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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당선작 _울타리의 노래(외 4편)/ 이설빈
울타리의 노래
1
아이들은
펜스를 짚고 넘어가
좀더 큰 아이들은
펜스를 훌쩍 넘어가
어른들은 점잖게
펜스를 들추고 넘어가
마치 펜스라는 게
치마 속에 있다는 듯이
여기, 나는 펜스에 걸터앉아
모든 걸 넘겨봐
아직도 목초지는 멀고
노래는 혀까지 미치지 못하고
눈썹에 고인 땀방울이
잠깐, 빛을 받아 넘쳐서
먼 지평의 굵은 턱선을 강조하는 시간
아직도 목초지는 멀고
바람이 불 때만 의미를 갖는 예민한 솜털처럼
성급한 땀방울 하나
내가 이룬 모든 걸 거꾸로
그늘 속에 드리우고 있어
있지, 아직도 목초지는 멀고
아직도 목초지는 멀어
2
내가 이룰 것들이란 다 무엇일까
한 획의 비행운?
점진적인 책갈피의 이동?
열두 개의 그림자 태엽?
노예선의 새로운 깃발?
주머니가 덜 마른 코트?
커다란 굴뚝을 입에 물고
여기, 나는 완강히 버티고 서서
모든 걸 넘겨 보낼 작정이야
아직도 목초지는 멀고, 맞아
내 검은 워커는 진창에서 얻었지
무릎까지 푸욱 잠겨서
비석에 새겨진 이름에는 이끼가 자라지
입술을 뒤덮는 콧수염처럼
3
아직도 목초지는 멀고
건초지는 발밑에 영원처럼 머물고
노래도 새들도 떠난 둥지에는
느긋한 노을 한 줌
내가 이루지 못한 모든 걸
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어
알아, 아직도 목초지는 멀고
나를 가리키던 시간들
내가 될 수 없던 몸짓들
그것들 모두가
내 생의 단위로 자라날 때까지
여기, 나는 펜스에 기대서서
그 모든 걸 굽어봐
4
아이들은
펜스를 짚고 넘어가
좀더 큰 아이들은
펜스를 훌쩍 넘어가
아기들은
펜스를 기어서 지나가
마치 펜스라는 게
텅 빈 빨랫줄인 것처럼
사람들, 눈부신 속옷들
바람에 멀리 날려 가고
목초지만큼 멀어져 가고, 나는
여기, 기다란 그림자 되어
펜스를 넘어서는데
하나, 둘…… 눈이 멀어
울타리를 지워가는데
숨 숲 수프
개구리를 토해 낸 뱀이 개구리의 어두운 허기로
쉬이익— 빨려 들어가듯
벌목꾼은 숲으로
붉은 책갈피를 펼쳐보는 저녁,
배꼽의 태엽을 거꾸로 돌려보면
나는 그녀의 배 속에서 소화되는 것처럼 보이겠지
갑자기 수면 위로 끌어올려진 심해어의 눈알처럼
인광을 내뿜는 무수한 저녁의 육체들
신경이 퉁퉁 불어서
근육질의 구름
우르릉우르릉 비석을 갈고 있다
벌목꾼은 검은 매왈츠*를
이제 검정 크레파스를 긁어내면 무지개가 맺힐 겁니다
그건…… 그건 살색이에요!
비명이 울창하던 노을
반달도끼로 도려낸 숲의 싱싱한 내장들
검은 책갈피를 펼쳐보는 새벽
감전된 새가 창백하게 짖었다
무딘 도끼날에 베어오는 소름
벌목꾼은 늪으로
쥐 먹은 자리를 에워싸는 머리카락들처럼
한데 모여 늪을 끓이는 침엽수들
개구리들의 눈빛을 모아 독기를 푼다
머리통은 예리한 발톱에 꿰여 지붕 위로
몸통은 덕지덕지 크레파스 늪 속으로
개구리 배 속에서 꾸역꾸역 자라난 뱀은
개구리—허눌을 벗는다
벌목꾼은 검은 매 왈츠를
————
* Chris Garneau의 음악「Black Hawk Waltz」(Hidden Track)
몰락의 맛
네가 하프라인을 줄기차게 넘나드는 왼쪽 날개였을때
누군가네 얼굴이 새겨진 은화들을 수거하고 있었다.
네가 출렁이는 골망처럼 환호성을 네지를 때마다
누군가 네 얼굴이 새겨진 은화들을 으깨고 있었다.
