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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단 작가의 중편 소설 '도둑을 잡는 사람들'
연산군 재위 다섯째 해, 한양에는 겨울이 일찍 찾아왔다. 무오년의 사화가 지나간 지 한 해가 되었지만 조정에는 여전히 서로를 경계하는 기운이 감돌았다. 말 한마디가 죄가 되고, 침묵조차 의심을 사던 시절이었다. 도성 밖에는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이 늘었고, 장터의 쌀값은 날마다 달라졌다. 눈이 내린 다음 날 아침, 한성부 관아의 마당에 사내 하나가 끌려왔다. 이름은 장덕수, 나이는 서른여덟이었다. 죄목은 절도였고 훔친 것은 쌀 두 되였다. 곡물상은 사내의 멱살을 움켜쥔 채 엄벌을 요구했다. 서리가 고발인의 말을 받아 적는 동안 군졸 하나가 장덕수의 등을 발로 밀어붙였다. 그때 마당으로 들어서던 윤겸이 걸음을 멈췄다. “그만두어라.” 군졸이 물러서자 윤겸은 사내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쌀을 훔쳤느냐?”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 훔쳤느냐?” “아이가 사흘을 굶었습니다.” “일은 하지 않았느냐?” “일할 곳이 없었습니다.” “빌릴 곳은?” “빌릴 만큼 빌렸습니다.” 윤겸은 사내의 손을 보았다. 손가락 마디가 굵고 손바닥에는 오래된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서리가 다가와 말했다. “나리, 훔친 사실을 인정했으니 담당 관아에서 신문하도록 하겠습니다.” 윤겸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적을 잡는 무관이라고 해서 사람의 죄를 마음대로 정할 수는 없었다. 죄인의 처분은 법과 관아의 절차에 따라 이루어져야 했다. 윤겸은 사내에게 물었다. “남의 것을 훔치는 것이 죄라는 사실은 아느냐?” “압니다.” “그런데도 훔쳤느냐?” 사내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나리, 자식이 굶어 죽는 것을 보고만 있는 것도 죄가 됩니까?” 윤겸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서리에게 명했다. “훔친 쌀의 수량과 고발인의 진술을 분명히 적어라. 이 사람이 처한 사정도 초사에서 빼놓지 마라.” 서리가 머뭇거리자 윤겸이 덧붙였다. “죄를 가볍게 만들라는 말이 아니다. 죄가 생겨난 사정까지 빠짐없이 기록하라는 것이다.” 장덕수가 끌려 나간 뒤에도 윤겸은 한동안 마당에 서 있었다. 눈 위에 떨어진 핏방울 몇 개가 서서히 번지고 있었다. 그는 오래전 아버지가 남긴 말을 떠올렸다. 사람을 다스리는 자리에 앉거든 남의 억울함으로 밥을 먹지 말라는 말이었다. 스물다섯 해 동안 관아의 일을 하면서 그는 그 말을 지키려고 애썼다. 그러나 죄를 지은 사람과 죄를 짓게 만든 세상 가운데 어느 쪽을 먼저 살펴야 하는지, 그 물음에는 아직 답을 얻지 못했다.
홍길동이라는 이름이 윤겸의 귀에 들어온 것은 그해 겨울이 깊어 갈 무렵이었다. 충청도 여러 고을에서 도적의 무리가 관아의 곡식 창고를 습격하고 재물을 빼앗았다는 보고가 조정에 올라왔다. 그 우두머리는 홍길동이라 불렸다. 그는 관아의 곡식을 빼앗아 가난한 백성에게 나누어 준다는 소문으로 이름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도적의 무리가 커지면서 관군과 충돌하는 일이 잦아졌고, 일부 지방 관리들이 그들과 내통한다는 말까지 돌았다. 조정은 더 이상 지방 수령에게만 도적의 체포를 맡겨 둘 수 없다고 판단했다. 윤겸은 병조를 통해 도적 추포의 임무를 받았다. 그의 직책은 포도장이었다. 포도장은 도적을 잡는 일을 맡은 무관으로, 필요에 따라 지방으로 파견되기도 했다. 상관은 윤겸에게 말했다. “충청도에서 홍길동의 무리가 날뛰고 있다. 지방 수령들 가운데 도적과 내통하는 자가 있다는 말까지 들린다. 네가 내려가 그 무리를 추적하라.” 윤겸이 물었다. “도적에게 빼앗겼다는 곡식의 수량과 출처도 확인해야 하겠습니까?” 상관은 잠시 그를 바라봤다. “도적을 잡는 데 필요한 일이라면 확인하라. 그러나 수령의 죄를 네 마음대로 정하지는 마라. 의심스러운 일이 있으면 근거를 갖추어 보고하라.” 윤겸은 고개를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상관은 봉해 둔 문서를 내밀었다. “충청도 관찰사에게 협조하도록 전하겠다. 다만 이번 일은 반드시 성과를 내야 한다. 홍길동을 놓치면 네 자리도 온전하지 못할 것이다.” 윤겸은 문서를 받아 들었다. 문서의 봉함에는 붉은 인장이 찍혀 있었다. 그는 자신이 앞으로 잡아야 할 사람이 단순한 도적이 아니라 조정이 두려워하는 이름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윤겸은 군졸 여섯을 데리고 충청도로 내려갔다. 일행 가운데 가장 젊은 석주는 스물세 살이었다. 황해도에서 올라와 도적을 잡는 군졸이 된 지 두 해가 되지 않았으며 홀어머니와 어린 동생 둘을 부양하고 있었다. 윤겸이 군졸 노릇이 힘들지 않으냐고 묻자 석주는 웃으며 말했다. “힘들어도 품삯을 받을 수 있으니 다행이지요. 어머니께 쌀을 보내 드릴 수 있습니다.” 윤겸은 그가 말안장 아래에 넣어 둔 작은 주머니를 자주 만지는 것을 보았다. 어머니에게 보낼 돈이었다. 윤겸은 그 모습을 보며 젊은 날의 자신을 떠올렸다. 그때 자신도 법을 지키는 사람이 되면 세상이 조금은 나아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법을 지키는 일과 사람을 지키는 일이 언제나 같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배웠다.
