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과 사상 26, 강줌만, 개마고원, 2003.
지난 한 해(2002년)를 뜨겁게 달구었던 제16대 대선은 기존의 정치 지형에서 '비주류' 정치인이었던 노무현을 대통령에 당선시킴으로써 그 막을 내렸다. 이는 '변화와 개혁'을 바라는 많은 사람들의 적극적인 참여에 의해서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뤄낸 결과라 할 수 있다.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노사모)'으로 대표되는 자발적 지지층의 적극적 참여는, 정치 자금에서부터 선거 운동의 방법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에서 새로운 선거 문화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정치 영역에서는 그동안 수동적인 역할만 하던 유권자가 이제 적극적 참여자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이러한 기대에 부응하듯 새 대통령 당선자는 정권 인수 기간 동안에는 '국민이 대통령입니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활동을 했다. 그리고 2003년 2월 25일 취임식을 시작으로 '참여정부'라는 기치를 내건 노무현 정권이 출범했다.
새로운 정권이 출범한 지 3개월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건만, 새 정권을 향한 기득권 세력의 반개혁적 공세는 지금 현재도 지속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동안 정치인 노무현이 우리 사회의 '주류(main stream)'로 행세해 왔던 일부 '수구언론'과의 대립적 관계를 형성해 왔던 사실은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이러한 사실을 반영이라도 하듯, 대통령 당선자 시절부터 '조·중·동'을 비롯한 일부 언론이 그 공세의 선두에 서 있었다. 여기에 지난 정권 내내 새로운 전망의 제시는 등한시한 채, 단지 '비판을 위한 비판'으로 일관했던 한나라당이 적극적으로 가세하고 있는 실정이다.
때문에 일부 언론과 야당의 주장만을 듣다보면, 새로운 정권이 너무도 많은 문제가 있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나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 '참여정부'에서 행한 여러 가지 정책적 조처를 보면 아직까지는 문제점보다 기대를 지닐 수 있는 요인이 많다고 판단된다.
이와는 달리 진보 진영에서의, 새로운 정권의 개혁적이지 못한 면모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다. 미군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사망 사건'으로 촉발된 추모 열기와 불평등한 '한미행정협정(SOFA)'의 개정을 요구하던 국민들의 요구가 빗발치던 시기에, 당선자 신분으로 '추모 집회의 자제'와 '반미에 대한 우려'의 발언은 수구 세력들에게 공세의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 또한 취임 이후 그동안 쌓아왔던 남·북 사이의 신뢰를 자칫 일거에 허물지도 모를 '대북 송금 특별법'을 상당수 국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였다.
비록 '공포 후 수정'이라는 단서를 달기는 했지만, 한나라당의 안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은 자못 의외의 선택이라고 여겨졌다. 이외에 정당하지 못한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대한 우리 사회 일각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라크 파병'에 대한 조속한 지지를 천명한 것 또한 많은 사람들의 기대에 반하는 결정이었다.
이밖에도 경제와 외교 분야 등에서의 세세한 정책까지 따지면, 노무현 정권 출범 이후 개혁적이지 못한 내용이 적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취임 이후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의 '언행'과 '성과'에 대한 논란 역시 이러한 문제의 연장선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최근의 한총련과 전교조에 대해 정부 차원의 '강경한' 대응을 언급한 대통령의 지시 역시 그를 지지한 사람들에게 '참여정부'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앞에서 예로 든 몇몇 개혁적이지 못한 조처들은, 이상하리만큼 그동안 노무현을 세차게 공격했던 '수구 언론'들과 수구적 성격을 분명히 하고 있는 한나라당에서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딜레마는 과연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일부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우리 사회가 처한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문제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50일을 맞아 <문화일보>와 인터뷰를 하면서, 자신이 지난 정권의 실패를 똑같이 반복할까봐 불안한 느낌을 갖는다고 언급하였다. 그러면서 "보수 세력의 저항은 부닥쳐서 극복하고, 설득하고 극복해나가기 쉬운 쪽이다. 변화와 개혁을 유도하는 쪽의, 나에 대한 저항이라고 보기보다는, 그쪽의 마찰과 갈등이 저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빠지게 만든다"고 자신이 처한 상황을 토로하였다.
그러나 현재 전개되고 있는 상황은 오히려 '변화와 개혁'을 지향하는 세력들과의 갈등의 골이 점점 깊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만든다. 오히려 현 정부에서 '부닥쳐서 설득'해야 할 대상은 보수 세력이 아닌, '변화와 개혁을 유도하는 쪽'의 사람들이 아니던가?
