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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박철영평론가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박철영
사람이 중심인 풍경을 되찾아가는 행로
-강나루 시집 《감자가 눈을 뜰 때》중심
박철영(시인, 문학 평론가)
변화를 주관하는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시간이며 아침저녁으로 벌어지는 일교차다. 그렇게 반복된 과정을 거듭하며 영혼이 있는 것은 모든 것을 망라해 변화된다. 그렇다고 어제의 혹독한 추위가 갑자기 돌변해 삼복 더위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만큼 시간은 빠른 것 같아도 매우 더딘 것이다.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조금씩 변화되기에 한참을 지나서야 알게 된다. 바닷가 모래밭에 무수히 찍힌 새들의 발자국은 밤사이 파도가 지운 뒤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려 놓는다. 무의미한 세상의 한 모퉁이에 유폐된 시간도 알고 보면 제 나름의 소명을 다하고 있다. 그것들이 의미하는 모든 것이 전부 유의미한 것만은 아니다. 그럴만한 이유와 세상에 드러낼 만한 계기가 있어야 한다. 오랜 시간 감춰온 은밀한 사유를 축적하여 세상에 드러낼 때 고뇌에 찬 혼신의 노력을 긍정해야 한다. 그것이 보편적인 인식을 극복한 강나루 시인의 첫 번 째 시집《감자가 눈을 뜰 때》는 그런 의미에서 각별한 관심을 갖게 한다. 오랜 침묵을 수행한 사유가 확장되면서 자아의 세계 속 실체를 드러낸 것이다.
강나루 시인의 시 속에 함의된 사건들 속에서 서정적인 것과 시적인 것의 융합은 또 다른 변주를 이뤄 문학 속 자아의 세계를 부양한다. 흔히 서정적인 발효의 불요성에 대하여 일부 부정적인 인식으로 맞선 예도 있지만, 강나루 시인의 시에서 시간적인 발효가 소중한 변별성으로 기인하고 있어 낯설기도 하지만. 이내 익숙한 시어로 다가온다. 그것의 바람은 맨 앞을 차지하고 있는 ‘시인의 말’에서 “누구나 풀 수 있는 암호가 되기를 소망한” 저의底意가 맥락으로 이해된다. 언어의 근원적 기능은 소통에 있듯이 강나루 시인이 천착한 시간 속에는 간과할 수 없는 현실과 젊은 세대의 눈으로 바라본 지점을 교집합으로 보여준다. 강나루 시인이 조우했던 시간은 종종 공감했던 비밀을 보여주려는 듯 비밀을 해제하곤 한다. 그 안에 깃든 실체를 상상하며 감각의 세계 속에서 탐닉하려 한 유목적 사유는 쉼이 없다.
이따금 나뭇가지가
바람을 흔들어도
독립투사처럼
정갈한 이마 반듯하더니
일년 중 가장 더운 날
생의 절벽을 건너
결코 비겁하지 않게
소리없이 타는 흰불꽃의 넋
두루마리처럼 둘둘 말아
툭! 던지는데
세상이 아득해진다.