충청도에 도착한 윤겸은 먼저 관찰사를 만났다. 관찰사는 도적이 출몰한 고을의 수령들에게 추포에 협조하도록 관문을 내려보냈다. 윤겸은 관찰사 앞에 도난당한 곡식의 수량이 고을마다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고했다. 관찰사는 장부를 받아 들고 한동안 숫자를 살폈다. “이 차이가 무엇을 뜻한다고 보시오?” 윤겸이 대답했다. “도적이 실제로 가져간 곡식과 수령이 보고한 수량이 다를 가능성이 있습니다.” 관찰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그 사실부터 확인해야겠소. 다만 수령의 부정이 드러나더라도 그 죄를 다스리는 일은 별도의 절차를 거쳐야 하오.” 윤겸은 명을 받들었다. 이튿날 고을 관아에서 수령을 만난 그는 도적의 침입 경위와 창고의 출납 기록을 물었다. 수령은 처음에는 협조하는 듯했지만 윤겸이 장부에 기록되지 않은 곡식의 출처를 묻자 얼굴을 굳혔다. “포도장께서는 도적을 잡으러 오셨소, 나를 조사하러 오셨소?” 윤겸은 장부를 덮었다. “도적이 무엇을 훔쳤는지 알아야 잡은 뒤에도 그 죄를 분명히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수령은 대답하지 않았다. 윤겸은 더 다그치지 않고 관찰사에게 보낼 보고에 장부의 차이를 적었다. 호방에게서 들은 말도 함께 기록했다. 수령이 부당하게 거둔 곡식이 있었는지는 아직 확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윤겸은 곡식을 빼앗겼다는 관아의 주장과 곡식을 되찾았다는 백성의 말 사이에 무엇인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느꼈다.
윤겸은 다음 날 마을을 돌아보았다. 초가의 지붕은 군데군데 내려앉았고 담장 사이로 찬바람이 그대로 들어왔다. 사람들은 군졸의 옷을 보면 고개부터 숙였다. 마을 끝에서 만난 노파는 손자가 아프다며 문을 닫으려 했다. 윤겸이 곡식에 관해 묻자 노파는 부엌 구석을 가리켰다. 쌀 한 자루가 놓여 있었다. “저것 때문이라면 가져가십시오.” 노파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윤겸이 물었다. “누가 가져다 놓았습니까?” “새벽에 일어나 보니 문 앞에 있었습니다.” “그 쌀이 관아에서 훔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노파는 한참 동안 윤겸을 바라봤다. “나리, 지난가을 우리 집에서 관아에 바친 곡식이 얼마인지 아십니까?” 윤겸은 대답하지 못했다. 노파가 말을 이었다. “남편이 살아 있을 때부터 빚을 갚았습니다. 갚고 또 갚았는데 장부에는 늘 빚이 남아 있었습니다. 올해는 손자라도 살려야겠기에 종자로 남겨 둔 것까지 내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새벽 쌀이 돌아왔습니다. 그 쌀이 우리 집에서 나간 것인지 다른 집에서 나간 것인지는 모릅니다. 다만 그날 우리 손자가 밥을 먹었습니다.” 윤겸은 쌀자루를 바라봤다. 노파가 다시 말했다. “관아에서 가져갈 때는 나라의 곡식이고 우리 집으로 돌아오니 도둑의 곡식이라 하십니다. 저는 글을 모르니 어느 말이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석주가 물었다. “그렇다고 남의 것을 훔친 사람을 감싸 주셔도 됩니까?” 노파는 석주를 바라봤다. “젊은 나리께서는 굶어 보셨습니까?” 석주는 대답하지 못했다. 노파가 조용히 덧붙였다. “굶어 보면 남의 것인지 내 것인지 따지기 전에 먼저 밥 냄새가 납니다.” 윤겸은 쌀의 출처와 수량을 기록하고 집을 나섰다. 석주가 뒤따라 나오며 물었다. “압수하지 않으십니까?” 윤겸은 걸음을 멈췄다. “저 곡식이 도난당한 것인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함부로 가져갈 수는 없다.” “상부에서 문책하면요?” “확인한 사실대로 보고하겠다.” 석주는 더 묻지 않았다.
