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 사람들과 함께하는 인문학 산책: 1) /2023.09.
자유란 무엇일까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자유’에 대하여
이민숙(시인 샘뿔인문학연구소장)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의 묘비명은 ‘자유’를 타고 흐른다. 그가 생전에 추구했던 인간 삶에서 자유란 무엇일까를 생각하는 과정이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으며 발견하게 된 우리들의 ‘자유’일 수도 있다. 그는 죽었다. 그의 영원한 성지 크레타에 ‘자유를 데리고’ 묻혔다.
“나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이므로 ... ...”
이 말은 그의 묘비명일 뿐 아니라 그가 할아버지의 생에서 받아 올린 생의 비극적 사태들(터키와 크레타 전쟁)을 안고 책임자로서의 용기를 실현하며 끝까지 지향했던 인생행로의 한 축이다. 그러나 결코 용기는 자유의 씨앗은 아니었다. 그의 분신인 ‘조르바’는 전쟁에 대한 지극한 향수(민족과 국가를 떠받드는 자, 즉 전쟁영웅)를 반납하며 자유를 얻는다. 아나키스트, 그의 자유는 그 지점에서 출발하며 완성된다. 우리가 지향하는 인생의 축은 무엇일까.
어떤 인간을 만나 어떤 대화를 주고받고 그 말과 그 말에 속한 한 인생을 긍정한다는 건 참 행복한 일임에 틀림이 없다. 카잔차키스에게 정신적 충격과 깨달음을 주었던 건 니체 괴테 그리고 부처였다. 나에게 있어 알베르 까뮈가 그러했고, 공자와 노자 백범과 전태일과 김남주와 고정희... ... 오월과 광주와 순천과 여수가 그러했다. 오월과 광주와 순천과 여수는 고향의 흙이면서 현재와 과거와 미래를 견인하는 내 영육(靈肉)의 한 축이다. 그러나 나에겐 그 흙의 또 다른 흙이 책이다. 그 안에는 언어인 시가 있고 혁명이 있고 행위가 있다. 삶의 안일함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 고결함이 있다. 내 삶이 구체적인 병마와 싸웠으므로 포기할 수 없는 건 지금껏 내 육체를 살게 한 실시간의 황홀(밥 한 숟가락, 포도 한 송이, 고구마 한 알을 먹는... ...)과 나를 둘러싼 인연에의 연민과 사랑이다.
‘크레타’를 통해 ‘메토이소노’를 보여주려 했던 조르바의 정신처럼 카잔차키스의 지향점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메토이소노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육체와 영혼, 물질과 정신의 임계상태 저 너머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일컫는다. 포도가 포도즙이 되는 것은 물리적인 변화인데 포도즙이 마침내 포도주가 되는 것은 화학적인 변화다. 포도주가 사랑이 되고, 성체(聖體)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메토이소노다. 조르바는 망해버린 사업을 하나의 춤으로 변화시킨 것에 대하여 메토이소노라 이름한다. 거룩하게 만들기! 춤!
우리가 벗어날 수 없는 육체, 즉 현실의 고통이 어떻게 성화되는지 조르바를 따라 가 보기로 한다. 끝끝내 던질 수 없었던 전쟁과 핏줄과 민족과 고향인 크레타. 그러나 닿고자 하면 닿을 수 있는 생의 궁극은 꿈처럼 다가와 그것을 놓아버리는 자유에 이를 수 있거늘... ...조르바는 그의 춤을 위하여 노래를 위하여 연주하며 사랑하는 ‘산투리(크레타인의 악기)’를 자유라 한다. 그건 인간과 한 몸인 짐승임을 인정해야 하는 것, 결국은 인간이라는 자유가 첫 번째다. 모든 사람의 생은 그러므로 ‘자유’를 씨앗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 그러나 그건 가능한가? 부처는 자유롭다. 그에게는 착한 영혼이 있으며 오래 전부터 그의 영혼을 길들여왔기 때문에. 그렇다면 카잔차키스의 영혼은 자유롭다는 건가? 그는 분명 부처를 만났다. 소설 속엔 끝없이 이야기 아닌 진실의 고백처럼 부처를 깃발처럼 흔든다. 흔들리며 독자를 수평선 너머로 빠트린다. 그곳에 빠지는 날은 우리도 조르바처럼 자유를 가질 수 있을까?
