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심방철이 되면 기도제목을 제출하라는 공고가 나온다. 코로나 이전에는 일년에 한번정도 심방을 받기도 했다. 아닌가. 셀별로 모여 한곳에서 심방을 받고, 점심 식사로 마감을 하곤 했던것도 제법 오래된듯 싶긴하다. 나처럼 누추하고 심란하게 사는 사람들에겐 심방이 부담스럽다. 찻잔하나도, 탁상하나도 변변치가 않아서 부끄럽다. 아주 예전에는 심방은 되도록 짧게, 그리고 물 한잔이면 끝이었다. 담임목사님의 완고한 철학이 부담주지 말라는 것이라고 했다. 심방헌금도 형편껏 교회에 직접 드리거나 말거나 자발적이었다. 목사님이 바뀌면서 많은 것들이 변했다. 세상이 변하는데 뭔들 안변하겠는가,,,. 기도 제목이 몇년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보니 다 은혜이고 감사라는 것, 아이들을 살펴주시면 좋겠다는 것, 기대수명이 지나갔으니 언제 죽어도 좋으니 자식들 짐 안되고 가고 싶다는 것, 등등. 정말 하나님께 바라는게 그것 뿐인가. 네 기도에대한 믿음은 있는 것일까. 인터넷을 뒤적이다가 관상기도란 말을 처음 대하게 되었다. 침묵, 혹은 묵언기도란 다른 표현인 모양이다. 물론 다 알아야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우리는 나하고 다르면 이단이라고 씨우길 좋아한다. 에수님 당시에는 예수님도 이단이셨다. 그후로도 숫하게 많은 이단들이 있어왔고, 세력에 밀려 우뚝 서기도 했다. 여의도 순복음교회만해도 이단시 했지만, 지금은 감히 누구도 이단이라고 말하지 못하고 있잖는가. 신천지라던가 또다른 많은 이단들은 먼훗날엘 정교가 될수 있으려나. 신앙촌이나 만민교회도 오래되지 않았나 싶은데, 그들은 여전히 이단이라고 불린다. 언제쯤 이단론이 사라질까. 사실, 교회를 선택해서 나가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냥 우연히, 누군가의 인도로 입문하게 되는데, 출석하는 교회가 이단인지 아닌지를 어찌알며, 종파는 어딘지를 구별할수있는 지식인들 있겠는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손위 형님이 갑자기 들어닥쳐 동행하길 원하시는데, 거절할수가 없어서 선뜻 따라나섰고, 많으면 두세번이라고 가볍게 선심쓰듯 생각했던게 40몇년전 일이다. 후회하지도 않고, 감사하게도 생각하고 있다. 신앙심이 있다는 생각은 안하고 있다! 하나님이, 예수님이, 내손잡아수시길 바라고 있는것은 사실이다. 나를 사랑하신다는 말씀이 좋다. 거기까지다. 주님은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십자가를 지셨지만 나는 그분을 위해 무엇도 할 생각은 없지 싶다. 열심히 나를 위한 요구를 하면서도 그분뜻에 가까히 갈 생각도 없는 것 같다. 그분은 나를 위해 다 주셨지만, 나는 늘 더 달라고, 이것 말고 저걸 원한다고 불평하거나 징징댄다. 아니, 때론 충분하다고 감사하기도 하지만, 그게 진심이기도 하지만, 왜 늘 딴곳을 보게되는 것인지 나도 모르겠다. 지금까지는 사는게 힘들고 어려워서, 나만 외롭고 서러워서, 나만 춥고 또 춥다는 생각에서 한발짝도 벗어날수가 없었는데, 이젠 또 죽는게 더 어렵다는, 외롭다는, 춥다는 생각에 매몰되고 있다. 죽엄의 문을 열면 뭐가 기다리고 있을까. 이땅에 살면서 뭘했느냐고 물으시면 어떤 답을 할수있을지도 두렵다. 인생은 소풍이라고? 나에게도 그랬으면 좋겠다. 누구나 그랬으면 좋겠다. 어머니가 정성껏 싸주신 도시락이 있고, 평소엔 구경하기 어려웠던 약간의 간식에 용돈까지 있었던 어린시절의 소풍이 참 그립다. 어머니도 그립고, 연화리가 몽땅다 그립다! 얘기가 딴길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