네 시선이 오른쪽 카메라를 의식했을 때,
전광판에 비친
너의 뻥 뚫린 뒤통수와 마주쳤을 때,
누군가 네 얼굴이 새겨진 은화들을 녹여서
한 발의 탄환을 만들고 있었다.
*
네가 플래시 세례를 받아
안락의자의 늙은이로 다시 깨어났을 때
산성山城처럼 커다란
네 초상화를 그리던 잡부들은
수염을 그려낼 목탄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사실은…… 갑자기 늘어난 네 흰 수염들 때문에
초벌한 선산先山 전체를
다시 한 번 불태웠다고 고백했다.
너는 콧구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달덩이를 올려다보며 파이프를 입에 물었다.
*
시간은 맑은 콧물처럼 훌쩍훌쩍 뒤로 흘러,
거친 약솜으로 콧물을 훔치다 인중이 벌겋게 달아오른, 어느 저녁나절.
네가 가지절임을 억지로 삼키는 아이였을 때
네 어머니의 도마 위에서 사내들은 코가 잘려나갔다.
네가 가지절임에서 질질 새어 나오는 물빛으로 잠들 때
코 잘린 사내들이 수면 위로 입술을 떠올렸다.
네가 물었다.
너희의 이름은 무엇이냐?
그들이 답했다.
코 잘린 심연이오.
핏물 빠진 수련이오.
수면에 바싹 다가가서 네가 물었다.
그럼 네 이름은 무엇이냐?
바싹 다가선 코에
코 잘린 자리를 맞대며 그들이 답했다.
잘린 코들을 지지는 인두요.
몸을 버린 창백한 코…… 냄새를 맡아라.
기억해내라.
기억해내라.
*
그렇다.
너는 규토硅土 위에 지어진
두 개의 집에 살았다.
첫 번째 집에 돌아오면 네 어머니가
축구화를 뒤집어 넣어주었다.
신발장 속으로
신발장 속에서
정든 피라미드가 닳고 있었다.
남몰래 가지절임을 뱉었던
네 입안에서
네 입안에서
귀뚜라미가 울고 있었다.
두 번째 집으로 돌아가면 네 아버지가
마우스피스를 물려주었다.
열기와 침묵 사이로
열기와 침묵 사이에서
관중들의 목젖이 헐고 있었다.
어깨를 맞대고 양손으로 거시기를 가린
네 이빨들 뒤에서
네 이빨들 뒤에서
골키퍼가 떨고 있었다.
*
너는 총구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탄환이 장전된 파이프를 빨고 있다.
네가 말했다.
그렇다. 이것은…… 냄새가 없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잡부들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파이프가 아닙니다!
창문에 바싹 다가서서 네가 말했다.
이것이 파이프가 아니라면
이것은 또한……
가지절임도 아니다.
너는 파이프에 불을 당긴다.
*
파이프는 단 한 번 격렬하게 불을 뿜었고, 양 갈래로 뚫려 있는 화장터의
굴뚝처럼, 너의 머리통은 앞뒤가 분간이 되질 않아 연기가 오래 머물렀다.
비탄과 폭동이 동시에 메아리치며 두개골 같은 성채城砦를 무너뜨렸고 폭
우 속의 지렁이처럼 장례 행렬은 잿더미 선산으로 민머리를 들이밀었다.
네 심복이 중얼거렸다. 유지를 받들겠습니다. 선생님의 오늘까지를 초상
화에 넣겠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선조께서는…… 닥쳐올 사건보다 열등
하게 존재하지 말라고 하셨지요. 잡부들은 무너진 성곽의 돌들로 무덤 위
에 탑을 쌓았고 꼭대기에 네 가죽을 벗겨 만든 커다란 북을 달았다. 쇠파이
프로 북을 내려치며
심복이 물었다.
선생, 이것은…… 파이프가 맞지요?
초상화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
* 마그리트의 그림「이미지의 배반(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불안의 탄생석
처음으로
누군가 말했다
여길 봐 우리가 무엇 앞에 서 있는지
커다란 바위가 있고
작은 돌들이 있어
커다란 바위 둘레를 맴돌면서
어떻게든 옮길 생각을 하면서
우리는 죽을 때까지 함께일 수 있다
그러나 작은 돌들을 걷어차면서
어쨌든 치울 생각을 하면서
우리는 너나없이
두 손 다 썼다고 여기면 먼저 떠나는 거다
아마 죽을 때까지 어긋나겠지
누가 먼저 말했건 그건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다시 처음으로
비가 내린다. 빗방울. 빗방울을 끌어내리는 손은 더 가벼운 빗방울들이다. 빗방울들. 작은 창에 게으르지만 분명하게, 내 뒤틀린 의식 위로 또 다른 흐름을 보태며 방점을 찍으며, 애써 가라앉힌 닻을 끌어올린다. 닻들을 올린다. 닻들을 끌어올리는 손은 더 무거운 닻이다. 닻을 올린다.
