 내 옆자리에 앉아 있었구요
신호를 기다리면 당신은 건너편 저쪽에서
어서오라고 나에게 손짓을 했구요
계절이 바뀌면 당신의 표정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나 알고 있어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당신을 내 맘속에서 지울 수 없으니까요
당신 알고 있나요..
당신의 사소한 습관하나
당신이 내게 남겨준 작은 기억 하나에도
내가 얼마나 큰 의미를 두고 있는지
당신은 내 안에 집을 짓고 살아요
나는 기꺼이 내 드리고요
보고 싶은 사람
지금 이 순간 당신을
단 한 번만이라도 볼 수 있다면
오늘도 나는 당신이
이토록 보고 싶고 그립습니다.
~~~~~~~~~~~~~~~~~~~
편지 / 오세영
나무가 꽃눈을 피운다는 것은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찬란한 봄날 그 뒤안길에서 홀로 서 있던 수국
그러나 시방 수국은 시나브로 지고 있다
찢어진 편지지처럼 바람에 날리는 꽃잎
꽃이 진다는 것은 기다림에 지친 나무가 마지막
연서를 띄운다는 것이다
이꽃잎 우표대신, 봉투에 부쳐 보내면
배달될수 있을까 그리운 이여
봄이저무는 꽃 그늘 아래서 오늘은 이제 나도 너에게
마지막 편지를 쓴다. .
~~~~~~~~~~~~~~~~~~~~~~~
이별이 가슴아픈 까닭 / 오세영
이별이 슬픈 건
헤어짐의 순간이 아닌
그 뒤에 찾아올
혼자만의 시간 때문이다.
이별이 두려운 건
영영 남이 된다는 것이 아닌
그 너머에 깃든
그 사람의 여운 때문이다.
이별이 괴로운 건
한사람을 볼 수 없음이 아닌
온통 하나뿐인
그 사람에 대한 기억 때문이다.
이별이 참기 어려운 건
한 사람을 그리워해야 함이 아닌
한번도 해보지 않았던
그 사람을 지워야 함 때문이다.
이별이 아쉬운 건
한 사람을 곁에 둘 수 없음이 아닌
다시는 그 사람을 볼 수 없음 때문이다.
이별이 후회스런운 건
한 사람을 떠나 보내서가 아닌
그 사람을 너무도 사랑했음 때문이다.
이별이 가슴아픈 건
사랑이 깨져버림이 아닌
한 사람을 두고 두고
조금씩 잊어야 함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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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나의 일곱 살 적 어머니는
하얀 목련꽃이셨다.
눈부신 봄 한낮 적막하게
빈 집을 지키는,
나의 열네 살 적 어머니는
연분홍 봉선화꽃이셨다.
저무는 여름 하오 울 밑에서
눈물을 적시는,
나의 스물한 살 적 어머니는
노오란 국화꽃이셨다.
어두운 가을 저녁 홀로
등불을 켜 드는,
그녀의 육신을 묻고 돌아선
나의 스물아홉 살,
어머니는 이제 별이고 바람이셨다.
내 이마에 잔잔히 흐르는
흰 구름이셨다.
한국시인협회 엔솔러지 / 사철 푸른 어머니의 텃밭 / 2008. 11 황금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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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상대義湘臺 / 오세영
천여 년 전 신라新羅 고승高僧 의상대사義湘臺師는
여기서 무엇을 보았을까요.
바다도 하늘을 날 수 있음을
홀연 보았겠지요.
먼 수평선 너머에서 달려와
장렬하게 부딪혀 일제히 파랑새, 나비 떼로 날아오르는
벼랑의 거친 파도.
그 때 수천 리 만행萬行길의 의상대사는
여기서 또 무엇을 보았을까요.
잠자는 흙에서 깨어난 바위 하나가 문득
기지개 켜는 소리를 들었겠지요.
수만 년 뜨거운 불덩이를 안고 안으로 안으로 굳혀
침묵의 절정에서 피워 올린 붉은 연꽃 한 송이.
드디어 이곳에서 명상에 든 의상대사는
마침내 무엇을 알았을까요.
동해에서 떠오르는 해도
말갛게 씻어 올리는 새벽안개가 있어야 그 빛이 밝다는 것을
홀연 알았겠지요.
아, 여기서는 하늘이 바다가 되고 바다가 하늘이 됨이니
구름이 꽃이요 꽃이 구름입니다.
지금 이 시간 이 장소에서
내 귀밑머리를 날리는 당신의 그 고운 목소리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또 만나게 될까요
시집 / 임을 부르는 물소리 그 물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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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산철벽
까치 한마리
미류나무 높은 가지 끝에 앉아
새파랗게 얼어붙은 겨울 하늘을
엿보고 있다
은산철벽,(銀山鐵壁)
어떻게 깨트리고 오를 것인가
문 열어라, 하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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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새날은 / 오세영
새해 새날은
산으로부터 온다
눈송이를 털고
침묵으로 일어나 햇빛 앞에 선 나무,
나무는
태양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새해 새날은
산으로부터 온다
긴 동면의 부리를 털고
그 완전한 정지 속에서 날개를 펴는 새
새들은 비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새해 새날이 오는 길목에서
아득히 들리는 함성
그것은 빛과 밫이 부딪혀 내는 소리,
고요가 만들어 내는 가장 큰 소리,
가슴에 얼음장 깨지는 소리
새해 새날은
산으로부터 온다
얼어붙은 계곡에
실낱같은 물이 흐르고
숲은 일제히 빛을 향해
나뭇잎을 곧추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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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가 저렇게
보리가 저렇게
하루하루 푸르러 가는 것은
저녁마다 하늘과 입맞춤하기 때문이지요.