활빈당의 흔적은 사흘 뒤 산속에서 발견되었다. 관아에서 빼앗은 곡식을 운반하던 사내 둘이 붙잡혔다. 한 사람은 땅을 잃은 농부였고 다른 한 사람은 관아에서 쫓겨난 창고지기였다. 두 사람은 현지 관아에 넘겨졌고 윤겸은 수령이 허락한 자리에서 신문에 참여했다. 농부는 처음부터 자신이 활빈당에 들어갔다고 인정했다. “처음에는 배가 고파서 들어갔습니다.” “그다음은?” “사람들이 우리를 고맙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계속 도둑질을 했느냐?” 농부는 고개를 숙였다. “나리, 저는 평생 남에게 고맙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일을 해도 품삯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세금을 내도 더 내라는 소리만 들었습니다. 그런데 길동 대장을 따라 곡식을 나누어 주니 사람들이 제 손을 붙잡고 울었습니다.” “지금은 어떠냐?” 농부는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무섭습니다.” “무엇이?” “사람들이 우리를 너무 믿는 것이 무섭습니다. 우리가 잘못해도 잘했다고 할 것 같습니다.” 윤겸은 그 말을 기록하게 했다. 그러나 그가 더욱 주목한 것은 창고지기의 진술이었다. 창고지기는 수령이 환곡을 빼돌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활빈당에 들어간 뒤에도 곡식의 출처를 구분하려 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대장이 어느 날부터는 장부를 보지 않았습니다.” “왜?” “백성들이 우리를 믿는데 무엇이 더 필요하냐고 했습니다.” 윤겸은 붓을 멈췄다. “홍길동이 그렇게 말했느냐?” 창고지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억울하게 빼앗긴 곡식만 되찾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모이고 힘이 커지자 우리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적으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윤겸은 창고지기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홍길동은 이미 처음의 뜻에서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그 무렵 홍길동은 산속의 은신처에서 부하들과 다투고 있었다. 활빈당에 들어온 사람은 어느새 백 명을 넘어섰다. 처음에는 굶주린 농부와 관아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이제는 관군에게 쫓기는 도적과 싸움을 즐기는 무리까지 섞여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거칠고 성급한 사람은 만복이라는 사내였다. 본래 장터에서 짐을 나르던 만복은 관아의 군졸에게 아버지를 잃었다고 했다. 그 뒤로 그는 관군의 옷을 입은 사람이라면 누구든 적으로 여겼다. 만복은 홍길동이 관아의 창고를 털 때마다 앞장섰고, 백성들이 길동을 향해 절을 하면 누구보다 크게 웃었다. 그러나 홍길동이 곡식의 출처를 확인하고 무고한 사람을 해치지 말라고 명령할 때면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 “대장, 장부를 따지고 사람을 가려 가며 싸울 것이면 우리가 무엇 때문에 산에 들어왔습니까?” 홍길동은 그를 바라봤다. “우리가 훔치는 것은 백성에게서 부당하게 빼앗은 것이다.” 만복이 비웃었다. “관아의 창고에 있는 것은 모두 백성에게서 빼앗은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그렇다면 대장께서는 이제 수령의 편을 드시는 겁니까?” 홍길동의 얼굴이 굳었다. “말을 삼가라.” 만복은 물러서지 않았다. “대장께서는 처음에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관군에게 잡히느니 싸우다 죽으라고요. 그런데 이제 와서 관군을 다치게 하지 말라 하시면 우리는 어떻게 싸웁니까?” 홍길동은 대답하지 못했다. 만복은 부하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가 대장을 따른 것은 대장께서 누구보다 용감하고 두려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관군보다 대장 눈치를 더 보게 됩니다.” 홍길동은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만복의 목을 베라고 명령하면 누구도 말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손을 놓았다. “내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네가 두려운 것이다.” 만복의 얼굴이 붉어졌다. “무엇이 두렵다는 말씀입니까?” “네가 사람을 죽이는 일을 너무 쉽게 말하는 것이 두렵다.” 만복은 이를 악물었다. “사람을 죽여야 세상이 바뀐다면 죽여야지요.” 홍길동은 낮게 말했다. “그 말은 내가 가장 미워하던 자들이 하던 말이다.” 만복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 밤부터 그는 홍길동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며칠 뒤 관군이 산속으로 들어왔다. 새벽부터 눈발이 흩날렸고 좁은 고갯길에는 얼음이 남아 있었다. 윤겸은 군졸들에게 함부로 앞서가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고개 중턱에 이르렀을 때 어디선가 화살이 날아왔다. 앞서 가던 군졸 하나가 어깨를 움켜쥐고 쓰러졌다. 뒤이어 산비탈에서 돌이 굴러 내려왔고 관군은 순식간에 흩어졌다. 윤겸은 칼을 뽑으며 소리쳤다. “엎드려라! 함부로 쫓지 마라!” 그러나 젊은 군졸 둘이 이미 산비탈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석주였다. 윤겸이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바람과 고함 속에 목소리가 묻혔다. 잠시 뒤 짧은 비명이 들렸다. 윤겸은 산비탈을 기어올랐다. 석주는 소나무 아래 쓰러져 있었다. 허벅지에 화살이 박혀 있었고 바지에는 피가 흥건하게 번져 있었다. 윤겸이 화살 주변의 상처를 살피자 석주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말하지 마라.” “도적을 놓쳤습니다.” “지금 그런 것이 중요하냐?” 석주는 고통 속에서도 희미하게 웃었다. “나리께서도 그런 말씀을 하시는군요.” 윤겸은 겉옷을 찢어 상처 주변을 감쌌다. 석주가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나리.” “왜 그러느냐.” “저 사람들도 가난한 백성을 돕는다고 했지요?” 윤겸은 대답하지 않았다. 석주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저는 왜 죽을 뻔했습니까?” 윤겸의 손이 멈췄다. 석주는 눈을 감았다가 힘겹게 떴다. “저도 가난합니다. 어머니도 계시고 어린 동생들도 있습니다. 제가 죽으면 그 사람들은 누가 먹여 살립니까?” 윤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석주의 눈가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저는 도적을 잡으러 왔습니다. 나라에서 시키는 일을 하러 왔습니다. 그런데 저 사람들이 백성을 위한다면 저 같은 사람은 백성이 아닙니까?” 윤겸은 석주의 손을 꼭 잡았다. 그는 석주를 등에 업고 산 아래로 내려왔다. 젊은 군졸의 피가 그의 등에 스며들었다. 윤겸은 몇 번이나 발을 헛디뎠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날 밤 홍길동은 화살을 쏜 사람이 만복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만복은 자신이 관군을 막았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대장, 제가 아니었다면 놈들이 우리 뒤를 따라왔을 것입니다.” 