그동안 강준만이 주도하는 '1인 저널리즘'의 성격을 지니고 있던 <인물과 사상>이 제26권부터는 여러 명의 편집위원이 참여하는 체제로 새롭게 바뀌어 출발했다. 따라서 책의 체제와 필진 역시 보다 다양해졌다는 점이 예전과 비교해서 뚜렷한 차이가 감지된다.
이제까지의 <인물과 사상>은 주로 강준만 1인 중심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필자의 분명한 관점이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성 있게 유지될 수 있었다는 점은 강점으로 평가될 수 있었다. 이제 그 '한계'가 어느 정도 드러난 시점에서, 새로운 편집위원들의 참여와 보다 다양한 필진들의 참여는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리라고 여겨진다. 물론 분명한 논지를 가지고 주제에 접근하여 이끌어 가는 강준만의 글쓰기 방식을 좋아하는 독자의 입장에서 다소 아쉬운 점도 없지 않다. 그렇지만 다양한 필진의 다양한 의견을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시도는 분명 환영할만한 변화라고 판단된다.
<인물과 사상 26>은 '노무현 정권의 딜레마'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과연 노무현 정권의 딜레마는 무엇이고, 또 그것은 어떻게 극복해 나가야 하는 것일까? 지난 두 차례의 대선에서 자신들이 지지하고 내세운 인물을 대통령으로 만들지 못했던 기존의 기득권 세력들에게는 현재의 국면이 위기로 인식될 만하다.
이런 까닭에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거센 공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지난 대선 과정에서 확인되었듯이, 우리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서 사람들의 적극적인 참여에 의한 변화와 개혁의 바람이 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변화의 바람이 거세게 일고 있기는 하나, 아직 주도적인 흐름으로까지 정착되고 있지는 못하다. 때문에 노무현 정권의 성패는 우리 사회에서 기득권 세력의 과도한 영향력을 줄이면서, 보다 합리적으로 만들어 갈 수 있느냐의 여부에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노무현 대통령 스스로도 언급했듯이, 현재의 우리 사회는 '수구 세력'과 '변화와 개혁을 지향하는 세력'이 사회의 제 분야에서 뚜렷이 맞서있는 형국이다. 이러한 세력 갈등의 와중에서 '참여정부'가 어떠한 정책을 채택하느냐의 여부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주목할 수밖에 없다.
이런 관점에서 노무현 정권과 진보 진영의 동반자적 관계를 모색한 홍세화·유시민·고종석의 대담은 대단히 유익한 시각을 제공해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스스로를 진보주의자로 평가하고 있는 홍세화와 자유주의자임을 내세우는 유시민의 시각은, 그들이 현재 몸담고 있는 정당(민노당과 개혁당)의 차이를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그러한 입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 모두 노무현 정권의 성공이 한국 사회의 미래를 위해서 중요하다는 동일한 결론에 동의하고 있다.
박정희 정권이래 가장 중요한 정치·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것이 바로 '지역감정'의 문제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다양한 진단과 처방이 있었지만, 막상 어느 것 하나 시원하게 해결되지 않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주제이다. 어찌 보면 이것은 우리 정치 문화의 후진적인 모습을 가장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 각각 호남과 영남에서 활동하고 있는 강준만과 최상천의 글은 통렬한 자기 반성의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고 여겨진다. 호남의 '자구적 보수성'에 대해서 논한 강준만이나, 영남의 '우리 정권'·'남의 정권' 의식에 대해서 비판하고 있는 최상천의 글은 정치적 입장을 떠나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바로 '우리'들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상당수의 사람들에게 생활과 의식의 측면에서 딜레마를 느끼게 하는 주제가 바로 '지역감정'의 문제일 수 있기 때문이다.
정상호의 글은 지난 DJ 정권에 대한 평가로부터 노무현 정권 들어 진행되고 있는 '반개혁' 공세에 대한 진단을 하고 있다. 여기에 경제 정책에 대한 언론의 태도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홍은주의 글은 현단계 우리 사회의 위치를 짚어볼 수 있는 유용한 시각을 제공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한나라당과 '조·중·동'의 '반개혁 연합'의 공세에 맞서기 위해서는, '정당개혁'과 '정치개혁'이 새 정권의 성패를 좌우할 수 있다는 정상호의 진단에 동의한다. 어쩌면 노무현 정권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지난 정권의 개혁이 실패한 원인에 대한 정확한 진단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그 성패에 대한 정확한 원인과 결과의 진단과, 이렇게 얻어진 문제 의식을 현 정권에서의 개혁 작업에 적절히 활용해야만 할 것이다.