-<무궁화 꽃> 부분
무궁화는 중국과 우리나라가 원산으로, 기원전에 편찬된 중국의 지리지 『산해경山海經』과 『구당서舊唐書』, 조선조 강희안의 『양화소록養花小錄』, 일본의 『왜기倭記』에 우리 민족이 무궁화꽃을 귀하게 여겼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훗날 일본의 강압 통치 시대에 독립투사들이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한 수단으로 무궁화 꽃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다는 것과 당시 일본은 우리의 민족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고 ‘무궁화’를 없애는 데 혈안이 되었다. 그럴수록 더 교묘한 방법으로 뽕나무 묘목에 무궁화 묘목을 섞어 각지에 공급했다는 독립 운동사도 있다. 이후 애국가에도 등장하여 지금에 이르렀지만, 해마다 국가적인 식목 대상은 아니다. 특별한 곳에 심는 정도여서 비중은 미미할 정도다. 그런 무궁화 꽃을 화자의 가치관으로 바라보았고 그 꽃이 갖는 진경을 시적으로 펼쳐 보였다. 마치 오래 간직해 온 비밀을 알아내기라도 한 것처럼 “하얀 새 몇 마리/ 나무에 앉아있다// 새가 날개를 펴자/ 숲속이 환해진다”라며 정적 풍경을 생동감 있는 동적 이미지로 비상한다. 이어 상상하는 것의 바탕에 인식한 독립투사적 기상까지 나아간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범주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시의 비상은 “일년 중 가장 더운 날/ 생의 절벽을 건너/ 결코 비겁하지 않게/ 소리없이 타는 흰불꽃의 넋”으로 확장된다. 화자의 시적 상상력으로 보여준 ‘하얀 새’와 ‘독립투사’ 그리고 ‘흰불꽃의 넋’을 ‘국화’의 상징성으로 더 나아가 우리 민족의 독립을 향한 지사적 투쟁과 하얀 옷을 즐겨 입던 이미지로 치환한다. 이 시가 보여주려 한 것의 진면은 4연에 있다. 꽃 속에 내장한 비의를 풀어헤쳐 “두루마리처럼 둘둘 말아/ 툭! 던지는데// 세상이 아득해진다.”는 말미에서 시의 긴장감이 해소되면서 온유한 민족성까지 일거에 드러내고 만다. 전반에 흐르고 있는 시적 의미는 화자가 지향하는 세계를 부분적으로 내비친 것이다. 화자가 드러내고자 한 비의가 닿고자 한 곳은 생의 내력來歷을 다해 ‘두루마리’ 속의 단일한 민족성과 분단된 팔도강산의 복원으로 현재화된다.
우리 삼대 남의 집 문간에 살 때
할머니는 옥상에 시금치 씨앗을 뿌리셨다
가족들 모두 난로가에 모여 불을 쬘 때면
하늘 길 숨차게 내려온 겨울 바람에게
연신 싸대기를 맞으면서도
피학증 환자처럼 그것을 즐기는,
거적대기 하나없는 옥상의 시금치는
그 때마다 엔드로핀이 솟아
뿌리에서 줄기, 줄기에서 잎사귀 구석구석에
뜨거운 단맛을 머금었다
-<겨울 시금치 밭에서> 부분
그 세계가 보여주려 한 자아는 또 다른 모습으로 반영될 수밖에 없다. 삼동 추위가 얼마나 매서운가를 체험해본 사람은 안다. 한겨울 부는 바람에 귀가 잘려 나갈 것 같은 통증과 귀싸대기를 맞은 듯한 얼얼함은 노출된 시간과 비례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서 감각도 무뎌져 극한 통증마저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한파에 노출된 시금치의 혹독한 시간을 할머니의 삶으로 변주하여 고통의 크기를 전달하고 있다. 옥상에 뿌려진 시금치가 혹독한 찬 바람을 기피하지 않았듯 화자를 비롯한 ‘삼대’도 고단한 세월에 움츠러든 적이 없다. 그 모든 것들은 기억 속에 소중한 유전으로 내장되어 있다. 시금치가 뿌리내린 곳은 밭뙈기도 아닌 옥상의 옹색한 공간이다. 그만큼 할머니를 비롯한 ‘삼대’가 감내했던 현실은 녹록지 않았던 것이다. 가난을 절실하게 아파하며 살아본 할머니의 시간은 시금치의 모진 겨울과 상통한다. 시금치가 옥상 한데 에서 한파를 견뎌낸 것처럼 할머니를 중심으로 뭉친 가족애로 험난한 위기를 극복한다. 시가 던지는 매혹은 혹독한 시절을 견딜 수 있게 한 온기 서린 문장에 있다. 자칫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는 현실을 지탱하게 하는 사랑의 힘인 것이다. 닥친 고통에도 “가족들 모두 난로 가에 모여 불을 쬘 때면” 그 시간만큼 고통은 감쇄되어 행복할 수 있었다. 그것을 은연중 눈치챈 옥상의 시금치도 슬금슬금 지상의 밭 마당귀로 내려온 것이다. 시금치가 그것을 눈치챈 것처럼 얼마 큼의 시간이 지나면 겨울이 끝난다는 것을 할머니는 알았을 것이다. 어차피 겨울은 사계를 점유할 수 없다. 유형만 다르지 겨울은 곧 또 다른 시간으로 모든 것을 미련 없이 인계하고 물러난다. 그래서일까? “작은 아버지와 고모가 쓰거운 겨울 바람에 길 꺾”여 쓰러졌어도 더 독하게 “우리들은 승냥이처럼 들판을 쏘다니며/ 시금치처럼 가슴에 푸른 멍을 키운” 그 기질을 화자는 가슴에 새긴 것이다. 그러다 보니 무더운 폭염과 한겨울 한파도 견뎌낼 수 있는 강한 기질을 획득한다. 이제 한겨울 귓불이 빨갛게 언 것처럼 언 땅에 뿌리내린 시금치가 왜 단맛이 나는가를 알아버린 화자는 희망의 노래를 웅얼거려 본다.