홍길동은 사내를 바라봤다. “화살을 맞은 자가 누구인지 아느냐?” “관군이지요.” “이름을 묻는 것이다.” 만복은 대답하지 못했다. 홍길동은 다시 물었다. “나이는?” “모릅니다.” “집은 어디냐?” “모릅니다.” 홍길동은 한동안 사내를 바라보다가 낮게 말했다. “너는 이름도 모르는 사람을 죽일 뻔했구나.” 만복은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대장께서 관군을 막으라 하셨습니다.” 홍길동의 얼굴이 굳었다. “그래서 사람을 죽여도 된다고 했느냐?” 만복이 고개를 들었다. “대장께서도 관군이 우리를 잡으면 죽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홍길동은 입을 다물었다. 만복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는 여러 차례 부하들에게 관군에게 잡히느니 싸우다 죽으라고 말했다. 필요하다면 먼저 공격하라고도 했다. 그 말이 이제 피를 흘리는 사람의 몸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홍길동은 만복을 벌하려다가 멈췄다. 그러나 만복은 그 침묵을 나약함으로 받아들였다. “대장께서 저를 벌하시려면 벌하십시오. 하지만 저는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대장께서 시키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홍길동은 한참 동안 만복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오늘부터 너는 내 명령 없이 활을 들지 마라.” 만복은 이를 악물었다. “그 명령은 따를 수 없습니다.” 부하들이 술렁였다. 홍길동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말해 보아라.” 만복은 물러서지 않았다. “대장께서 겁을 먹으셨다면 제가 대신 싸우겠습니다.” 홍길동은 칼을 뽑았다. 만복도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홍길동은 만복의 목을 향해 칼을 겨누었다. 조금만 힘을 주면 사내의 목숨은 끝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칼을 거두었다. “나가라.” 만복은 비웃었다. “대장께서 저를 죽이지 못하시는군요.” 홍길동은 대답하지 않았다. 만복은 부하 몇 사람을 데리고 산 아래로 내려갔다. 그들이 떠난 뒤 홍길동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자신이 만든 무리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명령을 거부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더 두려운 것은 만복의 말이 자신의 과거와 너무 닮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며칠 뒤 윤겸에게 편지 한 통이 도착했다. 봉투에는 그의 이름만 적혀 있었다. 안에는 짧은 글이 들어 있었다. 사람을 잡으러 다니면서 사람을 보지 못하는 자가 많다 들었으나 그대는 다르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자신을 만나고 싶다면 다음 날 밤 산속의 폐사로 혼자 오라는 내용이었다. 끝에는 홍길동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윤겸은 편지를 여러 번 읽었다. 함정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가기로 했다. 석주가 만류했다. “위험합니다.” “알고 있다.” “저들이 나리를 해칠 수도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 석주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홍길동을 만나면 꼭 물어봐 주십시오.” “무엇을?” “왜 우리 같은 사람까지 다치게 하는지요.” 윤겸은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묻겠다.” 석주는 다시 말했다. “그리고 나리, 그 사람을 잡을 수 있다면 잡으십시오. 저는 그가 나쁜 사람이라서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누구든 사람을 다치게 했으면 그 일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윤겸은 석주의 얼굴을 오래 바라봤다.
폐사는 산속 깊숙한 곳에 있었다. 오래전에 불이 난 듯 법당의 한쪽 벽이 무너져 있었고 마당에는 잡초가 무성했다. 윤겸이 도착했을 때 달은 구름 뒤에 숨어 있었다. 그는 무너진 석탑 앞에 서서 주변을 살폈다. 한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둠 속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혼자 오셨군.” 윤겸이 돌아봤다. 검은 옷을 입은 사내가 법당 기둥에 기대어 서 있었다. 나이는 서른 남짓으로 보였고 얼굴에는 특별히 눈에 띄는 특징이 없었다. 윤겸은 오히려 그 평범함에 놀랐다. 소문 속의 홍길동은 하늘을 날고 모습을 바꾸며 관군을 농락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눈앞의 사내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보통 사람이었다. 윤겸이 물었다. “네가 홍길동이냐?” 사내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렇게 부르는 사람들이 있소.” “관아의 곡식을 훔친 것도 너냐?” “그렇소.” “가난한 백성에게 나누어 준 것도?” “그렇소.” 윤겸은 한 걸음 다가갔다. “그렇다면 내 부하를 다치게 한 것도 네 책임이겠구나.” 홍길동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관군이 먼저 우리를 잡으러 왔소.” “그래서 화살을 쏘았느냐?” “잡히면 우리 모두 죽을 것이오. 그대도 그것을 알지 않소?” 윤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 아이는 너희를 죽이러 간 것이 아니다. 나라에서 맡긴 일을 하러 갔다. 그 아이에게는 홀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이 있다. 네가 백성을 위한다면 그 아이는 백성이 아니더냐?” 홍길동은 눈을 가늘게 떴다. “관군의 옷을 입는 순간 그는 우리를 잡는 사람이오.” “그 옷을 벗으면 다시 백성이 되는 것이냐?” 윤겸이 되묻자 홍길동의 표정이 굳었다. “나리께서는 법을 말하지만 그 법이 우리에게 무엇을 해 주었소?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게 하고, 굶주린 백성에게서 마지막 곡식까지 빼앗는 것이 그대들이 지키는 법이오.” 윤겸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렇다고 네가 사람을 다치게 할 권리까지 얻는 것은 아니다.” 홍길동이 비웃었다. “권리라니. 우리는 살아남으려고 싸우는 것이오.” “살아남으려고 싸우는 사람은 너희만이 아니다.” 윤겸은 석주의 얼굴을 떠올렸다. “내 부하도 살아남으려고 군졸이 되었다. 그 아이는 네가 훔친 곡식을 먹어 본 적도 없고 네가 미워하는 수령에게서 재물을 받은 적도 없다. 그런데 왜 그 아이가 네 분노의 대가를 치러야 하느냐?” 홍길동은 대답하지 않았다. 윤겸은 한 걸음 더 다가갔다. “너는 백성을 구한다면서 백성을 둘로 나누고 있다. 너를 따르는 백성과 너를 막는 백성으로.” 홍길동의 얼굴에 분노가 스쳤다. “말을 조심하시오.” “틀린 말이냐?” 홍길동은 허리에 찬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그대가 관군을 데리고 오지 않았다면 그 군졸도 다치지 않았을 것이오.” 윤겸은 한동안 그를 바라봤다. “그렇다면 네가 도적질을 하지 않았다면 그 아이가 산에 오를 일도 없었겠지.” 두 사람 사이에 날카로운 침묵이 흘렀다.