처음에 덧붙이며
눈뭉치가 구른다.
언제나 처음인 것처럼
두발자전거를 탄다. 오르막길. 자전거에서 내린다. 네발자전거가 되어 나는 언덕을 끌고 있다. 내가 끌고 있는 것은 언덕이 아니라 단지 내 시선이다. 그 누가 한 번도 앞을 지나간 적 없는 것처럼 안경을 닦는다. 그 누가 한 번도 뒤를 봐준 적 없는 것처럼 성냥을 긋는다.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인다.
처음에로 연결된 전신주
지나치며 본다. 아직도 묻히기를 거부하고 허공에 붙들린 채로 또 다른 경이의 교각으로 떠 있는, 그것을 본다. 높은 뇌압腦壓을 부여잡은 양극지의 긴장과 그보다 질긴 피복으로 감싼 무도정無道程의 흐름. 흐름? 순환. 그 성긴 편직編織건물들 사이 무정형으로 누빈 풍경들, 서로의 몸속으로 쑤셔박은 배관들을 나는 언덕에 심긴 채로 내려다본다. 비탈길. 비탈길? 가속구간.
다시 처음에 덧붙이며
눈덩이가 구른다
언제나 처음인 것처럼
머리맡에 냉장고를 두고 이부자릴 편다 누군가 십 년째
같은 자리에서 냉장고 문을 연다 위에서부터 차례로
내용물은 모른 채 그것을 나눠 품은 비닐들
기한 지난 쇠잔한 눈빛들 푸르게
푸르게 발등으로 떨어진다 움찔
움찔 냉장고 옆에 잠들어 있던 내가
눈 뜬다 그 발은 아무것도 꺼내지 않고 문을
닫는다 이마와 귓불이 서늘하다
반쯤 덜 녹은 눈빛 얼렸다가
닫힌다 냉장고가
마지막인 듯 처음으로
웅웅거린다…… 꿀벌 떼가 비상하는 꿈…… 낡은 선풍기…… 말벌이 되는 꿈…… 라디에이터…… 꿀벌 떼가 덮치는 말벌이 되는 꿈…… 물 새는 보일러…… 내 꿈이 너의 꿈에 침수되는 꿈…… 따뜻해…… 자다가 투욱,
힘껏 감아 던진 고무동력기
힘줄 풀리는 소리
들린다. 예감의 오라 감기는 소리.
뒤에서 팽팽하게 당겨지는 목줄.
나는 기울어지며
수평을 무너뜨리며,
내가 딛고 있는 경계의 접점 속으로
매듭 속으로 파묻힌다.
또다시 처음에 덧붙이며
눈사태, 눈사태, 눈사태, 눈사태? 눈사태에 이은
산사태. 팔다리 수십 개
눈덩이마다 박혀 있다.
눈덩이는 수천 개
처음이 어려운 것이다
냉장고 문짝에서
자석이 떨어진다.
한기에 파묻힌 내 이마로
자석이 떨어진다.
낮달, 처음에로 끌려갈 뿐이다.
별들의 예인선 다가온다.
낮달.
어렵게 처음에 덧붙이려는
몸 잃은 팔다리 수만 개
제자리를 찾아 밤하늘에 꿈틀거린다.