<다시 노래를 불러야겠다>며 꺼낸 기타다. 한때 유행처럼 가슴을 아련하게 파고들던 통기타의 매력에 빠졌던 적이 있다면, 세고비아 기타 하나쯤은 집 어딘가에 묵혀두고 있을 것이다. 화자도 간만에 생각이 거기에 미친 것이다. 막상 꺼내놓고 보면 먼지 흠뻑 뒤집어쓴 바디와 넥에 매달린 줄도 그렇거니와 오랜만에 타는 소리가 원한만큼 투명할 리가 없다. 그래도 화자는 기타를 사랑한다. 사랑한 그대를 이미 잊었지만, 지난 사랑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는 먼지 낀 기타를 다시 사랑하게 될지 모르겠다. 그 기타만이 가진 클래식한 음색을 어루만지며 진한 커피를 마신 적이 있고 귀가 아프도록 그녀를 사랑한다며 목놓아 불렀던 ‘사랑’의 노래에 뜨거운 눈물을 훔치던 시간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것을 모를 리 없는 화자가 오랜 시간 만지지 않던 기타를 꺼내 든 것이다. 기타를 앞에 놓고 “나는 노래를 잊었다”며 부를 노래가 도저히 떠오르지 않는다는 어깃장은 무엇일까? 그 동인動因을 생각해본다. 지난 시간을 복기하듯 되돌아보는 데 “기타줄도 팽팽해야 소리가 나는 법/ 소리통이 깨지면 소리도 깨지는 법”이라며 기타의 문제가 아닌 화자가 안고 있는 현실을 인식하게 된다. 풀어 늘어진 기타 줄을 팽팽히 조이고 망가진 소리통을 고치고 노래가 새어나갈 틈을 막아야겠다는 반성과 각오를 되새긴다. 이제 남은 일은 실천이다. 충분한 시간을 갖고 기타를 치며 부를 노래를 준비하는 것만 남았다. 다시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을 찾은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시간이 더 필요한 듯하다. 누구나 준비의 시간은 필요한 법이다. 자신의 내면을 갈고닦는다는 수신修身은 언제까지라고 기한을 정할 수 없다. 그렇다고 무한정 시간이 주어진 것도 아니어서 살아남기 위해 터득해야만 하는 그만의 선택은 신중할 수밖에 없다. 세상에서 소중하지 않은 것은 없다. 무심코 시장 좌판대에 올라온 ‘갈치’를 하찮게 보지 말라. 그 동안 알량한 자만심으로 세상을 바라본 때가 있었다.
떼를 지은 한무리의 검객들이
칼이 된 몸으로 푸른 바다를 찌르며
제 生의 물살을 거슬러 온몸을
말랑말랑하게 휘어 물길을 헤쳐가는,
아무리 장검을 휘둘러도 베어지지 않는 필살기,
본래는 견고한 칼이었다
그 칼날 아래 닥치는 것은 모두가 쓰러졌지만
물살을 닳도록 진화해 온 부드러운 검법은
마침내 적을 베지 않아도 쓰러뜨리는 법을 터득한 것은
저 깊고 어두운 심해를 지나오는 동안
뜨거운 불에 견디고 망치질에 단련되어
은빛으로 빛나는 장검이 되었기 때문인데
갈치의 내력을 모르는
누군가는 칼치[力魚]라고 부르지만
살의(殺意)를 버린지 오래인 갈치는
물고기 중에서 가장 유연한 칼을 지녔다.
