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믐(장강명)
장강명 소설가
5년 전에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문학동네)이라는 중편소설을 썼다. 이 소설을 쓰는 데 '그믐'이라는 단어가 큰 역할을 했다. 그 단어가 들어가는 제목으로 소설을 쓰고 싶었다. 나는 '그믐'이라는 말의 기표(記標), 그러니까 그 글자 모양과 발음을 동물적으로 좋아한다. 따로 써서 모양을 보고 있자면 한글이 아니라 우리가 모르는 먼 곳, 먼 시대의 문자 같다는 생각이 든다. '믐'은 좌우 대칭, 상하 대칭인데 '그'는 그런 듯하면서 아니다. 그리고 '믐'이라는 발음은 낯설고 재미있다. 그런 발음이 들어가는 다른 한국어 단어가 있던가? 외국어에는 있나? 나는 '그믐'이라는 말의 기의(記意), 그러니까 그 뜻하는 바에도 속절없이 끌린다. 이 단어에 해당하는 영어 낱말은 없다. '그 달의 끝(the end of the month)'이라는 식으로 풀어 써야 한다. 그믐달도 마찬가지다. 영어로는 '어두운 달(dark moon)', 혹은 '나이 든 달(old moon)'이다. 그믐은 순응하며 사라지는 운명을 상징한다. 그것은 애처롭고 처연하지만 비장하지는 않다. 그것은 슬프고 서럽지만 울분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평화롭고, 사람의 마음을 가라앉힌다. 그것은 우리들, 아니 삼라만상의 유한함을 느끼게 해준다. 우리는 그것을 아쉬워하면서도 거기에 맞서지 못한다. 동시에 그 뒤에 새로운 시작이 있음을 안다.
그믐달은 그믐의 완벽한 구현이다. 나도향은 그믐달을 두고 원부(怨婦)와 같이 애절하다 썼고, 박종화는 요부(妖婦)의 눈썹이라 했다. 나는 소설에 천문학 지식 한 조각을 보탰다. 도시인들은 그믐달을 거의 보지 못한다. 한 달에 이틀 정도, 해 뜨기 직전에 동쪽 하늘에서 잠깐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저녁에 서쪽 하늘에 걸리는 초승달과 다르다. 고백하자면 나는 그믐이라는 단어가 내 이름 '강명'과 초성이 같은 두 글자라는 사실에도 은밀히 매료된다. 다음에 필명을 써야 할 일이 생기면 '장그믐'이라고 적을 것이다.
첫댓글 장그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