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나라를 세운
미륵불 이야기
<뱀의 다리>
근래
남북한 화해 및 교류 분위기가 그 속도를 더해가는 가운데
지난시기 한반도 역사속에 그대로 남아있는 그것도
누구도 발 들여 놓지 못한 채 발굴 할 수 없었던
역사적 사실 한 부분이 한 층 우리의
관심을 끌고 있다.
즉
통일신라가 천년의 기간을 끝나면서
후삼국 시대와 고려의 창건과 관련된 태봉의
역사적 과정및 그 의의이다.
후고구려및 태봉이라는 새로운 나라 가운데
궁예가 존재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앞으로
한반도 긴장완화 추세에 발맞추어
남북한 관련 학계를 중심으로 비무장지대내에 있었던
테봉과 그왕조의 주역이었던 궁예에 대한 연구활동이
활발히 일어나길 기대한다.
(강건너 언덕에서 초당 超堂 글 쓰다.)
몰락하는 신라에 맞서
미륵의 나라를 세우다.
궁예(弓裔)는
통일 신라 후기에 후고구려(후에 태봉으로 국호 변경)를
건국한 인물이다.
후고구려는
통일 신라, 그리고 견훤(甄萱)이 세운 후백제와 더불어
후삼국 시대를 열었다.
궁예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삼국유사》《고려사》
등에 남아 있다.
흔히 궁예는
스스로를 미륵불(彌勒佛)이라 칭하는
과대망상에, 포악한 성품으로 학정을 일삼았던
군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는 궁예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연
고려의 관점에서 그려진 것이라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다.
오히려
무능력한 신라 지도층에 반기를 들고
독자적으로 세력을 구축했으며, 고려라는
새 왕조가 탄생할 수 있도록 기반을 다졌다는 점에
의미를 둘 수 있을 것이다.
궁예는 원래 신라 사람으로,
신라 47대 헌안왕(憲安王) 혹은
48대 경문왕(景文王)의 아들로 알려져 있다.
그의 탄생과 관련해서
《삼국사기》〈열전〉에 자세히 전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반란군 두목이 된 신라 왕자
(궁예는)
5월 5일에 외가(外家)에서 출생했다고 한다.
그때
지붕 위에 긴 무지개와 같은
흰빛이 하늘에까지 닿았는데,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 이 아이가 중오일(重午日, 5월 5일)에 태어났고,
나면서부터 이가 있습니다.
또
광염(光焰)이 이상했으니
장래 국가에 이롭지 못할 듯합니다.
기르지 마십시오." 했다.
왕이 중사(中使)에게 명해
그 집에 가서 아이를 죽이게 했다.
사자(使者)가
아이를 강보에서 빼앗아 다락 아래로 던졌는데,
유모가 몰래 받다가 잘못 해 손으로 찔러
한쪽 눈이 멀게 되었다.
《삼국사기》 권 50, 〈열전〉 권 10, 궁예
신라의 왕실로부터 버려진 궁예는
10세가 될 때까지 숨어서 유모의 손에서 자랐다.
그러다
출생의 비밀을 알고 유모 곁을 떠나
세달사(世達寺, 興敎寺)로 들어가 스스로
선종(善宗)이라 이름 짓고 중이 되었다.
성인이 된 궁예는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그 틈에 사람을 모으면
큰 뜻을 이룰 수 있으리라 생각 하였다.
당시 신라는
국정이 문란해지고 대규모의 농민 반란이 일어나는 등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궁예는
891년(진성왕 5)에
기훤(箕萱)이라는 자가 이끄는 농민 반란군에
합류하였다.
그런데
기훤은 오만방자해
궁예를 제대로 대우해 주지 않았다.
이에 불만을 품은 궁예는 기훤의 곁을 떠나
강원도 원주 지방에서 활동하던 또 다른 농민 반란군의
두목인 양길(梁吉)의 밑으로 들어갔다.