-<갈치> 전문
강나루 시인만의 필살기는 무엇일까를 생각해본다.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없는 깊숙한 바닷속을 향해 거침없이 문장이란 그물을 던져 쉽게 잡아낼 수 없는 옹골찬 갈치를 끌어올렸다. 바다에서 갓 잡아 올린 은빛 찬란한 갈치가 저토록 환한 표정으로 반항한 적이 있었던가 싶던 그 밤을 잊을 수 없다. 비장한 밤하늘에 은빛 휘황한 슬픔을 털어내고도 아무렇지 않게 숨을 거두는 갈치다. 기껏 한 것이라고는 허공을 잠시 잠깐 앙탈하듯 휘젓으며 환하게 한 것 뿐이다. 허공에다 그어 놓은 길을 따라간 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지워진 갈치의 비장한 바다를 잊어선 안 된다. 그냥 하루의 끼니를 채우기 위해 유영한 생이 아니어서 스스로 곧게 살아가는 법과 더불어 사는 법을 고뇌하며 끝없이 이는 심해 속 파랑도 거부하지 않았고 더는 유연해질 수 없는 생의 비밀을 알았을 때 밀려왔을 연민 같은 슬픔을 긍정해야 했던 시간이었다. 긴 시간 인내한 몸속에 품은 칼을 꺼내고 싶었겠지만 참았던 것이다. 그가 품은 칼은 수많은 시간의 바다를 건너면서 한 번도 쓰지 않고 은닉한 최종병기였다. 험난한 죽음에 내몰려도 누구 하나 베인 적 없는 은빛 보검이다. 진검은 아무나 가질 수 없다. 그만한 품성을 지녀야 한다. 빛나는 갈치의 생애가 추상적인 것 같아도 상상력의 진원은 시적 화자의 침묵을 털어 현재를 향하고 있다. 그것의 수렴 점은 끝없는 성찰로 이뤄가야 할 겸허다. 강태공이 천기를 기다리듯 오랜 수련을 마치고 세상으로 나아가겠다는 ‘출항’을 천명으로 본다 해도 무리는 아니다. 그만한 때를 맞이한 것이다.
긴 준비의 시간을 마치고 미지를 향한 <출항>은 불안과 설렘이 교차한 출발선에서 긴장은 극도로 심리적 불안을 야기한다. 앞으로 맞닥뜨릴 세상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도 하거니와 매 순간마다 ‘나’라는 존재를 확인해가는 시간과 싸워야 한다. 어찌하든 투명하지 않은 미래의 막연함은 두려울 수밖에 없다. 그 시간 속에 존재한 모든 것들도 그 안에 포함된다. 내가 누구인가를 곱씹어보고 좋아했던 사람들을 떠 올리게 된다.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사람들 속에 “오래 전/ 작은 아버지가 익사하고/ 큰 고모의 배가 뒤집혀/ 우리집 배는 발목이 묶인 채 폐선이 되었다”며 고통의 시간을 상기하고 있다. 그것은 너무나 큰 충격이기에 집안 내력처럼 따라붙은 고통이 쉽게 잊힐 리 없다. 어차피 거친 난바다에 배를 띄울 수 없기에 잔잔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불안감을 토로한다. 너무 오랫동안 지체하다 보니 “악천후의 물너울을 건널 엄두를 내지 못했다”며 소심해진 자신을 돌아보며 ‘출항’을 해야만 하는 운명 앞에서 “곳곳에 암초가 있을지”라도 더는 지체할 수 없다는 결연함을 보여준다. 화자의 ‘출항’은 많은 의미를 함의하고 있다. 삶의 목적지로 나아가기 위한 항로에 대한 확신과 항해 의지일 것이다. 자신이 가고자 하는 목표 지점을 명확하게 설정하고 있다. 그것은 과거로부터 준비해온 기다림의 시간이었고 현재에 대한 확신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다짐하는 실현 의지로 “내 생의 만선을 위해 고래를 찾아 떠나야 한다/ 내 생의 뱃길 환하게 떠올려야 한다.”며 도전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인간적 욕망마저 거침없이 드러낸다. 그렇지만, 사람 사는 것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다.
