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가루 집안
나락과 밀 보리는 수십 개의 낱알이 달린다. 조는 수백 개로 다닥다닥 붙어서 작은 알맹이들로 엉겼다. 피(稷)와 귀리는 예전엔 먹었지만 장만하기 힘들고 맛없어 멀어졌다. 옥수수와 수수를 주식으로 하는 곳도 있다. 한 계절 감자나 고구마를 끼니로 들었다. 산지에서는 메밀을 찧어 물에 가라앉힌 뒤 가루를 말렸다.
곡물들이 이렇게 수다스럽다. 씨 뿌려 가꾸고 거둬들이는 일이 되게 힘들다. 쌀이 되기까지는 백번 가까운 손길이 간다. 밀 보리는 늦가을에 심어 겨우내 자라 봄에 거둔다. 양식 떨어지는 춘궁기를 나기 위해서다. 보리는 껍질이 억세고 질겨 디딜방아에 찧어야 한다. 속대가 있어 삶아 물컹하게 하고 다시 익혀야 먹을 수 있다.
산촌에는 옥수수가 식탁에 오른다. 수수는 아침저녁 식사론 씁쓰레해서 거북하다. 가장 수월한 게 감자와 고구마이다. 벗겨 삶으면 된다. 산 많은 지역에서는 자락에 메밀을 심는다. 밭이 하도 드넓어서 바다가 크면 이만할까 한단다. 달밤에 꽃을 굵다란 소금 뿌려놓은 듯하다는 말도 있다.
소와 말, 양, 염소, 토끼 등 풀을 뜯고 사는 동물은 참 편리하다. 털 나고 들판을 다니며 아무 데나 드러누워 잠드니 의식주 걱정이 없다. 추운 몽골 지역 말들은 겨울이 되니 몸에 털이 줄줄 흘러내려 감싼다. 앞발로 눈을 헤쳐 마른 풀을 찾아낸다. 잎과 줄기, 껍질 등 하찮은 검불로 덩치 크게 살찌운다.
걱정할 게 없다. 때 되면 어느 곳이나 초목은 있고 가다가 머무는 바위나 나무, 덤불이 움막집이다. 사람만 이리 씨앗과 열맬 만들어 살아간다. 평생을 허우적거리며 고달프게 지난다. 그러다 불을 사용한 그을음 흔적이 영월 동굴에 남았다. 벼로 쌀밥을 짓고 떡과 술을 만들며 밀 보리도 이밥 대신 자리를 차지한 음식이다.
또 단술에 들어가는 엿기름과 성경에 나오는 보리 떡, 막걸리를 띄우는 누룩, 국수, 갖가지 빵을 빚어낸다. 세상은 뽀얀 쌀밥과 밀로 만든 것이 주된 먹거리다. 도토리묵을 쑤다가 잘 넘어가는 부드러운 메밀묵이 생겼다. 고려 때 더 맛 나는 밀수제비와 칼국수, 전으로 발전해 갔다. 하루 세끼 온통 삶고 구우며 쪄낸다. 몇백 년 살 거라고 지지며 회 친다.
거기다 채소가 곁들여지고 온갖 물고기와 잘 사는 동물들을 가만두지 않는다. 날마다 늘어난다. 못 먹는 게 없다. 부지런한 벌들의 양식과 닭의 알도 빼앗는다. 이제 달리했으면 싶다. 밭의 쇠고기라는 콩 종류가 많다. 가꾸기 쉽고 알곡으로 만들기 편리하다. 거름이나 비료를 적게 줘도 잘 자란다.
작은 씨앗만치나 종류가 많다. 땅콩에서부터 팥, 완두, 강남, 녹두, 병아리, 렌틸, 쥐눈이, 검은 것, 작두, 대두 등이다. 모두 두세 알씩 뿌려 키운다. 녹두나 쥐눈이처럼 작은 것에서 강남이나 작두같이 큰 것이 있다. 팥과 강남처럼 붉은 것에서 완두나 녹두같이 풀색도 보인다. 쥐눈이와 검은콩처럼 흑색도 있고 많이 하는 대두는 노란빛이다.
땅콩은 땅속에서 나온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하나 아니면 두 개씩 달렸다. 말려 껍질을 벗긴다. 익었을 때 쥐나 뉴트리아가 달려들어 파먹는다. 잘 지켜야 한다. 갈아 죽을 만들기도 하지만 따로 음식을 하지 않고 심심풀이로 쓴다. 강정에 조각을 넣거나 조청을 발라 뭉쳐서 사용하기도 한다.