양길은
기훤과 달리
궁예를 존중해 따로 군사를 내 주었다.
궁예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895년(진성왕 9),
치악산 석남사(石南寺)를 근거지로 독립해
자신의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안성 삼죽면 가솔리 국사봉 미륵삼존 불
스스로 나라를 세우고
미륵불이 되다.
이렇게 영토를 확장하며 자신감에 차 있던 궁예는
898년(효공왕 2)에 도읍을 송악으로 옮겼다.
송악을 도읍으로 정한 데에는
그 지역의 토호 세력인 왕륭(王隆)과 그의 아들
왕건(王建)의 귀의(歸依)가 영향을 미쳤다.
남다른 지략과 군사를 움직이는 능력을 지닌
이들 부자의 도움을 받고자 했다.
그래서
군사를 내 주고
독자적으로 행동할 수 있게 하였다.
이들 역시 여러 성들을 공략해
궁예의 세력을 넓히는 데 한 몫 했다.
이 때부터 궁예의 세력은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궁예의 세력이 커지자
불안해진 양길이 공격을 해 왔다.
그러나 궁예는 양길의 공격을 사전에 알고 물리쳤다.
이렇게
양길이 거느리고 있던 성들까지
궁예의 지배권에 들어왔다.
궁예가 다스리는 영토는
지금의 강원도와 경기도, 황해도와 충청북도 지방까지
확대되었다.
이에 고무된 궁예는
901년(효공왕 5)에 국호를 후고구려(高句麗)라 정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신라가 고구려를 멸했으니,
내가 고구려를 위해 원수를 갚으리라."라며
국호를 후고구려라고 정한 이유를 밝혔다.
궁예가
고구려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던 것을 생각하면
다소 뜬금없는 이유이다.
이는
옛 고구려의 영토에서
신라에 대한 반감을 가진 사람들의
민심을 얻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이후 궁예는
자신이 세운 나라의 이름을 904년(효공왕 8)에
마진(摩震)으로 고치고, 이듬해 도읍을 철원으로 옮겼다.
이곳에 크고 호화로운 궁궐과 누대를 지어
자신의 세를 과시했다.
이 과정에서
과도한 요역과 세금 징수로 민심이 이반되기도 했다.
911년(효공왕 15)에는
국호를 다시 태봉(泰封)으로 고쳤다.
태봉이라는 국호는 918년(경명왕 2)에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 왕조를 세울 때까지
계속 쓰였다.
신라를 '멸도(滅都)'라고 부르며
반신라 정서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나라를 세울 당시
부석사(浮石寺) 벽에 붙어 있는
신라 왕의 초상을 칼로 내리쳐 훼손했다는
기록만 보더라도 신라에 대한 그의 증오심을
짐작할 수 있다.
신라의 왕족이었음에도
버림받았던 과거의 영향일 것으로 짐작된다.
이후
세력을 키운 궁예는 신라의 영토를 잠식해 나가면서
신라의 멸망을 자신했다.
그 과정에서 투항한 신라인들을 모두 잡아 죽이는
강경한 태도를 취해 인심을 잃기도 했다.
신라의 반대편에 서서 세력을 넓혔지만,
신라 출신들을 제대로 포용하지 못한 것은 실수였다.
태봉의 정권을 오래도록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대 세력도 포용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다.
궁예의 통치 행위 중 특이한 점은
스스로를 미륵불(彌勒佛)이라 칭했던 점이다.
그가 승려 출신이라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당시 신라에서 유행하던 미륵 신앙과 관계가 깊다.
미륵 신앙은
어지러운 세상에 구세주인 미륵불이 나타나
불교적 이상 세계를 만들 것이라는 종교적 믿음을 말한다.
이러한 신앙이 유행한다는 것은
그만큼 현실 세계가 고통스럽다는 것을 의미한다.
삼국통일 이후
전쟁으로 피폐해진 신라 백성들 사이에
미륵 신앙이 유행했다.