그것을 확신한다 해도 다른 모습의 투영投影일 지 모를 ‘매미’ 울음소리를 들으며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매미처럼>은 화자가 바라보는 세상에 대한 우려일 수 있다. 초여름 하나 둘 늘기 시작한 매미 울음소리를 쫓아간 것도 알고 보면 유년의 추억만은 아니다. 무슨 운명을 타고난 건지 살기 위해 울어야만 하는 유전적 비애를 모를 리 없는 매미를 사회적 약자의 자화상으로 치환하고 있다. “땅 속에서 10년 수양을 하다가/ 비수같은 마음 진정시키느라” 긴 고통을 억누르는 수양의 시간을 빌어 환생했지만, 막상 세상에 다시 나와보니 그보다 더 악화된 환경에 노출되고 만다. 세상이 힘들게 한 것들에 “내 말 들어보라고/ 하도 억울해서 못 참겠다”며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며 “수천 번 마음 속으로 허물을 벗어도/ 마음을 다잡지 못하는가.”라며 되묻지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우리가 해야 한다. 그토록 힘들게 살아가는 것이 세상사라면 어떤 난관이나 고통에 봉착한다 해도 선한 마음으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적어질 수밖에 없다.
“영혼이 아름다운 사람이 죽어/ 하늘의 별이 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라며 화자는 관점을 도덕적인 문제로 환기한다. 별이 될 수 있는 조건 중 하나가 아름다운 영혼을 품은 인성까지 포함한 것이고 평소 행실로 평가받는 것임을 의미한다. 올바른 삶을 살다 가신 분의 영혼인 것 같아 <차마 별을 보지 못한다>는 자괴감을 시에서 고백한다. 그것이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지만, 심적인 불편함을 대신한 말인 것이다. 그만큼 도덕적이지 못한 사회에 대한 실망감이 컸다고 볼 수 있다. 하늘 보기가 부끄럽단 말은 화자가 행한 행동에 기인한 것이 아니고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불편부당한 사건들을 보며 든 자괴감을 이른 것이다. 화자의 여리고 착한 순정함은 하늘의 별을 헤아리는 것부터 시작된다. 어두운 밤하늘에 총총히 뜬 별들을 보며 마냥 좋기만 했던 때도 있었다. 어느 때부턴가 흐릿한 하늘이 편해졌다는 것이다. 하늘에 뜬 별이 흐릿하게 보이는 날이면 더한 자책감에 빠져든 화자다. 현실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정의롭지 못한 일들과 불합리한 일들이 쉽게 선한 것으로 뒤집히는 것을 보며 정의와 진실이란 것의 무색함을 깨닫게 된다. 자신에게 유, 불리가 옳고 그름의 판단 기준이 된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사회윤리가 갖고 있는 권위가 허망한 것임을 생각한다. 오염된 눈으로 하늘을 바라본다면 맑고 환하던 “별이 더러워질 것 같기 때문”에 고개를 숙여야 하는 현실은 너와 나의 각성으로 극복해야 할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다. 세상을 올곧게 살겠다는 포부가 윤동주의 서시에 닿아 있어 시를 읽다 보면 진정성으로 파동 해오는 순수함을 공감하게 된다. 시의 세계 속 화자의 심상이 시편으로 다가올 때면 여지없이 고민에 빠지게 된다. 그 시속에 내면화된 강나루 시인만의 결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린 새들이 비행을 위해 날갯짓을 했을 자리,
햇빛에 코팅한 것처럼 반짝이던 봄날의 새 이파리
비바람에 가슴 조이며 밤새 흔들렸던 나뭇가지
적막한 밤에 달빛과 고요와 흰 눈이 쌓이기도 했던
부러져나간 추억들이 아프고
뻥 뚫린 하늘이 질린 사람의 얼굴처럼 파랗다
-<幻痛> 부분