홍길동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평생 남의 명령을 듣고 살아왔소. 서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사람 대접을 받지 못했고, 글을 읽어도 벼슬길에 나설 수 없었소. 집을 떠나 산속으로 들어갔을 때 처음으로 나를 따르는 사람들이 생겼소. 그들은 나를 대장이라 불렀고 내 말을 믿었소. 나는 그 믿음을 저버릴 수 없었소.” 윤겸이 물었다. “그래서 네 말이 곧 법이 되었느냐?” 홍길동의 눈빛이 흔들렸다. “무슨 뜻이오?” “네가 옳다고 하면 옳고 네가 죄인이라고 하면 죄인이 되는 세상을 만들고 있지 않느냐. 네가 그토록 미워하던 수령과 무엇이 다르냐?” 홍길동은 얼굴을 붉혔다. “나는 백성의 것을 빼앗지 않소.” “네가 빼앗은 재물이 모두 백성에게서 부당하게 거둔 것인지 확인했느냐?” “탐관오리의 창고에 있던 것이오.” “그 창고에는 환곡도 있고 사재도 있었다. 백성에게 돌려주어야 할 곡식과 다른 사람의 재물이 함께 있었다. 네 부하가 장부를 살펴보자고 했을 때 너는 무엇이라 했느냐?” 홍길동의 얼굴이 굳었다. 윤겸은 그가 창고지기의 진술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사람들이 우리를 믿는데 무엇이 더 필요하냐고 했다지.” 홍길동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낮게 말했다. “그자는 배신자요.” “배신자가 아니라 네가 듣기 싫은 말을 한 사람일 수도 있다.” 홍길동은 칼을 반쯤 뽑았다. “그대가 나를 가르치러 왔소?” 윤겸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다. 너를 잡으러 왔다.” 홍길동은 차갑게 웃었다. “그렇다면 잡아 보시오.” 윤겸은 칼을 뽑았다. 두 사람의 칼날이 달빛을 받아 희미하게 빛났다. 홍길동이 먼저 움직였다. 칼끝이 윤겸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윤겸은 몸을 틀어 공격을 피한 뒤 홍길동의 손목을 노렸다.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폐사에 울렸다. 두 사람은 몇 차례 칼을 주고받았다. 윤겸은 홍길동의 솜씨가 소문만큼 뛰어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홍길동 역시 윤겸이 쉽게 물러설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마침내 윤겸의 칼끝이 홍길동의 목 가까이에 닿았다. 동시에 홍길동의 칼도 윤겸의 옆구리를 겨누고 있었다. 누구 하나 움직이면 다른 하나가 피를 흘릴 수밖에 없는 거리였다.
그때 법당 뒤편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윤겸이 고개를 돌리자 홍길동이 낮게 말했다. “움직이지 마시오.” 그러나 울음소리는 점점 커졌다. 윤겸은 칼을 거두지 않은 채 물었다. “누가 있느냐?” 홍길동은 대답하지 않았다. 윤겸이 다시 물었다. “아이냐?” 홍길동의 눈빛이 흔들렸다. “굶주린 사람들이오.” 윤겸은 그제야 법당 뒤편에 여러 사람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활빈당을 따라 산으로 들어온 가족들이었다. 관아의 추적을 피해 도망치던 사람들이 홍길동의 은신처에 모여 있었다. 그때 산 아래에서 횃불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관아에서 보낸 군졸들이 폐사로 올라오고 있었다. 윤겸은 자신이 미행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수령은 처음부터 그를 믿지 않았다. 윤겸이 홍길동을 만나러 간다는 사실을 알아낸 수령이 군졸을 보낸 것이었다. 홍길동이 이를 악물었다. “그대가 군졸을 데려왔소?” 윤겸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혼자 왔다.” “믿으라는 말이오?”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저들이 올라오면 이곳에서 싸움이 벌어질 것이다.” 홍길동은 법당 뒤편을 돌아봤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다시 들렸다. 윤겸은 칼을 내렸다. “사람들을 먼저 내보내라.” 홍길동이 그를 노려봤다. “나를 속이려는 것이오?” “네가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저 아이들은 싸움에 휘말려서는 안 된다.” 홍길동은 잠시 망설였다. 그때 산 아래에서 고함이 들렸다. “도적들을 포위하라!” 횃불이 빠르게 가까워졌다. 홍길동은 이를 악물고 법당 뒤편으로 달려갔다. 윤겸은 칼을 거둔 뒤 마당으로 나섰다. 군졸들이 폐사 입구에 도착했을 때 그는 두 팔을 벌려 길을 막았다. “멈추어라!” 앞장선 군관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포도장 나리, 어찌 여기 계십니까?” 윤겸은 군졸들의 얼굴을 살폈다. 그들 가운데는 자신과 함께 내려온 군졸도 있었다. “안에 아이들과 부녀자들이 있다. 함부로 들이닥치지 마라.” 군관이 소리쳤다. “수령 나리의 명입니다. 홍길동이 안에 있다면 반드시 잡아야 합니다.” 윤겸은 물러서지 않았다. “사람들이 빠져나갈 길부터 확보하라.” 군관은 칼을 뽑았다. “방해하시면 함께 문책받으실 것입니다.” 윤겸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문책은 내가 받겠다. 그러나 아이들까지 죽게 할 수는 없다.” 그때 법당 뒤편에서 사람들이 뛰어나오기 시작했다. 어린아이를 업은 여인과 늙은 사내들이었다. 군졸들은 그들을 향해 창을 겨누었다. 윤겸이 소리쳤다. “무기를 거두어라! 저들은 싸우는 자들이 아니다!” 군관이 망설이는 사이 홍길동이 법당 지붕 위로 올라섰다. 그는 윤겸을 내려다봤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홍길동은 잠시 멈춰 서 있었다. 윤겸은 그를 잡으라고 명령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 아이를 업은 여인이 넘어졌고 뒤따르던 군졸 하나가 창을 들어 올렸다. 윤겸은 달려가 여인을 일으켜 세웠다. 