보리가 저렇게
쑥쑥 자라는 것은
새벽마다 종다리의 노래를 듣기 때문이지요.
보리가 저렇게
알알이 이삭을 패는 것은
밤마다 별들을 따먹기 때문이지요.
하느님, 하느님,
이 저녁의 만찬엔 당신이 꼭 계셔야 합니다.
이슬과 바람과 별로 차려진
우리들의 식탁,
촛불은 없어도 좋아요.
휘영청 밝은 달이 있으니까요.
보리가 저렇게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은
당신이 오시기를 고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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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담사 시편
1. 봄
이른 아침
꾀꼬리 울음에 눈을 뜨자
온 도량이 부산하다.
까치는 비질하고, 촉새는 먼지 털고,
물총새는 물 나르고
뒤늦게 온 멧돼지가
씩씩거리며 길을 닦는다.
산(山)어머니 딸들을 데리고
꽃 공양을 오시는 날,
뜰 앞 잣나무는 남몰래
가슴 두근거리는데
정작 이 절 회주는
무사태평,
아직도 침상에서 취침 중이다.
2. 여름
여름의 백담사는
스님 대신
흐르는 계곡물이 염불을 한답니다.
그 철엔 관광객이 어찌나 많던지
법당, 선방(禪房), 요사체 할 것 없이
온 절을 점령하여 북새통을 이룸으로
그 등쌀에
스님들은 아예 절을 버리고
깊은 산중 수행처로 피신한 때문이지요
그래서 할 수 없이
도량 앞을 흐르는 맑은 계곡물이
돌들을 목탁 삼아 두드리면서
“마하반야 바라밀다……”
온종일 독경을 한답니다.
그 중 간혹 깨달음을 얻은 자는
아상(我相)을 버려 밋밋해진 돌들이
부처의 법신(法身)임을 눈치 채고
하루 종일
자갈밭에 돌탑을 쌓기도 하구요.
지금도 그 곳에
수백 개 돌탑들이 서 있는 이유인즉 모다 그렇지요.
그래도 백담사 계곡물은 여전히
“돌돌돌” 혹은
“졸졸졸” 하지 않고
“마하반야 바라밀다……” 로
흐른답니다.
3. 가을
백담사(白潭寺) 무금선원(無今禪院) 다락에 앉아
가을 산과 대좌하여 홀로
차를 마실 땐
냉수 한 사발로 족하답니다.
선방 창 앞의 베롱나무가
곱게 단풍이 들면
언제나 박새 한 마리가 날아와
몰래 차 시중을
들어주기 때문이지요.
어디선지
냉큼 찻잎을 물어오고, 약초를 물어오고,
가끔은 하늘도 한 잎 물고 와서
사알짝 찻잔에 띄워주지요.
훌륭한 선지식(禪智識)은 아예 못 본 체
나 같은 무식에게만 늘
그렇답니다.
4. 겨울
우지끈
설해목(雪害木) 쓰러지는 소리에 놀라
잠 깨어 문뜩 귀를 기울여 본다.
달빛에 젖어
봉창에 어리는 부처의 법신(法身),
창문을 열자 아아,
뜰의 전나무 한 그루
새하얀 눈밭에 홀로 서서 화안이
이쪽으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산이 조용하게 내 손목을
잡아준다.
문 열어라 하늘아, 서정시학,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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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롱꽃 / 오세영
아름다움이 애인의 것이라면
안식은 아내의 것,
무더운 여름날
아내의 무릎에 누워
그녀의 시원한 부채질 바람으로
낮잠을 자 본자는 알리라.
여자는 향그러운 꽃 그늘이라는 것을,
꽃의 아름다움보다는
그늘의 안식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형체가 흐려
꽃보다 그늘이 넉넉한 꽃.
神은
이 지상의 *간난艱難을 위해서 미리
롱꽃을 예비해 두셨다.
시안,2002,가을호
2003 좋은시 /삶과꿈
* 간난 艱難: (하는 일이 ) 힘들고 고생스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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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해성사 / 오세영
가을 되자 뜰의 벚나무
하나, 둘
잎들을 떨어뜨린다.
낙엽 지는 소리로 나는 가슴 깊이 감추어둔
그의 비밀을 듣는다.
낙엽은 나무들의 어휘,
우수수
내 쏟는 말씀과 말씀.
한 생을 살면서 나무는
무슨 일들을 저질렀을까.
사랑과 증오의
믿음과 배신의
색색이 물든 그 잎새들.
나무도 임종의 시간에는
말문을 튼다.
뜰에 혼자 몸 벗고 덩그라니 서서
조용히 고해성사를 하는
벚나무 한 그루.
바람의 그림자 / 천년의 시작,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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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고 말할 때
사랑한다고 말할 때,
남는 건 虛無허무뿐이다.
사랑한다고 말할 때,
남는 건 그리움뿐이다.
진실을 믿기 위하여
진실을 말하라지만
당신은 아름다운 에고이스트.
사랑은 언제나 있고
사랑은 언제나 없다.
내가 믿는 것은 하나의 아픔,
하나의 虛無, 하나의 그리움,
그리고 빛 속의 어두운 그림자,
사랑한다고 말할 때
사랑은 외로워진다.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 / 문학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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