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포시(길해연)
배우 길해연
있으면 좋고 없어도 괜찮은 성분이 부사라고 했던가. 그런데 '살포시'라는 말이 없었으면 꽤 섭섭할 뻔했다. 살포시 옷깃을 여며주고, 살포시 어깨를 감싸 안고, 살포시 눈을 감고, 살포시 입을 맞추고, 아침 햇살은 살포시 창을 밝히고, 하얀 눈이 살포시 내려와 장독 위에 쌓이고, 나비는 꽃 위에 살포시 내려앉고, 타오르는 감정을 살포시 누르고, 그대 살포시 내게로 오소서 간구하고, 살포시 그대 품에 안기고 싶다 눈물을 흘리고….
'살포시'라는 말은 마법의 가루처럼 어디다 뿌려 놓아도 뒤따라오는 말들을 빛나게 한다. 고요하고 조심스러워 분명 그 말 뒤에 행동이 뒤따라오는데 전혀 소란스럽지가 않다. 여유롭고 조화로우며 배려심이 많다. 살포시가 앞에 자리를 잡으면 모든 말은 순해지고 착해진다. 느닷없어 사람을 놀라게 하지도 않고 지드럭거릴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안심이 된다. 나긋나긋하면서도 삽삽하여 저절로 사람을 미소 짓게 만드는 것을 보면 태생이 착한 말이다.
소리는 또 얼마나 고운가. 살포시, 살포시…, 소리 내어 읽다보면 휘파람을 부는 것 같다. '살' 할 때 입안에서 굴러 떨어지는 'ㄹ'을 얼른 주워담아, '포' 하며 입을 둥글게 모았다가, 입꼬리를 올리며 '시이~' 하고 소리를 한번 내어보시길. 자신도 모르게 살포시 미소 짓게 될 것이다.
지난 공연 때 누군가 분장실에 작은 꾸러미를 놓고 갔다. 그 곁에 놓인 손 편지에는 "오늘 2회 공연 힘드실까봐 힘내시라고 별것 아니지만 살포시 놓고 갑니다." 긴 설명 없이도 손 편지 주인의 마음이 느껴졌다. 그때 새삼스럽게 ' 살포시'란 말이 내 마음에 새겨진 것이다. 잘 알고 있는 것 같아도 자주 쓰게 되지 않는 말들의 소중함을 깨친 날이다.
배우라는 직업은 끝없이 자신을 드러내고 "날 좀 보라"고 온몸으로 외치고 있어야 한다. 할 수만 있다면 나는 살포시 가슴을 적시는 배우이고 싶다. 유난 떨지 않으면서도 살포시 작품 안으로 스며들어가 내가 맡은 배역으로 살포시 적셔들고 싶다.
첫댓글 '살포시' 사람 감정 위에 내려앉는 표현들 예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