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포 남짓 금주, 금연 상태이니 생애 몇 차례로 손꼽히는 인고(忍苦)의 기록이다.
15년 전쯤, 치과의사의 임플란트 시술 명령에 바싹 쫄아 시도한 게 처음 금주였던 것 같다. 술은 그냥저냥 견딜 수 있었는데 금연이 훨씬 힘들어서 담배 피우는 사람들 곁에 서서 기웃기웃 연기라도 맛보곤 했던 것 같다.
나머지 금주 기록은 몸이 아프거나 타박상으로 이마가 깨졌을 때이다. 마지막은 2023년 12월에 대학 동기 신동준, 황재학, 권영주 등과 1박 2일 합숙 중의 돌발 사태이다. 술 취한 모텔에서 발바닥을 질질 끌고 가다가 화장실 출입구 턱에 걸렸으니 과음 탓이리라. 이마 상처를 핑계로 열흘가량 금주를 선언하자 술벗들이 엄칭이 아쉬워했다.
연말에 신체검사를 받은 게 두 번째 금주의 강압 체험이다. 대장암 검사는 그럭저럭 통과했는데 위내시경에서 제동이 걸린 것이다. 위궤양 현상이 나타났으니 일단 2월 27일까지 금주한 결과를 보고 체크한 다음 다시 결정하겠단다. 결과 유무를 떠나 50년 술판 이력이 막바지에 온 것만큼은 거의 확실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술 담배에 선을 그은 기록이 몇 차례 되었으니 ‘그 까이꺼’ 지금도 엄청 겁을 먹을 사태 따위는 절대 아니다.
나는 늦깎이 이력(履歷)의 음주, 애연가이다. 고딩 시절 즈음이었을까, 불량 벗님들이 술 담배에 손을 대기 시작할 때 내가 그들의 행동을 저어하며 요리조리 피하면,
‘사나이 스무 살에 육박해서 술 담배를 못하나? 쪼잔한 늠’
깔보는 눈빛을 보이곤 했다.
그러다가 한탄강 육군 취사병 상병 즈음 음주와 흡연을 접하면서 순식간에 주태백 골초로 변신하면서 수십 년 세월이 빛의 속도로 흘렀갔다. 속도의 차이가 있지만 저마다 등이 굽고 머리카락이 빠지면서, 예전에 나에게 ‘술 담배 좀 배워라, 얼라야’ 하면서 깔보던 벗들이 초로에 접어들면서
‘아니, 아직도 음주 흡연이라니 천연기념물이야 뭐야.’
설레설레 도리질치는 것이다.
반백 년 가까이 술판에서 종횡무진 놀았으니 당연히 나의 몸도 때가 되긴 했다. 슬프지는 않다. 초로에 접어들었으니 몸의 구조를 이렇게도 바꾸고 저렇게 바꿔보는 것이다. 위궤양이 치료되면 막걸리 몇 잔씩 홀짝거리게 될 것 같다. 실천 준비 중.
대천의 ‘금강의 소설가들’ 모임에서도 마시지 않았다. 특히 안학수 서순희 소설가 부부가 안타까워하면서 안절부절 술잔을 만지작거렸으니 순전히 우정의 발로이다. 쏘주 딱 두 잔으로 마감한 것 같다.
이상하다, 젊은 날처럼 '마셔, 마셔. 절대로 안 죽어.' 재촉하거나 윽박지르는 벗이 사라졌다. '그려 때가 되긴 했징'하는 표정으로 안쓰럽게 바라만 보는 것이다. 2차를 가지 않으니 귀가 시간이 빨라졌고 웬일일까, 얼굴빛도 뽀얗게 피어오른다.
사위의 캐나다 출장으로 딸네 집에서 보름을 보내면서.
여기저기 벗들을 만나면서도 금주 원칙에 나름 충실했다.
김상배 전무용 시인을 만난 잠실역 새마을 시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순대국에 쏘주 두 병을 시켜서 김상배(당뇨)와 나는 한 잔씩 놓고 깔짝거렸고 전무용 혼자 열 잔 정도 마셨다. ‘위궤양은 흔한 병이야.’ 하면서도 ‘마셔, 마셔’하며 괴롭히지 않았으니 적당한 연륜 탓이다. 전무용 시인의 ‘어원 유래’ 강의도 흔쾌히 들으면서.....예전 같으면 예닐곱 병 비우고 또 호프집을 찾았겠지.
형제 모임에서 동생들 강병준 강병호 강병선를 만났을 때도 그랬다. 우선 나의 발언 점유율이 대폭 줄었다. 와인 반 잔을 따라놓고 이리저리 돌리기만 하면서 피붙이의 설왕설애를 경청했다. 건배할 때 똑같은 포즈로 건배한 다음 팔목만 연신 올렸다가 내려놓기만 반복하는 것이다. 숙달된 조교처럼.
을지로 3가에서 김태수 형님(파월 백마부대 제대병)과 김상배 시인을 조우(그의 딸네 집과 내딸의 집이 아주 우연히 잠실아파트 옆 동이었음)했을 때에도 빈 잔만 깔짝거렸다. 맥주 잔에 쏘주 한 잔과 맹물을 가득 합쳐 놓고 뱅글뱅글 돌리는 작전으로 버텼다.
고딩 동창 강경석 사진 작가와 (고교 동창 계원 10명 중 4명이 중앙대 사진학과에 진학함) 만났을 때에도 내장탕 한 그릇과 카페라떼 한 잔으로 적당히 때웠다. 몇 차례 밥값을 계산해도 술값보다 싸다는 사실을 안 것도 삶의 지혜이다.
딸 강주현과 영화 ‘괴물’ ‘윙카’ ‘시민 덕희’까지 세 편이나 보아도 시간이 팡팡 남았다. 아퀴아리움에서 전기뱀장어와 펭귄도 보고 125층에서 치자차도 한 잔 마시며 시골 노인처럼 '히야, 서울은 엥간히 잘헤놨네' 감탄도 햇다. 시 두 편을 써서 페이스북에 올렸으니 본전치기하고도 남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