그 사이 홍길동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윤겸은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자신이 도적을 놓쳤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품에 안긴 아이가 울음을 멈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아이를 여인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어서 내려가시오.” 여인은 연신 고개를 숙였다. 윤겸은 대답하지 않았다. 손등에 묻은 흙과 피를 내려다봤다. 그 피가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홍길동은 산을 내려가면서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다. 윤겸이 군졸들 앞을 막아서던 모습이 눈앞에서 떠나지 않았다. 자신을 잡으러 온 관리가 자신 때문에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구하고 있었다. 홍길동은 그 사실이 불편했다. 그는 평생 관리를 적으로 생각했다. 관리들은 법을 앞세워 백성을 억압했고 자신은 그 법에 맞서 백성을 구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윤겸은 법을 지키는 사람이면서도 백성을 먼저 살리려 했다. 홍길동은 처음으로 자신이 세상을 너무 쉽게 둘로 나누고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을 오래 붙잡고 있을 수는 없었다. 산 아래에서 활빈당의 부하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 사람이 물었다. “대장, 관군을 따돌렸습니까?” 홍길동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관리가 우리를 놓아주었습니다.” 부하들이 환호했다. “역시 대장께서는 하늘이 돕는 분입니다.” 홍길동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상한 분노가 치밀었다.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부하들은 모든 일을 자신의 공으로 돌리고 있었다. 그는 환호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낮게 말했다. “오늘 우리를 살린 것은 내가 아니다.” 부하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홍길동은 더 말하지 않았다. 그날 밤 그는 부하들을 모아 놓고 명령했다. “앞으로 곡식을 가져올 때는 반드시 장부를 확인하라. 억울하게 빼앗긴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라. 관군을 만났다고 먼저 화살을 쏘지 마라.” 부하 하나가 불만스럽게 말했다. “대장, 그렇게 하다가는 우리가 먼저 죽습니다.” 홍길동은 그를 바라봤다. “그럴 수도 있다.” “그렇다면 왜 싸웁니까?” 홍길동은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낮게 말했다. “우리가 미워하던 자들과 같아지지 않으려고 싸우는 것이다.” 부하들은 서로 얼굴을 바라봤다.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두가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그날 밤 만복은 활빈당의 다른 무리를 이끌고 산 아래로 내려갔다. 그는 홍길동이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했다. 대장이 사람을 가려 가며 싸우는 동안 백성들은 계속 굶주릴 것이고 관군은 더욱 기세를 올릴 것이라고 믿었다. 만복은 인근 고을의 창고를 습격했다. 그러나 그곳에는 관곡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모아 둔 종자와 상인들이 맡긴 곡식도 있었다. 만복은 이를 구분하지 않았다. 곡식을 실어 나르는 과정에서 이를 막던 늙은 창고지기가 칼에 찔려 죽었다. 소문은 곧 산속으로 퍼졌다. 사람들은 활빈당이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고도 했고, 활빈당이 백성의 곡식을 빼앗고 사람까지 죽였다고도 했다. 홍길동은 그 소식을 듣고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만복을 찾아 죽여야 한다고 말하는 부하들이 있었지만 그는 칼을 뽑지 않았다. 대신 창고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들을 불러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 그 가운데 한 소년이 있었다. 소년은 죽은 창고지기의 손자였다. 홍길동이 무엇을 보았느냐고 묻자 소년은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할아버지는 그 곡식이 우리 마을 사람들이 봄에 뿌릴 씨앗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도적들이 가져가려고 했습니다. 할아버지가 막으니 칼로 찔렀습니다.” 홍길동은 소년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 도적이 누구인지 아느냐?”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활빈당이라고 했습니다.” 홍길동은 더 묻지 못했다. 소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대장님도 활빈당입니까?” 홍길동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럼 우리 할아버지를 죽인 사람도 대장님 사람입니까?” 홍길동은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낮게 말했다. “그렇다.” 소년은 홍길동을 바라보다가 울음을 터뜨렸다. 홍길동은 소년을 달래지 못했다. 그날 밤 그는 만복을 잡아 오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만복은 이미 다른 산으로 달아난 뒤였다. 홍길동은 자신이 처음 활빈당을 만들던 날을 떠올렸다. 굶주린 사람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며 누구도 억울하게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날이었다. 이제는 자신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이는 자들이 생겨났다. 홍길동은 칼을 내려놓고 오래도록 불 꺼진 마당에 앉아 있었다.
