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관련 글은 금지지만, 이건 해외상황이니까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 그냥 알아두시라고 올립니다.
바쁘신 분들을 밑에 대충 요약해놨으니까 그것만 보셔도 괜찮...을까여??
원출처 : http://www.clien.net/cs2/bbs/board.php?bo_table=park&wr_id=23365271
아랍의 봄에 불어닥친 재스민향 가득한 시민민주혁명 이후 이집트 정국이 극도의 혼란에 빠져 군부는 예고된 쿠데타를 실행하여
혁명 후 선출된 대통령 무르시를 권좌에서 끌어내렸습니다. 이러한 군부의 쿠데타에 반발하는 구 여권 지지시위대를 군부가
유혈진압, 수백 수천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정부당국이 600여명 사망자라고 했고 시위대측은
2천명이 넘는다고하니 거의 살육에 가까운 참담한 학살상황입니다.
살인마 전두환과 살인마 피노체트가 벌인 광주와 산티아고에서의 유혈학살과 그 모양새가 비슷하지만
또 현저히 다른 구석이 있어 참 복잡미묘한 심정입니다.
이집트에서 식민지배와 왕정복고 직후에 나세르가 주도하는 청년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왕정체제를 전복시키고 군부가
실권을 장악한 게 1952년입니다. 쿠데타동지였던 나기브를 실각시키고 나세르가 대통령에 취임한 게 56년, 그 후 나세르는
장기간에 걸쳐 이집트를 통치하며 제3세계권에서 주요한 정치지도자가 되었고 이집트내부에서도 나름 나쁘지않은 평가를
받았었습니다. 현대정치사에서 모든 군인출신 정치권력자들이 나쁜 평가를 받는 건 아닙니다. 아이젠하워와 드골같이
좋은 평가와 나쁜 평가를 함께받은 지도자도 있었고 핀란드의 국부로 칭송받는 만네르하임 장군 같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만네르하임은 그의 나이 72세에 2차대전에서 러시아가 핀란드를 침공하려하자 허약한 핀란드 군을 이끌고 러시아와 싸우고
독일과도 싸우며 대통령이 되어 조국을 지켜낸 인물로 전국민적인 추앙을 받는 군부출신 대통령이지요.
낫세르가 그정도까지라고하긴 힘들긴해도, 그가 행한 군사쿠데타가 박정희나 전두환 피노체트가 벌였던것같은 민주질서를
유린한 반민주적 쿠데타가 아니라 외세식민제국주의에 빌붙는 왕정체제를 전복시킨 것이었고 이집트와 아랍민족의 자긍심과
단결을 고취시켰다는 점 등등으로 인하여 이집트국민들에게는 일정정도 인정과 지지를 받았습니다. 20세기들어 제3세계
특히 아랍권에서 가장 주요한 정치지도자 중의 한 명으로 부상하던 나세르는 52세라는 젊은나이에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그 뒤를 이어, 청년장교시절 이집트를 지배하던 영국에 대항하여 군사반란을 일으키다가 투옥되었고 이내 감옥을 탈옥하는 등의
드라마틱한 삶 속에서 동갑내기 나세르 등과 함께 왕정을 전복시키는데 중추적 역할을 했던 사다트가 대통령직을 이어갑니다.
권력을 잡은 사다트는 친미적이고 친이스라엘적인 행보를 내디뎠고 당시 이스라엘 총리와 함께 중동의 봄을 이끌어
노벨평화상까지 공동수상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무슬림근본주의자들을 탄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지금 이집트에서 무차별 살육을 당하고 있는 무슬림형제단(Muslim Brotherhood 약칭 MB)의 강경하고
전투적인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사다트는 암살을 당하고 맙니다.
그렇게 피살당한 사다트의 후계자가 바로 재작년 아랍의 봄 재스민혁명 때 국민들로부터 축출당한 무바라크 입니다.
앞서 이집트 군부독재자들은 육군출신이었던데 반해 무바라크는 공군출신입니다. 나세르와 사다트 이들 두 동갑내기가
군사혁명을 일으키던 시점에 무바라크는 이집트 공군사관학교 사관조종생이었습니다.
마치 5.16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와 당시 육사생도를 부추겨 쿠데타지지시위를 벌인 전두환과의 관계가 오버랩되기도 합니다.
몇 번의 중동전쟁에서 전과를 세워 육군출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다트의 신임아래 부통령이 된 무바라크는
사다트 암살직후 재빨리 이집트의 실권을 장악하고 1981년부터 2011년까지 장기독재에 돌입합니다.
그 30년간의 군부독재의 말로는 다들 잘 아시다시피 재스민 혁명을 통해 비참하게 막을 내렸습니다.
