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산(厚山) 이도복(李道復)
樂民 장달수
산청군 신안면 신안리 길가에 비석 한기가 서 있으니 ‘후산이선생유허비(厚山李先生遺墟碑)’이다. 유심히 보지 않으면 찾기 힘든 이 비석은 한말 이 지역에서 태어나 강학에 힘썼던 한 선비의 학덕을 기리고 있다. '유허비'가 선인들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에 그들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라고 할 때 '후산'의 자취가 이곳에 남아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곳 단성현 쌍명산 아래 신안동은 후산 선생 이공이 태어나고 강학을 했던 터다. 공의 휘는 도복이요 자는 양래, 본관은 성주다. 집안 대대로 덕업이 서로 이어져 휘 조에 이르러서는 학행이 뛰어나 이조좌랑을 지냈으니 남명선생에게 배웠다. 호는 동곡으로 목계서원에서 향사를 지내며 공의 10대조다.” 비석의 주인공 후산(厚山) 이도복(李道復)은 남명선생의 제자 동곡 이조의 10세손으로 일찍이 남명의 학문을 가학으로 이어온 집안의 선비임을 알 수 있다. 후산의 10대조 동곡은 32세 때 산천재(山天齋)로 남명선생을 찾아가 제자가 되었으며, 남명의 문하에 들어가 '경의(敬義)'를 수양의 근본으로 삼아 부지런히 공부하였으며 같은 문하생들인 덕계 오건, 수우당 최영경, 동강 김우옹, 각재 하항, 조계 유종지 등과 서로 교유하며 학문에 힘썼던 선비다.
후산은 1862년(철종 13년) 5월 28일 월암공(月庵公) 동범(東範)의 아들로 단성현 양명산 아래 신안동에서 태어났다. 6세 때 부친을 따라 신안정사에 가서 당시 지역 선비들에게 인사를 하니, 선비들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질을 칭찬하였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독서를 했는데, 문리가 통하지 않아 부친에게 질책을 들으면 더욱 매진하였다. 1879년, 18세 때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이 남쪽으로 내려와 선유동을 유람하고 돌아가는 길에 월암공을 만나러 와서 후산을 보고 갔다. 21세 때 부친의 명으로 석남으로 가서 연재를 뵙고 배우기를 청하였다. 연재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시정 개혁과 일본에 대한 경계를 건의하여 왕의 동의를 얻었으나 다시 대궐에서 왕에게 상소하려다가 경무사(警務使) 윤철규(尹喆圭)에게 속아 일본 헌병대에 잡혀 고향으로 이송되자 망국의 울분을 참지 못하고 1905년 음독 자결한 선비이며, 충신이다. 후산은 연재에게 '학문을 하는 요점'을 듣고 성현의 학문에 매진했다. 후산이 연재의 학문은 이어받았다는 것은 성리설에 집착하기 보다는 현실 문제를 바르게 인식하고 이를 실천하는 학문에 깊은 뜻을 두었다 할 수 있다. 이는 가학으로 이어온 남명의 학문과 상통하는 부분이 많다 할 수 있다. 실제로 후산은 암울한 시대의 아픔을 몸소 체험하고 이를 타개하려고 많은 노력들을 하게 된다. 이해 가을에 합천 선비 노백헌 정재규가 방문을 해 이름을 '도복'이라고 고쳐 지어 주고 자를 '양래(陽來)'라고 하였으니 그를 아끼는 뜻이 남달랐음을 알 수 있다.