윤겸이 한양으로 돌아왔을 때 조정에는 이미 홍길동을 놓쳤다는 보고가 올라가 있었다. 지방 관아에서 보낸 문서에는 윤겸이 도적을 눈앞에 두고도 체포하지 않았으며 군졸들의 진입을 막았다고 적혀 있었다. 윤겸은 자신이 본 사실을 빠짐없이 적어 경위를 보고했다. 폐사에는 어린아이와 부녀자들이 있었고, 군졸들이 무기를 들고 진입하면 무고한 사람들이 다칠 위험이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가 받은 임무는 홍길동을 체포하는 일이었다. 상관은 윤겸을 불러 물었다. “네가 도적을 놓아준 것이 사실이냐?” 윤겸은 고개를 숙였다. “잡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사람들이 죽을 수 있었습니다.” 상관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낮게 말했다. “네가 살렸다는 사람들 가운데 도적이 다시 나타나면 그때는 누가 책임질 것이냐?” 윤겸은 대답하지 못했다. 상관은 그가 올린 보고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네 말이 모두 사실이라 해도 임무를 이루지 못한 책임은 남는다.” 윤겸은 고개를 숙였다. 이후 그의 추포 실패와 현지 군졸의 진입을 막은 경위가 문제 되어 조정의 문책을 받았다. 그는 끝내 관직에서 물러났다. 관복을 벗던 날, 윤겸은 충청도에서 가져온 장부의 필사본을 다시 펼쳤다. 수령이 부당하게 거두었다는 곡식의 수량과 호방의 진술이 적혀 있었다. 그는 그 기록을 마지막 보고에 덧붙였다. 누가 읽을지 알 수 없었지만 기록을 없애지는 않았다.
집으로 돌아온 윤겸은 오래된 관복을 벗어 벽에 걸었다. 아내는 아무 말 없이 저녁상을 차렸다. 밥상에는 보리밥과 된장국이 놓여 있었다. 윤겸은 숟가락을 들지 못했다. 아내가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었소.” 아내의 손이 멈췄다. “어째서요?” “도적을 잡지 못했소.” “그것뿐입니까?” 윤겸은 아내를 바라봤다. 아내는 오래전부터 남편이 세상과 타협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젊은 날에는 그것이 자랑스러웠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두려움이 되기도 했다. 집안에는 늙은 어머니가 있었고 아직 혼인하지 않은 딸도 있었다. 관직을 잃는다는 것은 단지 체면을 잃는 일이 아니었다. 가족의 생활이 흔들리는 일이었다. 윤겸은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오.” 아내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조용히 물었다. “그 도적은 나쁜 사람입니까?” 윤겸은 대답하지 못했다. 아내가 다시 물었다. “좋은 사람입니까?” 윤겸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소.” 아내는 남편을 바라봤다. “그렇게 오래 사람을 잡으러 다니신 분이 사람 하나를 모르시겠습니까?” 윤겸은 밥상 위에 놓인 숟가락을 내려다봤다. “그 사람을 잡아야 한다는 것은 아오. 그런데 그 사람이 왜 도적이 되었는지 알고 나니 잡는 일만으로 끝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소.” 아내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윤겸은 창밖을 바라봤다. 마당에는 겨울 달빛이 내려앉아 있었다. “모르겠소.” 아내는 한참 동안 남편을 바라보다가 숟가락을 들었다. 그러나 밥을 먹지는 않았다. “당신은 굶주린 백성을 위해 도적을 놓아주었다고 하셨지요.” 윤겸은 고개를 들었다. “그렇소.” “그런데 이제 우리 아이들이 굶게 되면 누구를 찾아가야 합니까?” 윤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내의 목소리가 떨렸다. “우리에게도 홍길동이 필요한 것입니까?” 윤겸은 고개를 숙였다. 아내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 안에는 숟가락이 그릇에 닿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봄이 오기 전 집안의 살림은 눈에 띄게 기울었다. 아내는 장롱 깊숙이 넣어 두었던 비단옷을 꺼내 팔았고 딸은 혼인을 앞두고 마련해 둔 물건 몇 가지를 내놓았다. 윤겸은 그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딸이 비단 보자기를 접고 있을 때 그가 물었다. “그것을 왜 꺼냈느냐?” 딸은 웃으며 말했다. “이제 입을 일이 없을 것 같아서요.” 윤겸은 딸의 얼굴을 바라봤다. 혼담이 오가던 집안에서 소식이 끊긴 지 오래였다. 딸은 아무렇지 않은 듯 보자기를 묶었지만 손끝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윤겸은 그 모습을 보며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날 저녁 그는 아내에게 말했다. “내가 잘못했는지도 모르겠소.” 아내는 바느질하던 손을 멈췄다. “무엇을 말입니까?” “홍길동을 놓친 일 말이오.” 아내는 한참 동안 남편을 바라봤다. “당신이 잘못했다고 말하면 우리 살림이 다시 좋아집니까?” 윤겸은 대답하지 못했다. 아내가 조용히 말했다. “나는 당신이 옳은 일을 했는지 그른 일을 했는지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당신이 옳다고 믿는 일을 할 때 우리에게도 그 대가를 치를 준비가 되어 있는지 한 번쯤 물어봐 주었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윤겸은 고개를 숙였다. 아내는 다시 바느질을 시작했다. 바늘이 천을 뚫고 지나갈 때마다 작은 소리가 났다. 윤겸은 그 소리를 들으며 오래도록 움직이지 않았다.