소설 속의 화자인 그는 어느 날 로댕의 ‘하느님의 손’이라는 조각상 앞에서 그 손바닥을 보고야 말았다. 그 안에는 무아지경으로 껴안고 몸부림치는 남녀가 있었는데, 그는 말한다. ‘사랑이야말로 이 세상의 가장 값진 기쁨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 청동 손을 보니까 도망쳐 버리고 싶다’ 그는 이미 자유를 택하고 말았던 것. 버렸던 여자는 어떻게 할 것인가? 버린다는 것이 자유라면 사랑도 욕망도 어찌할 것인가? 그 안에 다시 부처가 있다. 모든 걸 버린 후에 부처는 해방인 자유에 이르지 않았던가. 조르바는 그러나 여인이란 여인 모두를 사랑한다. 그의 곁에 존재했던 여인을 버릴 수는 없었다. 인간에게 육체가 있는 한 ‘먹는다는 것’과 ‘사랑한다는 것’은 한없는 삶의 에너지인 것을 우리가 어찌 모른다 하랴. 빵 한 조각과 양파와 올리브 한 웅큼과 붉은 포도주와....춤추는 조르바가 거기에 있다. 영혼과 육체를 완벽하게 일직선상에 놓으려는 카잔차키스!
그는 살아간다. 모든 것을 춤추며, <야망도 없이 세상의 야망은 다 품은 듯이, 사람들에게서 멀리 떠나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되 먹고 마신 다음 잠든 사랑에게서 홀로 떨어져 별은 머리에 이고 뭍을 왼쪽, 바다를 오른쪽에 끼고 해변을 걷는 것, 그러나 문득 기적이 일어나 이 모든 것이 하나로 동화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 ...> 그것이 행복임을 안다. 그러므로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행위가 얼마나 무서운 죄악인가?’ 라고 쓴다. 서둘지 말고 안달을 부리지도 말고, 이 영원한 리듬에 충실하게 따라가며... ...조르바는 ‘자연’이다. 노자의 ‘스스로 그러함’ 그의 자유는 그러한 인생을 씨앗 뿌리는 것일 뿐, 그 삶의 꽃은 어디에 어떻게 피어날 것인가! 그것은 중요하지 않은 듯하다. 이미 존재에게 선택권은 없다는 듯이.
죄 지은 여자를 편드는 건 죄인가 자비인가 자유인가. <인간은 자유다>라고 시작한 소설 속에서 모든 생명은 자유다!라고 선언하는 카잔차키스의 결론은, 아무도 하느님을 불러 그 죄를 물을 수 없다. 인간이니까. 죄지은 인간이니까. 스스로 그 죄를 벗어던질 수 있을 때 인간은 자유다! 삶이란 계절의 어김없는 리듬이요, 무상한 생명의 윤회요, 태양 아래서 차례로 변하는 지구의 네 가지 얼굴, 생자필멸(生者必滅)이 모든 사실의 사실일 뿐이므로. 오직 사람에게 일회적인 것, 즐기려면 바로 이 세상에서 즐길 수밖에 없다는 것! 그는 말한다. 영혼과 바다와 구름과 향기 사이에 무슨 은밀한 관계가 있는 것인가? 영혼이 바다요 구름이요 향기 같은데... ... 그야말로 ‘자연인 사람’의 생이 아닐까 말이다. 영혼 따로 자연 따로 사람 따로가 아니란 말이다. 예수가 뭐라고 했나? 값진 보배를 얻으려면 가진 것을 모두 팔라고 했단다. 값진 보배가 무엇인가, 영혼의 구원이다! 가진 것을 모조리 팔아버린 후에 얻을 수 있는 것.