<幻痛>도 그런 성향을 잘 보여준다. 고목이 된 감나무가 주렁주렁 열려 온 가족이 즐겁기만 했던 그 시절이 있었다. 다들 세월이 흘러 둥지를 떠난 어린 새처럼 텅 비어버린 ‘외숙모’ 댁을 찾아갔는 데 참담한 풍경이 기다리고 있다. 어린 추억 속 감나무가 너무 커 버려 태풍에 집을 덮칠까 불안했고 위협이 된 듯하다. 온 가족을 행복하게 해 줬던 감나무를 몸통만 남긴 채 “혼자 남은 외숙모가 사람들 불러” 잘라버린 것이다. “감꽃을 줍고 간짓대로 감을 따던/ 어머니와 외사촌들의 잘려나간 유년이 아프다”는 추억이 안타깝다. 그토록 오랜동안 이어온 200년 전 집안 내력을 소환하고 있다. 그 집을 지킨 감나무와 함께 외사촌들이 성장했듯 화자의 유년을 품어준 감나무였다. 가슴속으로 파고든 참담하게 베어져 버린 감나무의 幻痛환통이 오래갈 듯하다. 종종 시에 투사된 심정적 자아로 현현한 주장을 보면 자신만의 세계가 명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思春의 거울>은 사물을 비춘 형상과 다른 괴리감을 경험하며 생긴 불신에서 비롯되었다. 사실 거울은 실재와 다른 형상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똑같은 모양처럼 보이지만, 거울에 비친 순간 더는 동일체가 아닌 유사체에 불과하다. 억지 같지만, 거울에 비친 순간 이미 자아와 타자로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백미러는 동일체를 비추면서 보는 각도에 따라 다양한 형상으로 실재와는 완전 다른 것이다. 그날도 자동차를 타고 이동하다 “가까운 거리를 멀리 보여준 백미러 때문에/ 나를 감싼 범퍼가 깨”진 사고를 당한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 왔다. 마치 거울을 보듯 부모의 삶을 닮아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그날도 믿어 의심치 않고 바라본 백미러였다. 따지고 보면 사고가 난 원인은 “저 거울 때문이다/ 모범 정답이라고 믿었던 거울 때문이다”라며 지금까지 일관된 신뢰에 대한 회의를 갖게 된다. 애꿎은 화살은 태생적 근원인 부모로까지 거슬러간다. “그러므로 내가 아버지의 거울이라고?/ 저 낡은 족보처럼 살아가라고?”라며 마치 불만이 깊어 반항하며 따지고 든 듯이 들리지만, 그마저도 자신을 성장시킨 번뇌의 시간으로 환원된다. 그 결과를 언젠가는 또 다른 자신에게 되물을 것이다. 그것은 진전을 향한 변화를 끊임없이 추구하기 때문이다. 반복된 물레질을 통해 도공이 바라는 세상을 만들어가듯, 유형만 다르지 반복되는 것에서는 같다.
시간은 불로 새긴 이름이어서
1300도 불길의 세례를 받아 다시 태어나는 것,
가마가 땀을 뻘뻘 흘리며 시간을 구울 때
불의 온도를 잘 조절해야 한다
성질이 급하거나 포악한 불은
시간에 금이 가고 시간의 살갗이 터지기 때문이다
-<시간을 굽다> 부분
한 개의 질그릇을 만들기 위해서 물레를 몇 번 돌렸는 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 순간도 잡념을 용인할 수 없는 장인 정신의 순결성에 있다. 혼신을 다한 마음으로 빚어낸 질그릇도 “빠르거나 늦거나 엇박자일 경우/ 시간의 모양이 삐뚤어져 망치기 십상이어서/ 흥에 겨운듯 물레를 돌려야 한다”는 것에서 유연한 흥(사유)을 질그릇의 내면에 혼입混入할 수 있어야 진정한 장인이다. 그 조건마저 쉽지 않다. 그것은 삶에 대한 겸허한 마음이자 대상에 대한 경건함과 상통한다. 모든 삶이 시간 속에서 변화가 이뤄지듯 1,300도의 가마 불에 구워지는 질그릇도 다르지 않다. 시간을 건너온 불덩이는 쉽게 꺼지지 않는다. “시간이 살아있음을 드러내는 그릇/ 제 생에 알맞은 시간을 구워내기 위해/ 누구나 가마 하나씩 갖고 있어도/ 나는 오랫동안 대책없이 시간을 흘러보내다가/ 미혹해서 눈을 떠 겨우 물레를 돌리고 있다” (<시간을 굽다>)며 의연한 성찰을 보여준 단단한 시다. 그 눈빛이 예사롭지 않은 것은 가마의 불덩이가 가슴으로 옮겨 붙었기 때문이다. 가마 속 불에 던져진 시간은 태워져 소멸하는 것이 아니다. 그 시간을 지나면 영원을 향한 탈태奪胎의 지고지순한 형상으로 변주되어 그토록 추구한 열망을 안고 순장한다. 그런 징후는 감각을 건너온 전언적 사유로 환기되면서 실체는 더 확연해진다. 그 과정은 강력한 화염을 통해 무위로 반응하고 직관은 형상 속 비의를 포섭하여 문학적 함의를 고조시킨다. 좋은 시는 분명한 메시지를 담고 있어 시적 심연을 통과하면서 소실되는 것이 아니라 공감을 증폭시킨다. 가마와 질그릇의 융합으로 상승한 변화가 집체화되면서 견고한 존재론적 성찰로 확대해간다. 종종 가파른 능선을 오르다 불쑥 가로막은 산마루를 착각해 코 앞에서 정상을 놓친 경우가 있다.