며칠 뒤 석주가 찾아왔다. 상처는 많이 나았지만 걸음은 여전히 불편했다. 그는 윤겸에게 깊이 절을 올렸다. “나리께서 물러나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윤겸은 자리를 권했다. “상처는 어떠냐?” “살 만합니다.” “어머니는?” “걱정이 많으십니다.” 석주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품에서 작은 보자기 하나를 꺼냈다. 안에는 엽전 몇 닢과 말린 약초가 들어 있었다. “이것을 전해 드리려고 왔습니다.” 윤겸이 물었다. “누가 보냈느냐?” “모르겠습니다. 어젯밤 저희 집 문 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보자기 안에는 종이 한 장이 들어 있었다. 다친 사람에게는 먼저 치료가 필요하다는 짧은 글과 활빈당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윤겸은 종이를 오래 바라봤다. 석주가 말했다. “홍길동이 보낸 것 같습니다.” “그럴 것이다.” “저는 받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왜?” “저를 다치게 한 사람들이 준 돈 아닙니까.” 윤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석주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그러셨습니다. 잘못한 사람이 미안하다고 내놓은 돈이라면 받는 것도 괜찮지 않겠느냐고요.” 윤겸은 종이를 내려놓았다. “어머니 말씀이 옳을 수도 있겠구나.” 석주는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나리, 홍길동은 의적입니까?” 윤겸은 그를 바라봤다. 젊은 군졸의 얼굴에는 여전히 상처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사람들은 그렇게 부르지.” “나리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윤겸은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한참 뒤 말했다. “그가 한 좋은 일과 잘못한 일을 따로 보아야겠지.” 석주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완전히 이해한 표정은 아니었다. 석주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도둑은 누가 잡습니까?” 윤겸은 창밖을 바라봤다. 한참 뒤 말했다. “도둑을 잡는 사람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다만 도둑만 잡는 것으로 세상이 좋아진다고 믿어서는 안 되겠지.” 석주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윤겸은 그해 봄 고향으로 내려갔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그가 조사했던 환곡 장부와 수령의 부정에 관한 기록은 별도로 정리해 조정에 올렸다. 받아들여질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기록이라도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향에 도착한 그는 작은 서당을 열었다. 글을 배우지 못한 아이들에게 천자문을 가르쳤고 때로는 부모들이 가져온 억울한 사연을 대신 글로 적어 주었다. 관아에 올릴 소지를 써 주는 일도 있었다. 어느 날 한 농부가 찾아와 수령에게 억울하게 빼앗긴 땅을 되찾을 방법이 없느냐고 물었다. 윤겸은 그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관련 문서를 살폈다. 그리고 소지를 써 주었다. 농부가 물었다. “이것으로 땅을 돌려받을 수 있겠습니까?” 윤겸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장담할 수는 없소.” 농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윤겸이 말을 이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겠지요.” 농부는 소지를 품에 넣고 돌아갔다. 윤겸은 그의 뒷모습을 오래 바라봤다. 자신이 하는 일이 너무 작고 느리게 느껴졌다. 홍길동은 하룻밤 사이에 창고를 열어 수백 명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 자신은 하루 종일 글을 써도 한 사람의 억울함을 풀어 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윤겸은 그 느린 길을 포기하지 않기로 했다.
그해 겨울 윤겸은 서당 문을 닫고 돌아오는 길에 관아 앞에서 울고 있는 사내를 보았다. 낡은 솜저고리를 입은 사내는 어린아이 하나를 품에 안고 있었다. 아이는 울 기운조차 없는지 아버지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사내는 관아 문을 두드리며 곡식 한 됫박만 빌려 달라고 애원했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윤겸은 한동안 그 광경을 바라봤다. 오래전 한성부에서 쌀 두 되를 훔쳤던 사내가 떠올랐다. 윤겸은 품속을 뒤져 엽전 몇 닢을 꺼냈다. 사내에게 다가가 돈을 건네자 사내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어르신은 누구십니까?” 윤겸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내는 연신 허리를 굽히며 고맙다고 했다. 윤겸은 돌아서서 몇 걸음 걷다가 멈췄다. 사내가 다시 관아 문 앞에 주저앉는 모습이 보였다. 윤겸은 자신의 빈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평생 도둑을 잡으려고 쥐었던 손이었다. 이제는 칼도 포승줄도 없었다. 그가 다시 관아를 향해 걸어가자 사내가 물었다. “어르신, 어디 가십니까?” 윤겸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문을 열어 달라고 해 보려네.” 사내가 힘없이 웃었다. “열어 주지 않을 겁니다.” 윤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네.” 그러고는 다시 걸었다. 관아의 높은 문 앞에 이르러 그는 두 손으로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윤겸은 다시 문을 두드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손바닥이 아파 왔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문 안쪽에서는 희미하게 사람의 발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문 가까이까지 왔다가 돌아가는 듯했다. 윤겸은 다시 문을 두드렸다. 그의 손바닥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사내는 아이를 품에 안고 그 모습을 바라봤다. 윤겸은 문에 이마를 기댔다. 차가운 나무의 감촉이 얼굴에 닿았다.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주먹을 들었다.
그날 밤, 관아의 문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끝=
필자가 '도둑을 잡는 사람들'을 쓰게 된 이유
필자는 홍길동이라는 도적을 통해 법과 정의의 경계에 대해 묻고 싶었다. 법을 지키는 사람이 반드시 정의로운 것은 아니며, 법을 어기는 사람이라고 모두 악한 것도 아니다. 굶주림 앞에서 죄인이 되어야 했던 백성과 그들을 외면한 시대의 모순을 오늘의 현실에 비추어 보고자 했다. 진정한 정의는 누군가를 벌하는 데 있지 않고, 한 사람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데 있다고 믿는다. 끝내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도 두드리기를 멈추지 않는 것, 그것이 이 소설을 통해 전하고 싶은 인간의 양심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