팥은 예쁘다. 하얀 줄이 있는 게 붉은색으로 귀태다. 희거나 누리끼리한데 이건 자주색이다. 팥죽을 하거나 고물로 붙인 찹쌀 시루떡이다. 붕어빵에 묽게 넣어 굽는다. 양과자 빵에 으깨 찐득한 것을 넣은 팥빵이다. 완두는 예닐곱 개가 맺힌다. 가을에 뿌려 싹틔워 겨울을 지난 뒤 봄에 거둔다. 넝쿨로 얼기설기 뒤엉겼다.
자장면에 고명으로 올리거나 밥에 넣는다. 이것도 쥐가 달려들어 따먹을 수 있다. 강남은 봄에 심어 이른 여름에 거두고 다시 심어 가을에 또 수확할 수 있다. 키 낮아 보듬기 쉽다. 탐스러운 붉은색과 흰 것이 있는데 밥에 넣으면 딱딱 씹히지 않고 부드러워 잘 넘어간다. 훑으면 굵은 게 대여섯 개로 잘 불어 한주먹이다.
녹두는 변절하기 쉬운 숙주 콩나물을 만들거나 죽과 적을 부친다. 동학란 때 녹두장군이란 말이 있었다. 병아리는 수프와 빵으로 사용한다. 병아리 머리처럼 생겨서 붙여졌다. 볼록해서 렌즈 모양에서 붙여진 렌틸은 둥글고 납작하다. 노란 알약처럼 생겼다. 밥에 넣거나 수프로 끓인다. 쥐눈이는 정말 쥐눈처럼 작고 까맣다. 콩나물로 기른다.
검은 콩은 간장에 졸여 자반으로 한다. 작두는 콩 중에 제일 크다. 열매가 풀 베는 휘어진 작두처럼 생겨서 이름이 됐다. 줄기로 올라가는데 칡이나 다래처럼 높고 멀리 간다. 주렁주렁 낫 같고 밤하늘 반달처럼 엄청 굵다. 식용으로 하고 약용으로도 사용된다. 팥은 소두라 하고 메주콩은 대두라 부른다. 노란빛의 둥근 대두는 사용이 많아 골고루 쓰인다.
같은 메주콩이어도 큰 것과 작은 게 있다. 큰 것은 소출이 적다. 농가에서 많이 열리는 작은 것을 키운다. 얼른 보면 비슷해 구별이 안 된다. 콩나물을 하고 밥에 넣었다. 소죽 솥에 푹 삶았다. 반쯤 찧어 네모 덩어리를 매달아 띄워 메주를 만든다. 큰 독 안의 된장은 일 년 양식과 같이 상에 오른다. 비지와 갱 물을 빼고 토실토실 두부도 만든다.
뚝배기보다 장맛이라고 그 구수한 냄새가 입맛을 돋운다. 더운 아랫목에서 견딘 청국장은 또 얼마나 맛나는가. 처음엔 삭은 냄새가 싫었는데 변해서 단맛이다. 토장을 넣은 쌈은 감질나게 넘어간다. 맛깔나는 반찬이 따로 없어도 된다. 찌개와 국물이 다 잘 들어간다. 잉걸불에 자글자글 데워진 짜릿한 내가 가슴을 파고든다.
콩고물 떨어진다와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곧이듣지 않는다, 콩 볶듯, 콩을 심다, 콩이야 팥이야 한다, 콩 튀듯 말이 있다. 한때 감옥에서 콩밥을 줬다. 일석(一石) 선생은 꽁꽁 언 것을 하나하나 떼 다음 끼니까지 꼭꼭 씹어먹고 살아나왔다. 허기져 참지 못하고 우우 먹은 몇 한글 학자는 해방을 보지 못했다.
가루를 내먹기도 한다. 고물로 묻히면 황금빛이 난다. 반찬 없을 때 비비면 돌돌 굴러다니는 게 목말라도 고소한 게 맛나다. 송편에 소로 넣기도 한다. 밀국수 늘릴 때 섞거나 넓힐 때 붙지 말라고 뿌린다. 구수하고 뜨끈한 것을 한 그릇 하고 나면 든든하다. 반은 물로 채우니 목까지 차오른 느낌이다.
쌀가루와 밀가루는 물을 넣으면 질척하게 끈적거리며 껴안는다. 치댈수록 달라붙어 탄력이 생긴다. 감자나 고구마도 전분은 뭉쳐지고 삶으면 차지다. 배고플 때 들던 암 칡가루도 수제비나 국수가 된다. 강냉이와 수수도 올챙이 묵과 떡이 된다. 콩은 떡이 어렵다. 쌀떡과 송기떡, 쑥떡, 수수떡 하는데 콩떡은 없다.
어른 공경이 부족하고 위아래 순서 없을 때가 있다. 집안이나 나라가 그렇다. 물을 부어도 엉기지 않고 따로 놀며 쪄도 제멋대로다. 단합이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