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채의 마술사 마티스가 성의 없이(?) 오려 붙인 단색 색종이의 누드 이미지에서 우리는 어떠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가? 거장의 자신감이 탄생시킨 고졸한 아름다움인가, 아니면 마티스라는 후광효과에 구태여 현혹될 필요 없이 아름다움을 찾을 수 없다고 솔직히 말해도 되는 것일까. 애초에 이미지로 자신과 사물을 표현하는 화가에 대해 말이나 텍스트로 설명하고 평가하는 것은 무리인가. 원점으로 돌아가서, 도대체 아름다움이란 무엇이고 누가 위대한 화가인가?
이주헌의 프랑스 미술관 순례를 읽고 토론 과정에서 나왔던 얘기들입니다. 정답이 무엇인가를 놓고 따져보는 토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생각이 어떠한가를 들을 수 있는 시간이라는 점에서 좋았던 것 같습니다. 앞으로 미술책도 자주 다루면 좋겠습니다.
다음 책은 ‘내 안의 물고기’의 저자인 닐 슈빈의 ‘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도서출판 부키)입니다. ‘시행착오, 표절, 도용으로 가득한 생명 40억 년의 진화사’라는 부제가 눈길을 끄네요. 마케팅의 귀재들이 붙인 부제가 책의 내용을 압도하는 경우도 많은데, 이번 책은 어떨까요? 2023년 2월 25일 오후 4시 사과나무 치과 8층에서 뵙고 얘기 나눠 보겠습니다.
(추신) 다른 책-허경 교수님 수업 관련-을 보다 보니 마티스는 프로이트류의 정신분석학의 영향을 받은 계열(>모더니즘>야수파)의 화가라 하네요. 모더니즘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는 꿈, 무의식, 원시성, 원초적인 것들에 관심이 많았다 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타이티섬에서 원시의 생명력을 표현하고자 했던, 후기인상파로 분류되는 고갱은 모더니즘 화가이고, 단지 눈에 보이는 것들을 분석하고자 했던 인상파는 모더니즘 이전의 사조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아무튼 모더니즘 계열의 마티스가 화려한 색채의 작품과 단순하고 고졸한 작품을 동시에 만들었다는 사실은, 그가 꿈과 무의식, 정신분석학에 관심이 많았던 -눈에 보이는 것보다 잠재의식을 표현하는데 관심이 많았던- 모더니즘 계열의 화가라는 점과 관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아님 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