특히
통일 신라 후기에는
잦은 왕위 쟁탈전과 지도층의 실정으로
정국이 혼란한 가운데 미륵 신앙이 더욱 큰 힘을 발휘했다.
이러한 종교적 이념을 현실 정치에
접목한 것이다.
이것을 단지 우매한 백성들을 현혹하겠다는
불순한 의도로만 해석할 일은 아니다.
신라의 정치적 폐해를 타파하고
이상적인 국가를 건설해 보겠다는 진보적 정치적
이념이 담겨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고려의 신하들은 궁예의 이러한 정치적 의도를
매도하고 조롱했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내용역시 그렇다.
선종(善宗, 궁예)이 미륵불을 자칭하며 머리에 금색 모자를 쓰고 몸에 방포를 입었으며, 큰아들을 청광보살(靑光菩薩), 막내아들을 신광보살(神光菩薩)이라 했다. 외출할 때에는 항상 백마를 타고 채색 비단으로 말갈기를 장식하고, 동남동녀(童男童女)로 일산과 향화(香花)를 받들게 해 앞에서 인도했으며, 비구(比丘) 200여 명으로 범패(梵唄)를 부르면서 뒤를 따르게 했다. 또 경문(經文) 20여 권을 자술(自述)했는데, 그 말이 요망스럽고 모두 불경한 것이었다. 때로는 정좌하고 강설했는데, 승려 석총(釋聰)이 이르기를 "모두 사설(邪說)·괴담(怪談)으로써 가르칠 수 없는 것이다." 하니, 선종이 듣고 노해 철퇴로 때려죽였다. 《삼국사기》 권 50, 〈열전〉 권 10, 궁예
선종(善宗, 궁예)이
미륵불을 자칭하며 머리에 금색 모자를 쓰고
몸에 방포를 입었으며, 큰아들을 청광보살(靑光菩薩),
막내아들을 신광보살(神光菩薩)이라 했다.
외출할 때에는
항상 백마를 타고 채색 비단으로 말갈기를 장식하고,
동남동녀(童男童女)로 일산과 향화(香花)를 받들게 해
앞에서 인도했으며, 비구(比丘) 200여 명으로
범패(梵唄)를 부르면서 뒤를 따르게 했다.
경문(經文) 20여 권을 자술(自述)했는데,
그 말이 요망스럽고 모두 불경한 것이었다.
때로는 정좌하고 강설했는데,
승려 석총(釋聰)이 이르기를
"모두 사설(邪說)·괴담(怪談)으로써
가르칠 수 없는 것이다." 하니,
선종이 듣고 노해 철퇴로 때려죽였다.
이 밖에도 궁예는
자신이 신통력으로 여인들의 간통 사실을 알 수 있다면서
이를 빌미로 무고한 여인들에게 끔찍한
형벌을 가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의심이 많고 곧잘 성을 내어
주위의 여러 신하와 장수, 지방 관리와 평민까지
죄 없이 죽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궁예의 이러한 횡포는 결국
그의 부하인 왕건에게 역심을 일으키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고려 건국의 바탕을 마련한
궁예의 나라 태봉
그것이 오히려 자신의 발목을 잡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송악 출신의 왕건이
그의 아버지 왕륭과 함께 투항했을 때 궁예는
송악성의 축조를 그에 맡기고 철원 태수에 제수했다.
군사를 주고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의
신라 성들을 공격하게 했다.
왕건은
나가는 전투마다 승리를 거두었고,
궁예의 신임은 더욱 두터워졌다.
궁예의 실정이 이어지자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智謙) 등의
장수들이 모의해 왕건을 새 왕으로 추대하고자 했다.
처음에 왕건은
자신의 부덕함으로
왕을 배신하는 것이 옳은 일이겠냐며 망설이다가
결국 뜻을 받아들였다.
여러 장수들이 왕건을 호위하고 나서며
"왕공이 이미 의기(義旗)를 들었다."라고 외쳤다.