우리가 올라야 할 정상은 꼭 높은 곳만은 아니다. 굽어보는 것은 자세를 낮추겠다는 겸허한 실천이다. 화자는 길을 걷다가도 무심코 지나치지 않는다. 행색이 초라한 할머니의 시간은 종이 박스를 줍는 것으로 시작된다. 새벽 이른 출행을 하며 매번 간절한 것은 많은 폐박스를 줍게 해 달란 소망일 것이다. 하루의 생존을 위한 화급함은 존중과 존엄의 무게를 가늠해봐도, 어디에도 할머니가 설 자리는 없다. 존엄은 고사하고 존중도 받지 못한 초라한 자신의 행색을 먼저 알아버린 할머니다. 매번 그것이 마음을 짓눌렀을 것이다. 그런 할머니를 “길에서 자주 볼 때마다 인사를 했더니/ 종이박스 줍는 것이/ 무슨 부끄럽고 챙피한 일인 것처럼 생각해/ 그냥 운동삼아 줍는다”(<모르는 척>)는 안타까운 변명에 묻는 안부가 겸연쩍다. 이후 할머니가 일하느라 눈치채지 못할 때면 ‘모르는 척’ 지나가곤 했다는 배려가 아름다운 시다.
시가 담아내야 할 고도는 정교하게 조합된 문장이 아니라 온기가 담긴 인정이란 것을 말하고 싶다. 시의 본령을 향한 화자의 관심은 의외로 넓고 깊다. 스스로 예외 없이 다가간 소중한 것들은 ‘나’만의 영역에서 끝나지 않는다. 도시 개발이 활발해지면서 옛것들은 이유 없이 사라져야 할 대상이다. 그 오래된 공간에 ‘나’와 ‘너’로 실재한 흔적들을 너무 쉽게 지우고 있다. 통째로 포크레인 삽날에 사라지는 것들 중 “이 집에 살았던 누군가의 이야기가 기왓장처럼 쏟아져/ 지붕이 무너지고 수북한 흙먼지,/ 인부들이 물줄기를 쏘자 낮 안개처럼 사라진다/ 마침내 누군가의 生의 숨결과 온기가 서린 방,/ 허기를 메우기 위해 밥을 삶아내던 부엌,/ 어쩌면 어두운 밤 가난을 부수기 위해 맷돌을 갈던,/ 마음 수양하듯 반질반질 윤이 나게 닦은 대청마루를/ 인정머리 없는/ 커다란 손이 부숴버린다”(<순식간>)는 안타까움이 가슴을 파고든 통증이다. 그 회한 같은 안타까움은 뼛속까지 진동한 슬픔 같기도 해서 시적 구상을 수식하는 언어적 구도가 아닌 인간애에 대한 절실함에서 발현한 서정 속으로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경쾌한 지점이란 말을 아끼고 있다.