군부독재에 지치고 성난 이집트 민중은 연일 반정부 시위를 강경하게 전개했고 무바라크는 이를 막아내기 위해
경찰과 보안군을 동원했었습니다. 하지만 육군중심의 군부는 반무바라크 운동을 지지하고
심지어 시위대를 보호하기 시작했습니다. 경찰과 보안군의 시위대에 대한 폭력진압을 육군의 장갑차들이 몸빵으로
막아주기까지하며 무바라크를 압박한 셈입니다. 공군출신 무바라크가 자신의 자식들에게 권좌를 세습하려하는 등
그동안 이집트 권력의 중심에서 서서히 밀려날 것 같던 육군중심의 군부실권자들이 反무바라크진영에 가담함으로써
혁명의 향배는 일찌감치 기울었습니다.
문제는,
민주혁명 이후에 집권한 세력이 앞서 언급한 강경 이슬람 근본주의세력인 무슬림형제단이란 점입니다.
나세르와 사다트의 왕정전복 쿠데타직후 잠시동안 자유청년장교단과 무슬림형제단 사이엔 허니문이 있었으나 몇 년 후
나세르는 자신에 대한 암살기도를 이유로 MB단 지도자들을 대거 투옥하고 추방하는 등의 가혹한 탄압을 벌여
완전히 척을 집니다. 가혹한 탄압을 받았던 무슬림형제단의 후예들이 결국 낫세르의 후계자 사다트를 암살하기까지 했으니,
이집트를 식민지와 왕정으로부터 구하여 공화국을 수립했다는 자부심 가득한 육군중심의 군부와 그들의 리더를 암살하려했고
실제 암살까지 성공하였으며 이집트를 원리주의적 종교국가로 회귀시키려는 무슬림형제단 사이는
도저히 같은 하늘아래 함께할 수 없는 불구대천의 원수인 셈입니다.
사실 무르시를 대통령으로 옹립하는데 성공한 MB단이 처음부터 反무바라크 反군부독재 시위의 선봉에 서서
민주주의 혁명을 이끈 것은 아닙니다. 이들은 무바라크 체제하에서 은근한 밀월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낫세르가 자신의 암살기도를 빌미로 MB단에 대한 가혹한 탄압을 전개한 이래 일부는 알카에다같은 무장테러투쟁세력으로
분화하였지만 다수의 형제단은 서서히 기층에서부터 세력를 다져왔습니다.
그람시식으로 표현하자면 진지전과 기동전을 병행한 셈인데 외국이나 치안력이 미치지 않는 외곽지역에서는 무장투쟁을,
도심지 등에서는 병원설립과 복지활동전개 등의 기층민중활동을 통하여 착실히 성장했습니다. 그 결과 무바라크 치하에서
무소속으로들 출마(공식적으로 정교분리를 엄격히 하는 군부독재체제하에서는 무소속으로밖에 출마할 수 없는 어려움 속에서도)
하여 MB단은 의회에서 일정지분까지 확보했습니다. 이렇듯 독재세력과 '적대적 공생관계'를 유지하던 차,
아랍의 봄 재스민 혁명을 맞이한 것이지요. 그들이 원하는 건 민주주의적 혁명이 아니라 이란에서와 같은 무슬림혁명이었기
때문에 초기에 꽤나 당혹스러워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런 연유로 이들 무슬림형제단은 청년과 진보적지식인 중산층 등이 민주개혁을 외치며 피를 흘리던 초기에 반체제시위에
참여하지 않고 뒷전에 멀찌감치 떨어져있었는데, 결국 혁명에 뒤늦게 참여하고 그 아름다운 혁명의 과실은
고스란히 무슬림형제단이 따먹게 되고 말았습니다
무바라크에 반기를 든 가장 큰 세력은 청년학생 실업자 도시빈민 등이었고 여기에 진보적 좌파그룹과 중산층이 합세하고
인구의 10%에 못미치는 초기기독교계파 콥트교 신자들도 힘을 보태어 민주혁명을 이뤄냈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혁명의 지도적구심점도 없었고 수권능력도 부재한 상태였습니다. 결국 민주화 이후 치뤄진 선거에서
선택지가 부족한 상황에서 조직력이 뛰어난 MB단 후보들에게 표를 많이 주어 그들을 원내 제1당으로 만들어주었고
결국 MB단 무르시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이후 혁명을 이끈 이집트국민들은 권력을 잡은 MB단의 무능과 제정일치
신정회귀의 정치행보 등에 크게 실망하고 "혁명이 탈취당했다"라고 분노하며 거국적인 反무르시 反MB 시위를 고강도로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혁명이 탈취당했다고 분노할만한 것이, 정권을 잡은 무슬림형제단은 이른바 파라오헌법이란 오명을 뒤집어쓴 개헌헌법 제정을
주도하였는데 이것은 쟈스민혁명이 원하던 바와 완전히 다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에게 절대적권한을 주고
무슬림성직자들이 정치와 국가행정에 관여하게만들려하였고. 남자만이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헌법조항을 넣으려 하고,
술과 비키니를 금지해서 이집트관광산업을 암흑으로 몰아넣었고 청년실업률을 몇 배나 악화시키는 등등...
그런 행태에 넌덜머리가 난 민심의 이반은 극에 달했고 집권여당에 참여했던 민주시민세력의 이탈도 가속화되었습니다.