그러자
수많은 자들이 그를 따랐다.
1만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궁성 문 앞에 모여
북을 두드리며 궁예를 끌어내자고 소리쳤다.
놀란 궁예는
"왕공이 차지했으니 내 일은 끝났다."라고 말하고는
미복을 입고 북문으로 나가 도망쳤다.
얼마 가지 못하고 백성들에게 잡혀 살해되었다.
유유히 궁으로 걸어 들어가 왕위에 올라
고려 태조가 되었다.
궁예도, 궁예가 세운 나라 태봉도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918년(경명왕 2)의 일이다.
부언하여
궁예연구가 이재범의 박사논문
" 후삼국시대의 궁예 연구(1991)"에서는
이러한 대목이 있어 소개하고자한다
고려시대의 역사가
승자논리에 기우울져 있어 있으며
그의 몰락의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궁예정권의 역사적의의는 우선
우리역사에서 보기 드물게 사회경제적으로
하층에 의해 세워진 국가로 독자성, 진취성을 띄고
발전해 나갔으나 결국 보수적, 복고적 성향을 지닌
고구려계 호족들에게 몰락한 역사적 사실이다" 라고
그 성격을 규명하고 있다.
부인강씨와 아들들을 죽이는 이유에 대해서도
부인들을 고구려계 호족에서 뽑아쓰다가 결국은
그들 호족에게 당한것이며 가족들의 죽임도 그의 단순한
포악한 성질 때문으로 돌릴 것이 아니라, 호족세력의 갈등이
죽임이라는 데까지 귀결된 것으로 보고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조선조 영조대왕이 그의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과정과 같은 맥락에서
풀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궁예의 몰락과 왕건의 건국을
중국 역사서《자치통감》은 이렇게 기록했다.
대봉(大封, 태봉)의 왕 궁예가 성품이 잔인하므로 해군통수 왕건이 그를 죽이고 자립해 다시 고려왕이라 일컬었다. 개주(開州)를 동경(東京)으로 삼고 평양을 서경(西京)으로 삼았는데, 건은 검약(儉約)하고 관후해 백성들이 편안했다. 《자치통감》 또한
대봉(大封, 태봉)의 왕 궁예가 성품이 잔인하므로
해군통수 왕건이 그를 죽이고 자립해 다시
고려왕이라 일컬었다.
개주(開州)를 동경(東京)으로 삼고
평양을 서경(西京)으로 삼았는데,
건은 검약(儉約)하고 관후해 백성들이 편안했다.
《자치통감》
조선 초기에 저술된 역사서 《고려사》는 태조 왕건이 내린 조서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조선 초기에 저술된 역사서 《고려사》는
태조 왕건이 내린 조서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전 임금(궁예)은
우리나라 정세가 혼란할 때에 일어나서 도적들을 평정하고 점차 영토를 개척했으나, 전국을 통일하기도 전에 대번 혹독한 폭력으로하부 사람을 대하며 간사한 것을 높은 도덕으로 생각하고 위압과 모멸로써 요긴한 술책을 삼았다. 부역이 번거롭고 과세가 과중해 인구는 줄어들고 국토는 황폐했다. 그럼에도 궁전은 굉장히 크게 지어 제도를 위반하고 이에 따르는 고역은 한이 없어서 드디어 백성들의 원망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형편에 함부로 연호를 만들고 왕으로 자칭했으며 처자를 살육하는 등 천지에 용납할 수 없는 죄를 지어 죽은 사람에게나 살아 있는 사람에게 다 원한을 맺었으며 결국은 정권을 전복당했으니 어찌 경계할 바가 아니랴.《고려사》 권 1,〈세가〉 제1, 태조 무인 원 고려와 조선 시대에 저술된 역사서 대부분은 이와 같은 관점에서 서술되었다. 그런 가운데 안정복이 《동사강목》에서 왕건의 고려 건국 과정에 대해서 아쉬움을 표현한 내용이 있어 소개한다.