강나루 시인이 지향한 시적 세계를 살펴보면서 그것을 다 헤아리지는 못했다. 다만 삶으로 보여준 세계 속 진정함이 어디로부터 기원하였는지와 지향하는 목측 선을 유추해봤을 뿐이다. 말하고 싶은 것은 건강한 시의성과 언어가 유리되지 않고 일체화를 이룬다는 데 있다. <산국山菊>은 방문 목욕을 도와주었던 독거노인의 죽음을 보면 착잡한 심정을 옮겨 적은 것이다. 삶의 비애 같은 생로병사의 마지막을 접하면서 누구나 피해 갈 수 없는 것이 죽음이다. 간간이 노인이 들려주던 이야기를 회상하며 “젊은 시절 청초한 산국을 꺾어/ 머리에 꽂곤 했던 노인의 머리엔/ 오늘은, 늦가을 산국이 하얗게 피어 있었다”며 조문 대신 쓸쓸한 추억으로 애도하고 있다. 누구나 환하게 피던 산국처럼 화사한 생의 시간을 건너야 한다. 그 시간은 영원할 것 같지만, 어느 순간 막다른 곳을 향해 치달아왔음을 알게 된다.
강나루 시인이 말하고자 한 무의식을 통해 체험한 선험을 통해 깨달은 삶의 이야기를 주조로 보여준다. 그것이 도달하고자 한 세계는 이상향적인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지켜져야 할 최소한의 덕목들이다. 그로 인해 부담해야 할 목록들은 사색이나 고투의 질량으로 단정할 수 없다. 가장 인류 보편적인 인식으로 누구나 판단할 수 있는 것이며 기교나 대응으로 수단화되어선 안 될 것들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윤리적인 근본을 지키는 것이다. 물이 흘러가듯 순연한 시적 의지가 저변적 지향을 쫓는 물길처럼 자연스럽게 시집 전편을 관류하고 있다. 보고 듣고 느낀 심상을 현란한 미학으로 전유專有하지 않는 시의 여백들이 향후 고도를 높여갈 여유이면서 충전재인 셈이다. 모두들 이상하지 않다고 말하는 세상에서 “그런데 이상합니다/ 가든에는 정원이 없고/ 사람들이 모여 앉아 밥을 먹고 술을 마십니다/ 파크에는 나무와 풀밭이 없고/ 호텔이나 여관만이 즐비”(<이상한 나라>)한 것이 맞지 않느냐고 일갈한다. 자본주의가 빚어낸 상업성과 결탁한 모종의 거래란 것을 모를 리 없지만, 불편한 심기를 내뱉고 말았다.
그것에 대한 화두를 놓지 않는 것으로 봐서 강나루 시인의 시적 세계관은 변함이 없다. <감자가 눈을 뜰 때>를 보며 자신의 내면 속에 깊이 숨어버린 자아를 올바로 인식하기 위해 귀를 잘라내야만 했던 고흐도 ‘별이 빛나는 밤’을 헤아리며 무수한 고뇌의 시간을 보냈다. 고흐가 찾아 헤맨 시간의 광속만큼 강나루 시인도 그에 못지않은 고통의 시간을 자아의 세계화로 분별하고자 했다. 그런 점에서 고흐가 집착했던 자의식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것을 시적 변별성으로 바라보려 했지만, 그것마저 거부할지 모른다. 후설의 현상에 대한 주의 주장처럼 굴절을 감안하지 않는 실체는 진실과 다를 수 있다. ‘감자’가 오매불망한 하늘은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하늘이 아닐 수 있다. 그 하늘은 언어적 기호로만 동일할 뿐이다. “하늘을 본다는 것은/ 독기를 품는 일,/ 푸른 독기를 품는 일은 빛을 보는 일/ 어둠 속에서 겨우 숨 쉬는 것들은/ 멍이 들도록 빛의 출구를 찾을 것”을 알려준다. 쉽게 이룰 수 없는 것의 고뇌는 길어질 수밖에 없다. 하루 이틀에 끝이 날 여정이 아니란 것을 안다. 그 행로에서 만난 시의 접면이 복잡하게 전개되는 사회를 그물망 안에 담고 있다. 그만큼 세상 보는 눈이 편협하지 않다는 방증이다. 그렇게 수수한 전언이 시간의 발효를 거쳐 거침없이 발화를 다툰 것이다. 절제와 함의로 비약해가는 데 있어 시의 경계는 견성을 통한 통찰이 아니라 슬픔처럼 젖거나 휜 사람들의 마음속 표정을 잠시나마 아름다운 시간으로 돌려주는 것에 있다. 지금껏 말하고자 한 시의성은 사람이 중심인 풍경을 되찾아가는 행로에서 강나루 시인을 만났다는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