나는 아— 하고
처음으로 올려다본다
빙점(氷點)
이곳은 아무리 지나쳐도 강조되지 않는다
*
욕조가 없고 창문이 없고 절정이 없으리라는 사실을 나는 또 지나친다 조심해야 한다 내가 딛고 선 빙판이 투명해질 때를 조심해야 한다 내가 딛고 선 꿈이 수위를 높일 때를 너무 많은 심증은 초점을 부러뜨린다 네 탓이오 네 탓이오 너의 큰 탓이다 그러므로 가파르게 책망하오니…… 이 밤의 심지는 깎여나간다
*
빛의 탄주彈奏는 눈앞을 컴컴하게 만든다 이곳에서 소금은 고향을 잊는다 이곳에서 낙엽은 스스로 썩지 않는다 이곳에서 물방울의 세계는 다시 한 번 뒤집히고 중력은 잠의 머리채를 잡아챈다 그리고 검고 매끄러운 벽돌이 구워지고 벽돌은 어떤 색유리보다도 성실하게 빛을 상영한다 이곳에서 방아쇠는 당겨지지 않았으나 메아리는 그 죽음보다 많은 뼈들을 일으켜 세우며 끌려간다 시간 밖으로 호명할 수 없는 날씨 속으로 기억의 구멍은 저벅저벅 뚫리고 그 숨통을 매듭지을 구두끈은 언제나 모자라다 이곳에서 방충망은 벌레와 문자를 구분 없이 거르고 부들부들 기도문을 읽으면 악몽은 기도문을 거꾸로 뇌까린다 코앞에서 마주 보는 거울 속에서 그 누구도 마주보지 않는다 그곳에서 유한은 무한을 함부로 다루기 시작한다 이곳에서 더 이상 되풀이되지 않으리라 나는 촛불을 불어 이곳을 구기고 싶다 저편에서 유언을 적지 못한 하늘이 날마다 자신을 번복하듯이 나는 아무리 깎아내도 강조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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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회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결과 발표
[심사 경위]
올해로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은 14회째를 맞이한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인유는 흔한 수사지만, 그간 배출된 작가, 시인, 평론가들의 면면을 떠올리면 2000년대 이후 한국 문학의 ‘강산’을 변화시키는 데 이 상이 기여한 바를 자부하고 싶어진다. 문학의 새로운 진화를 적극 수용하고, 진화의 양태와 생리를 한발 앞서 찾아 읽겠다는 의욕과 의지는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변하지 않은 스스로와의 약속이었다. 그래서 이 ‘상징적 입사식’의 통과는 자신의 고유성을 드러내해야 하는 쪽의 부담만큼이나 그것을 골라내고 가늠해야 하는 쪽의 어려움도 잇따른 과정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뜻 깊은 호명의 순간으로 이 상을 거쳐 간 이들의 행보와 다채로운 축적은 상의 성격을 형성하고 유지하고 있으며, 이 점이야말로 문학과사회 신인상의 의의와 전통을 세우는 가장 든든한 뼈대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정은 이제 일부러 표내지 않아도 표가 나는 자연스런 모양새를 얻고 있는 듯하다. 올해 응모된 작품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기성의 세계에 기대거나 안주하기보다 다소 서투르고 투박해도 자기 본연의 목소리를 서사의 구성 가운데, 행간의 숨은 어조 속에 구축하고 표명하려는 의도가 뚜렷하게 드러난 예가 많았다. 이러한 강한 의도성이 완성도를 감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었지만, 실험성에 대한 예민한 자의식은 여러 시행착오를 겪는다 해도 새로운 문학을 낳는 밑거름이자 그러한 욕망을 가동하고 지속시키는 원동력이라는 것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그러니 기성의 문법과 스타일에 기대기보다 실험의 가능성을 믿고 미지의 결과를 향해 성큼 나아가는 과감한 걸음에 마땅히 격려의 박수를 쳐주어야 할 것이다. 문학과사회 신인상은 그러한 과감성이 성숙의 예비조건으로 감지되는 문학적 동량을 향해 열린 문이자 편안한 익숙함보다는 때로 낯선 불편함을 마다하지 않는 오롯한 개성의 출현을 위해 마련된 통로이다. 그리고 이것은 본 상이 소수의 향유자가 고집하는 특정의 경향을 지지한다는 것과는 그 뜻이 엄연히 다르다. ‘신인’의 함의가 결정되지 않은, 결정되길 거부하는 현재 진행형의 가능성을 가리키는 한, 한국문학의 역사적 풍경을 새롭게 바꾸어갈 징조로 예감되고 문제적 징후로 되새겨지는 모든 다양한 시도와 결실에 우리는 언제든 첫번째로 그 이름을 불러줄 것이다.