이밖에도 '이회창 복귀설'에 대한 안수찬의 글과 노무현 정권의 '아마추어리즘'에 대한 박창식의 글은 지나치게 원론적으로 접근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이번 책의 필자가 지나치게 기자 출신이 많기 때문인지, 그동안의 <인물과 사상>의 논조에 비해서 그 긴장감이 다소 떨어지고 있다고까지 여겨진다. 특히 나의 관점으로는 안수찬과 박창식의 글은 문제의 핵심에 도달하지 못하고, 다소 피상적인 관찰에 머물고 있다고 판단된다. 또한 그러한 주제가 과연 부제로 내세운 '노무현 정권의 딜레마'란 주제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도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내가 강준만과 <인물과 사상>에 대해서 가장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부분은 바로 적극적인 반론권을 보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본격적인 이 책의 주제에서는 다소 벗어나 있지만, 여기에 수록된 김진석의 글은 <인물과 사상 25>에 실렸던 강준만의 글에 대한 반론의 성격을 갖고 있다. '보론(補論) 혹은 해론(解論)'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기는 하지만, 글은 차분하면서 진지하게 강준만의 글에 대해서 반박하는 성격의 글이다.
사실 토론이란 그 과정을 통해서 서로의 입장 차이를 분명히 하고, 또한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대의 폭을 넓혀나가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대체로 토론의 과정에서 다른 사람의 주장을 비판하기 위하여 논리의 비약이나 논지의 왜곡이 쉽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상대에 대한 비판 혹은 비난은 있되, 토론은 찾아보기 힘들다고나 할까? 김진석의 글은 서로 다른 입장에 대해 진지한 방식으로 토론에 임하고 있어, 앞으로 제기될 강준만의 반론이 기다려지기도 한다.
새롭게 편집위원으로 합류한 고종석의 인물비평적 성격의 글도 흥미롭게 읽었다. 간디학교로 알려진 녹색학원의 이사장인 김송현에 대한 인물탐구는, 그 글을 읽는 동안 삶의 철학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게 해주는 시간을 갖게 해 주었다. 신체적 불리를 극복하고 과거에는 언론인으로, 그리고 현재에는 교육자로서 활동하고 있는 김송현의 삶과 철학은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을 통해서 피상적으로 알고 있었던 대안교육에 대해서도 많은 이해를 할 수 있었다.
새로운 체제로 출간된 <인물과 사상 26>은 수록된 글들의 구체적인 내용의 평가와는 상관없이, 형식적으로는 일단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싶다. 3명의 편집위원이 매번 번갈아 기획을 담당한다고 하니, 앞으로 보다 다양한 형식과 내용으로 채워질 것으로 기대된다. 그동안 대부분의 강준만 자신의 글로 채우고 몇몇 필자들에게 지면을 할애했던 방식에서 크게 변화한 것이다. 강준만의 글은 이번에 출간된 26권에서는 머리말과 또 한편의 글만이 전부이다. 이외에 새로운 형식으로 선보인 좌담과 다양한 필자들이 참여하여 구성되었다는 점이 기존의 <인물과 사상>과 현저하게 다른 점이다.
현재의 정치·사회적 상황은 노무현 정권이 느끼는 딜레마만큼이나, 그를 지지했던 많은 사람들 역시 딜레마를 느끼고 있다고 여겨진다. '원칙과 상식'을 내세웠던 노무현 대통령의 정책적 결정이 과연 그러한 기준에 걸맞는가 하는 회의도 때로는 적지 않게 들곤 한다. 나로서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것이 사실이지만, 개혁에 대한 분명한 의지와 그동안 소외되었던 사회적 약자의 처지를 적극적으로 배려하는 정책이 보다 적극적으로 시행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다시 말한다면 새로운 정권의 정책이 수구세력에게는 '배려'를, 그리고 개혁진영에는 '원칙'만을 강조하는 모습으로 비춰져서는 안될 것이다.(차니)
*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리뷰(2003. 5. 21)
노무현 정권의 딜레마, '원칙과 상식'으로 풀어가길 - 오마이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