1883년에 신안정사에 모여 과거공부를 했다. 당시 많은 선비들이 신안정사에 모여 논설 산문 등 각종 문장을 익혔는데, 해려 권상적이 재장(齋長)으로 지도를 했다. 가을에 만성 박치복이 방문하여 논설문 등을 보고 말하기를 “이 사람은 문장 짓는 법을 아는 구나"고 하며 칭찬했다. 1885년 에 뇌룡정 강회에 참석했다. 이때 삼가현감 신두선이 후산 허유, 애산 정재규 등과 함께 뇌룡정을 중수하고 강회를 마련했는데, 후산이 참석한 것이다. 884년 조정에서 칙령을 내려 모든 옛 제도를 변화시켰으나 이에 따르지 않고 옛 제도를 그대로 고수 하고자 했다. 이처럼 시대상 황이 점점 어지러워지자 후산은 1887년 26세 때 수월동에 조한재(照寒齋)를 짓고 학문에 정진한다. 이때 후산은 먼저 수월동 계곡가에 '수월대(水月臺)'를 마련하여 매월 초하루 보름에 여러 동료 선비들을 인솔해 공부를 했다. 얼마 후 마을의 노인들이 그 뜻을 가상하게 여겨 수월대 곁에 조그마한 집을 지어 주니 '조한재'라 불렀던 것이다. 애산 정재규가 이름을 붙였다. 수월리에서 공부를 하던 후산은 30세 때 포천으로 가서 면암 최익현을 만나 배우기를 청했다. 후산의 자질을 알아 본 면암은 수신사명(修身俟命) 즉 '몸을 닦고 명을 기다려야 한다'는 뜻의 글자를 써서 보여 주었다. 이어 중암(重菴) 김평묵(金平默)을 방문해 근세 학술의 사정에 대해 논의했다. 1893년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주자가례에 따라 장례를 치렀다. 우산(愚山) 한유(韓愉)를 자양으로 방문해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에 대해 논쟁을 벌이자 우산이 높은 식견에 탄복했다 한다.
1903년 봄에 간재 전우를 만났는데, 간재는 후산을 보고 "내가 듣기로 그대와 한유는 이단의 학설이 거세지는 데도 유독 율곡의 학문을 계승해 지키고 있다 하니 진실로 호걸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며 칭찬을 했다. 우산 한유와 금산 다솔사 등지를 유람하며 근사록을 읽었으며, 이어 노량의 이충무공 사당에 들러 공의 충절을 추모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되자 후산은 동지들과 더불어 비분강개한 마음으로 춘추대의를 밝혀 왜적을 토벌할 뜻을 세웠으나 이루지 못하자 심석(心石) 송병순 (宋秉珣)과 함께 만동묘에 가서 '연재집'을 교감하여 간행하였다. 1911년에는 고향인 신안동에 수운정을 지어 은밀히 민족정기를 불러일으키고 유학 진흥에 진력하니 당시의 거유 면우 곽종석이 내방하고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기기도 했다.
" 산 높고 물 맑은 유서 깊은 이곳에서/ 금서(琴書)로 외로이 망국한(亡國恨) 달래노니/ 속 깊은 선비들이 절의(節義)로 뭉치니/ 그대의 굳은 마음 내 짐작할 수 있네" 1919년에는 서울에 올라가 이완용, 김윤식 등 칠적(七賊)을 토벌하자는 글을 종가에 걸었고 금곡리에 들어가 송나라 때 의사 홍냉산이 휘종에 고한 고사를 들어 '신릉부일편'을 지었다. 그러나 망국의 설움과 비분한 마음은 어쩔 도리가 없었던지 그 뒤 영호남의 유서 깊은 고적을 답사한 뒤에 1925년 봄에 전라도 마이산(馬耳山)으로 들어가 그곳 호남선비들과 교유하며 많은 저술(著述)을 남겼는데 '서어절요(書語節要)'' 중용도(中庸圖)' '이학통변(理學統辨)' '기정동감(紀政宗鑑)' '심현기년(三賢紀年)' 치종록(致宗錄)' '존화록(尊華錄)' 등이 문집에 전한다. 후산의 방대한 저술은 45세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돼 세상을 하직할 때까지 30년간의 지속된 작업의 결과였다. 지금 문집 22권11책에 그 내용이 전한다.
후산은 1938년 윤7월 8일 77세를 일기로 작고하니, 현재 진안군 마령면 평지리 모사실에 있는 영곡사(靈谷祠)에 스승인 연재, 면암과 함께 배향되었다. 후산 사당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선생은 연재와 면암 두 분에게 수업하여 바른 말을 즐겨 하였고 모든 전적에 널리 통하여 모든 선비들이 존경했다. 살아 있을 때는 많은 선비들과 道로써 교유를 했고 산수를 두루 유람하고 고금의 역사를 통하여 한번 글을 지으면 물이 흐르듯 하였다. 제자 500여인을 교육하였다" 후산은 영남에서 태어나 기호학맥인 연재의 학문을 계승한 선비다. 그래서 그의 학문이 지금껏 평가를 제대로 받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신안면 신안리 길가에 있는 '유허비'만이 후산이 산청 사람임을 알려주는 것 같아 안타깝기 그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