이들 민주시민세력들이 무슬림형제단이 장악하고 있는 관공서나 정부청사 등에 대해 시위를 벌일 때조차 경찰과 군부는
관공서를 경비해 주지 않겠다고 선언할 정도였습니다. 결국 MB단과 원수지간인 군부는 혼란한 정국을 수습하겠다는
명분과 민심의 지지를 핑계삼아 쿠데타를 통하여 무슬림형제단을 지난달 권좌에서 끌어내립니다.
짧은시간이나마 권력을 쥐고서 이제 그들이 꿈꾸던 무슬림 근본주의 국가건설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급작스레 권력을 빼앗긴
親MB세력들은 이후 계속해서 군부와 민주시민세력에 대항하는 극렬한 시위와 폭력적 충돌을 전개하였습니다.
결국 군부는 수도 카이로에서 장기간의 과격시위를 펼치고 있던 MB지지 시위대에 총부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사태진행과정입니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국민들이 민주혁명을 일으켜 전두환을 몰아내고 민주주의를 꽃피우려하는데 혁명 후 어느틈엔가 등장한
집권세력이 바로 유교선비단. 이들 유교선비단은 왕정복고 유교근본주의를 내세우며 남녀칠세부동석에 암탉이울면 집안이
망하니 여자는 집구석에서 솥뚜껑운전만해야하고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을 유교근본주의국가로 만들려고해서 국민들이
"민주주의 시민혁명이 탈취당했다"며 반발, 결국 군부가 유교선비단을 축출하는 과정에서 유교선비단을 지지하는
구여권시위대를 학살하는 상황인 셈입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이집트의 민주주의 혁명을 이끈 시민세력들 중의 상당수가 군부의 MB단 축출쿠데타를 반기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물론 진보적 좌파 단체는 당연히 무슬림근본주의자들도 반대하면서 동시에 군부의 재집권도 반대를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소수이고 다수는 차라리 군부가 나서서 이 혼란을 빨리 수습하고 새로운 정치일정을 짤 수 있기를 바라고 있는
형국입니다.
여기에 미국과 서방의 포지션도 애매해졌습니다. 민간인 학살과 군부쿠데타에 대해서는 당연히 한목소리로 고강도의 비판을
하지만, 미국과 서방국가들에게 있어 아랍의 가장 중요한 교두보인 이집트가 반미/반서방 무슬림근본주의 국가가 되도록
무슬림형제단의 집권을 방치할 수도 없었던 상황이었기에 MB단의 축출을 내심 반기며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가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닌게, 反무르시 反MB진영이 마냥 또 친미 친서방 성향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親무르시진영에서야 당연히 미국이 사주를 해서 무르시를 축출한 것이라며 反미여론이 들끓고 있고요, 지난달 무슬림형제단의
무르시축출 축하시민집회 그러니깐 무슬림형제단을 반대하는 이들이 군사쿠데타를 환영하면서 펼친 집회에서도 反미 反오바마
구호가 나왔으니 미국으로서는 매우 어정쩡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예전처럼 친미매판적 성향의 군부가
실권을 틀어쥐길 간절히 바라고 있을테지만 글쎄요...
암튼, 국제적으로도 그렇고 이집트 내부적으로 극도로 꼬이고 꼬인 상태인지라 앞서말씀드린 바대로 지금 대치 중인 세력 간에는
화해나 타협은 불가능한 상태로 악화되었습니다. 마치 db사용자들이 동일한 table 하나를 놓고 도저히 양보할 수 없는 완벽한
deadlock 상태에 맞물려버린 상태. 결국 한 트랜잭션을 deadlock victim으로 죽이든가 둘 다 죽이든가하지 않고서는
헤어나올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만 셈입니다. 어떻게되든 희생은 피할 수 없는 데드락상태일뿐이고 그 victim process의 규모와
여파가 어떻게 전개될 지가 관건인 상황입니다.
우리 시간으로 금요일에서 토요일로 넘어간 시각, 이집트는 지금이 금요일 오후 6시를 넘어가고 있겠군요. 무슬림들에게는
금요일이 가장 중요한 날이라고 합니다. 쿠란의 가르침에 따라 금요일 한낮 예배는 반드시 다 참여해야하고 그래서 관공서 등도
휴일이고 대중집회도 금요일이 절정이라고 하더군요. 아랍의 봄때도 금요일이 늘 고비였었지요. 학살을 당한 親무르시쪽에서는
대규모 집회를 예고하고있고 군부는 관공서 피습시에는 실탄을 사용해 방어하겠다며 유혈진압을 재차 천명한 상황입니다.
지금 CNN 홈피 속보를 보니 시위대 군중 속에 무장한 시위대원들도 보인다고 하는군요.
잔혹한 주사위는 던져졌고 이미 강을 건넌 상황. 그 강에는 핏물이 철철 흘러넘쳐흐르고 있어 화해나 타협은 불가능해
보입니다만, 그저 부디 더이상의 살육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