우리나라 정세가 혼란할 때에 일어나서
도적들을 평정하고 점차 영토를 개척했으나,
전국을 통일하기도 전에 대번 혹독한 폭력으로
하부 사람을 대하며 간사한 것을 높은 도덕으로 생각하고
위압과 모멸로써 요긴한 술책을 삼았다.
부역이 번거롭고 과세가 과중해
인구는 줄어들고 국토는 황폐했다.
그럼에도 궁전은 굉장히 크게 지어 제도를 위반하고
이에 따르는 고역은 한이 없어서 드디어 백성들의
원망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형편에
함부로 연호를 만들고 왕으로 자칭했으며
처자를 살육하는 등 천지에 용납할 수 없는 죄를 지어
죽은 사람에게나 살아 있는 사람에게 다 원한을 맺었으며
결국은 정권을 전복당했으니 어찌 경계할 바가 아니랴.
《고려사》 권 1,
〈세가〉 제1,
태조 무인 원 고려와
조선 시대에 저술된 역사서 대부분은
이와 같은 관점에서 서술되었다.
그런 가운데
안정복이 《동사강목》에서
왕건의 고려 건국 과정에 대해서
아쉬움을 표현한 내용이 있어 소개한다.
고려 태조는 궁예와 처음부터 군신 사이가 아니요, 신라의 백성으로서 어지러운 때를 틈 타 까마귀 떼 처럼 한때 서로 만났다. 적(賊) 궁예가 한창 포악한 짓을 하던 날, 백성이 원망하고 하늘이 노여워함에, 왕건은 세 번이나 금성(錦城)을 진무해 위엄과 덕망이 이미 드러났으니, 마땅히 궁예가 종국을 원수로 여기고 아버지의 화상을 베었으며, 백성에게 해독을 주고 포악을 자행한 죄를 폭로하고 신라 왕실을 도와 추대하고 북을 치며 북진했더라면, 대의(大義)는 밝아지고 왕업도 성취되었을 것이다. 이런 계책은 세우지 않고, 한밤중에 거사해 창황하게 왕위에 올랐던 초라한 거동은 후세에 구실이 되었으니 애석한 일이다.《동사강목》 제5 하
고려 태조는
궁예와 처음부터 군신 사이가 아니요,
신라의 백성으로서 어지러운 때를 틈 타
까마귀 떼 처럼 한때 서로 만났다.
적(賊) 궁예가 한창 포악한 짓을 하던 날,
백성이 원망하고 하늘이 노여워함에, 왕건은
세 번이나 금성(錦城)을 진무해 위엄과 덕망이
이미 드러났으니, 마땅히 궁예가 종국을 원수로 여기고
아버지의 화상을 베었으며, 백성에게 해독을 주고
포악을 자행한 죄를 폭로하고 신라 왕실을 도와 추대하고
북을 치며 북진했더라면, 대의(大義)는 밝아지고
왕업도 성취되었을 것이다.
이런 계책은 세우지 않고,
한밤중에 거사해 창황하게 왕위에 올랐던 초라한 거동은
후세에 구실이 되었으니 애석한 일이다.
《동사강목》 제5 하
궁예의 포악함을 인정하면서도
왕건이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궁예를 몰아낸 부분을 비판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궁예가 없었다면 왕건이 혼자서 나라를 세우기는
힘들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최근 들어
DMZ 부근에 남아 있는 태봉의 유적지인
궁예 도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유구한 역사의 흔적을 간직한 채 남아 있는
궁예 도성 유적을 발굴한다면 보다 많은 역사적 사실을
고증할 수 있을 것이다.
궁예와 그가 세운 나라 태봉은
신라나 고려에 비해 역사가 짧기도 하지만,
승자에 의해 저술된 기록들 때문에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보다 많은 역사적 고증이 이
루어지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