그러므로 삶이야말로 더는 처박힐 수 없이 아름다운, 그러나 팔아버리고 나서 나비가 되는 역설의 바다다. 크레타의 아름다운 태양 아래 그 민중은 전쟁을 겪으며 눈앞의 모든 것을 파괴하는 인간, 인간끼리 그 인간을 죽이며 온갖 핑계로 날카로운 칼을 만들어 휘젓는다. 그러하고도 지금까지 지구인들이 벌이는 ‘크레타의 살상’은 공간과 시간을 구분하지 않으며 휘돌아가는 광기를 등에 업고 붉은 피를 뿌린다. 지구에서 인간이 사라지지 않는 한, 그 피는 끝없이 흩뿌려질 것이다. 국가와 민족과 핏줄의 안녕과 번영과 영광을 위하여 21세기 제국주의자들은 저 먼 나라의 전쟁을 부추길 것이다. 내가 아니면 행복하기라도 하듯이, 우리 민족이 아니면 우리 국가가 아니면, ‘나’ 아니면 지상의 모든 전쟁놀음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처럼. 그 이기(利己)의 절정 속에 생명은 이미 해방도 자유도 요원하다. 진정 언제까지? 자유여 엿이나 바꿔먹어라! 조르바가 지금 저 햇살 속에서 지구를 바라본다면 뭐라고 말할까.
조르바와 그의 두목(책 속의 화자인 소설가)이 성취하고자 했던 사업의 마지막 날, 그것은 그 어떤 예언처럼 그들을 팽개쳤는데, 그 때를 이렇게 표현한다. <나는 모든 것을 잃었다. 돈, 사람, 고가선, 수레를 모두 잃었다. 우리는 조그만 항구를 만들었지만 수출할 물건이 없었다. 깡그리 날아가 버린 것이었다. 그렇다 내가 뜻밖의 해방감을 맛본 것은 정확하게 모든 것이 끝난 순간이었다. 엄청나게 복잡한 필연의 미궁에 들어 있다가 자유가 구석에서 놀고 있는 걸 발견한 것이었다. 나는 자유의 여신과 함께 놀았다.> 얻고자 하면 잃는다, 잃고 나면 해방된다. 그 때, 자유를 노래하며 춤출 수 있다. 자유가 공허와 함께 온다? 해방은 스스로가 지향했던 그 축의 허물어짐 속으로 찾아온다? 인간에게 주어진 삶의 그 어떤 것을 우리는 붙잡고 살아왔는가? 그 물음 속으로 나의 새벽도 밝았다. <외부적으로는 참패했으면서도 속으로는 정복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 인간은 더할 나위 없는 긍지와 환희를 느끼는 법이다. 외부적인 파멸은 지고(至高)의 행복으로 바뀌는 것이었다.> 전쟁이여 영원히 참패하라! 누가 전승가(戰勝歌)를 부를 수 있겠는가? 그 많은 전쟁의 역사 속에서 인간에게 행복과 존재의 가치를 안겨준 적이 있었던가! 그 안에 자유의 길이 있다고 썼다면 그 모든 행위는, 언어는 거짓이다. 세계는 거짓 속에 잠겨있다. 버리고 버릴 것은 거짓된 욕망일 뿐!
<나는,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은 지식도, 미덕도, 선(善)도, 승리도 아닌, 보다 위대하고 보다 영웅적이며 보다 절망적인 것, 즉 신성한 경외감이라는 것을 뼈져리게 느꼈다... ...> 인간은 엄청나게 큰 나무의 조그만 잎사귀에 붙은 작은 구더기라고 카잔차키스는 말한다. 이 조그만 잎이 지구다! 갉아 먹히는 지구의 그 이파리가 위기의 공기 속에 든 지 오래다. 몸도 마음도 공포로 떨고 있는데... ...그 순간에 시작되는 게 바로 시(詩)라고 말하고 싶었다고 한다. 조르바는 알아듣지 못할 지라도... ... 육체적 인간 조르바와 그의 친구인 두목이 가리킨 영혼의 깃발 시는 우리가 간절히 원한다면 합치될 수 있을까? 질문 속에 질문이 있고 자유가 있다. 자유는 자유라는 씨앗으로 발아되지 않지만, 늘 우리는 자유일 수 있다. 보다 ‘절망적인 신성한 경외감’이라는 역설 속에서. 늘 역설이다 인문학은. 여수야말로 지금 바닷물로 스며드는 핵오염물질에 젖어들고 있는 현재적 물음의 최전방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자유다 자유는 자연이다 나 역시 자유다 자연이므로!/이민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