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저의 개인홈페이지에서 어떤 분이 "명상 등으로 자기 마음을 홀연히 깨닫는 것을 중히 여길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사회에 나아가서 수신제가치국평천하 하는 것을 중히 여겨야 하며, 그것을 수신 혹은 수행이라고 해야 한다"는 취지의 글을 올린 것에 대해서 제가 답변한 것입니다.)
유교의 수신제가치국평천하는 과연 도(道)인가?
안녕하십니까?
의견을 표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도(道)는 자기 마음을 전체적으로 잘 아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기 마음을 잘 안다고 생각하기가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속에는 기지(旣知)의 의식 부분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미지(未知)의 무의식 부분이 훨씬 더 방대한 범위와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버티고 있기 때문에 무의식 부분까지 알아야 비로소 자기 마음을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도(道)는 이 미지(未知)의 무의식 부분을 이해함으로써 자기 마음을 전체적으로 확실히 알려고 노력합니다.
도(道)에 의하여 자기 마음속에 있는 미지(未知)의 무의식 부분을 이해하고 정화(淨化)하고 나면 무의식이 사라지고 의식만이 남게 됩니다. 그때 인간 본유(本有)의 순수의식과 순수자아가 나타납니다. 그것은 청정(淸淨)하고 광명(光明)하고 조화되고 지혜로운 인격입니다.
그에 의하여 인간-세계-삶의 삼위일체가 내외(內外), 자타(自他), 물심(物心)까지 포함하여 모두 완전히 변화되므로, 종전까지의 가짜의 삼위일체가 이때부터 비로소 진짜의 삼위일체로 환골탈태(換骨奪胎)합니다.
이것은 도(道)만이 일찍부터 깨닫고 지향했을 뿐, 다른 학문 기술 지식 사상 등은 꿈조차 꾸지 못했습니다. 이 때문에 가치적으로 볼 때 도(道)가 천지를 비추는 태양이라면 다른 학문 기술 등은 작은 반딧불에 불과합니다.
도(道)는 이처럼 어디까지나 자기, 마음, 인격의 변화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에 대칭되는 타인, 물질, 외부의 변화를 주안(主眼)으로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유교에서 말하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는 도(道)와 거의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은 타인, 물질, 외부의 변화를 직접적인 목표로 삼는 듯한 감을 주므로 너무 넓고, 막연하고, 불확실하고, 비과학적이고, 비실천적인 개념이어서 도(道)와는 거의 정반대가 됩니다.
물론 그 말은 해석여하에 따라서 도(道)의 정수(精髓)를 표현했다고 억지로 볼 수도 있습니다만, 그렇더라도 공연히 긴 군더더기를 덧붙여서 오해의 소지를 많이 남겼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실제로도 그 말은 도(道)가 주안점으로 삼는 자기, 마음, 인격의 변화에는 관심이 없고, 오히려 그에 반대되는 타인, 물질, 외부세계의 변화에만 주로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자기합리화를 위하여 즐겨 사용했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됩니다.
님께서는 저에게 그냥 자기 마음을 아는 것보다도, 실제로 효도를 하고 실제로 사회에 나아가서 이타적으로 노력할 것을 권하셨는데, 물론 그것도 좋은 길임에 틀림없습니다만, 다만 도(道) 혹은 수행(修行), 수신(修身), 수기(修己), 수심(修心) 수양(修養) 등의 본류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도(道)는 마음속에 있는 무의식이라는 방해물(妨害物)만 없다면 인간-세계-삶의 삼위일체가 본래부터 완전무결하다고 보고, 일편단심으로 오로지 방해물인 무의식의 자각(自覺)에 혼신의 노력을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도(道)는 매우 좁고, 분명하고, 확실하고, 과학적이고 실천적인 개념입니다.
다만 무의식의 자각(自覺)은 소극적으로 혼자서 고독하게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타인 혹은 세상과 더불어 살고 웃고 울고 부대끼면서 공덕(功德)을 쌓아가야만 잘 이루어집니다. 이 때문에 도(道)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지라도 사실은 속으로 타인 혹은 세상을 위해서 공명정대하게 열심히 활동합니다. 하지만 이때에도 그의 주안점은 역시 세상속에서의 활동이 아니라 마음속에서의 깨달음에 있을 것입니다. 세상은 원초부터 암흑천지(暗黑天地)로서 오직 깨달음을 통해서 얻어지는 인격의 맑고 밝고 조화로운 지혜(智慧)에 의해서만 광명천지(光明天地)로 바뀐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동양전통의 도(道)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반성적 성찰에 의하여 자기 마음속의 무의식을 이해 통찰 돌파하려는 목표를 갖지 않고, 그 밖의 다른 어떤 목표 혹은 입장에서 자신이나 세상을 위해 노력한다면 그것은 그것대로의 다른 좋은 길이지, 결코 도(道)는 아닐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도(道)에서는 자기 마음을 홀연히 깨닫는 것을 역시 가장 중히 여깁니다. 그것을 가볍게 여기고 실제로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하는 것을 중히 여긴다면 세상의 암흑을 자기의 암흑으로 해결하려는 꼴이 되어 오히려 혼란만 증가시키기 때문입니다. 일체 모든 광명(光明)과 지혜(智慧)는 오직 마음속에 있습니다. 이것이 도(道)의 만고불변의 철칙(鐵則)입니다.
실제로 자기 마음을 깨닫지 못하고 부모에게 효도를 하려고 가면 부모가 먼저 걱정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효도가 아니라 사실은 불효입니다. 효(孝)의 원전인 효경(孝經)에는 이런 내용이 분명히 담겨 있습니다. 또 자기 마음을 깨닫지 못하고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를 하려고 하면 산천초목(山川草木)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먼저 걱정한다는 각성과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결코 옳은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도로 발달된 현대의 정신분석학, 심리학, 교육학 등의 인간과학 내지 다른 일반학문 쪽에서도 걱정하기는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방대한 범위와 무한한 위력을 가진 무의식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아무리 잘 되더라도 자기상실(自己喪失) 인간소외(人間疎外)를 면하지 못함은 이미 상식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동양은 일찍부터 마음속에 있는 미지(未知)의 무의식을 관통(貫通)해야 할 필요성과 중요성과 가치를 너무도 잘 알았기 때문에, 모든 분야가 예외없이 무의식의 관통(貫通) 즉 깨달음을 유일무이한 최고의 이상 내지 목표로 삼았습니다. 이 때문에 모든 분야가 자연히 도(道)를 표방했고, 그 결과 모든 분야가 도(道)라는 명칭과 개념을 사용해 왔습니다. 예를 들면 정치도 도(예컨대 왕도, 치도 등), 신체의 단련도 도(예컨대 태권도, 무도, 검도 등), 바둑도 도(기도), 예술도 도(서도, 예도)를 자처했습니다. 하지만 비록 이상(理想)은 무의식의 달통(達通) 곧 깨달음에 두었다 할지라도 실제는 다른 요소에 더 치중했기 때문에 이들을 흔히 말하는 도(道)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요컨대 공자(孔子)가 말했던 조문도 석사가의(朝聞道 夕死可矣,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뜻, 도를 얻기 원하는 마음이 간절함을 뜻하는 말, 논어 이인 편에 나옴)에서의 도(道)처럼, 도(道)는 어디까지나 자기, 마음, 인격의 변화를 주안점으로 하며, 그에 반대되는 타인, 물질, 외부의 변화를 주안점으로 하지 않음을 다시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글에 관한 홈페이지는 www.taopsy.net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