활짝 개방된 문과 닦아놓은 길을 따라 나타날 새로운 얼굴들은 기쁜 마음으로 맞이할 반가운 존재들이다. 올해는 신인상의 이러한 성격에 어울리는 이름을 부를 수 있게 되어 더없이 즐거운 한 해다. 총 981명이 응모한 가운데, 시 부문에는 483명, 소설 부문에는 487명, 평론 부문에는 11명이 노고의 산물을 보내주었다. 두 차례의 심사가 이루어졌으며, 4월 4일에 응모작 전체를 살피는 예심이 열렸고, 예심을 통과한 작품들을 심사자들이 2주간 재독한 뒤 4월 18일에 본심을 진행하였다. 지난해에 소설 부분에서만 당선자를 내었던 아쉬움 탓에 올해 예심에서는 모든 부문에서 당선자를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며 더더욱 주의 깊게 원고를 살피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오랜 검토 끝에 시는 16명, 소설은 13명, 평론은 2명의 응모자가 예심을 통과하였고, 본심에서 이들 중 당선의 후보로 꼽을 수 있는 작품을 선별하여 최종 논의에 들어갔다. 시와 소설 모두 후보작들이 예년에 비해 각자의 다양성을 뽐내는 경향이 두드러져 해당 작에 대한 심사자들의 품평도 상세하게 제시되었으며, 그만큼 토의도 긴 시간 동안 이루어졌다.
논의 끝에 심사자들은 문학과사회 신인상의 취지가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는 점에 이견 없이 동의하였고, 최종적으로 신인상이라는 명칭에 걸맞는 작품에 작은 영광이 주어져야 한다는 데 흔쾌히 합의하였다. 이렇게 행복한 고민의 과정을 거쳐 올해에는 시와 소설 두 부문에서 당선을 결정하였다. 두 분의 당선자가 ‘새롭다’라는 형용에 어울리는 인물임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 심사자들의 마음은 뿌듯하다. 비록 평론 부문에는 당선자를 내지 못했지만, 텍스트와 대결하길 마다하지 않는 치열한 비평적 성찰의 싹을 확인하였으니, 내년에는 좋은 결실이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문학이 여전히 인생을 걸어볼 만한 벅찬 꿈이라는 것을 자신들의 글을 통해 돌아보게 해준 응모자들 모두에게 이 자리를 빌려 거듭 감사의 인사를 드리며, 글쓰기의 고통을 마다하지 않는 예비 작가들에게 동병상련의 공감과 힘찬 응원을 함께 전한다.
심사위원
김형중 강계숙 이수형 조연정 강동호
심사평
[시 부문]
_작년 신인상 공모에서 시 부문은 당선작을 내지 못했다. ‘미래의 시’를 발견하고 인정하는 일에 좀더 엄격하려는 욕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투박한 눈이 그것을 미처 알아보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등단 이후 의욕적인 자세로 후속 작업에 대해 고민하며 자신의 문학 세계를 단단하게 일구어 나가는 많은 신인들을 보며, 당선작을 내지 못한 필요 이상의 망설임과 무책임한 태만을 동시에 반성하기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올해 심사에서는 더 단호해지고 더 섬세해지고자 했다. 이러한 우리의 결심에 응대해주는 시들을 적지 않게 만나볼 수 있었다.
올해 시 부문 응모자는 모두 483명으로 그중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오른 응모자는 김후빈, 윤은숙, 이다희, 이설빈, 이수인, 이종민, 이준형, 정솔아, 제주림 이상 9명이다. 9명 응모자의 시들을 꼼꼼히 읽은 후 김후빈, 이설빈, 제주림의 시로 본격적인 논의 대상을 좁혔다. 시와 소설의 경계를 실험하듯 장황하게 서술하며 시적 긴장에 소홀한 경우, 체험의 시적 형상화에 있어 체험의 인공성이 다소 어색하게 두드러진 경우, 단순한 문장의 나열이 간결한 배치의 매력으로 상승하지 못한 경우, 무엇보다도 기성 시인의 분위기를 강하게 발산하는 경우 등이 배제되었다.
<非子> 외 9편을 응모한 김후빈의 시 중에는 죽음을 다루는 시들이 흥미롭게 읽혔다. <자연사박물관> <눈의 결정> 같은 시이다. 저수지에서 익사한 “언니”의 죽음을 그리는 <눈의 결정>은 특히나 강렬했는데 “물이 눈 속에서 얼어버릴 때” “물의 무늬가 결정지어질 때” 같은 구절들이 죽음의 순간을 강하게 환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이라는 소재가 시적 충격을 위해 동원되었다기보다는 어떤 강력한 체험과 결부되었을 것이라는 확신을 줄 정도로 김후빈의 시에서는 전반적으로 깊은 울림이 느껴지기도 했다. 결정적으로 김후빈의 시를 당선작으로 뽑는 일을 망설이게 한 것은 응모작의 제일 첫 머리에 놓인 <非子> 같은 시 때문이다. “비자나무”와 “非子”의 동음이의어를 활용하고 더불어 한자 非자의 이미지까지 함께 녹여낸 이 시는 이러한 조합의 상상력이 조금 단순하게 보였고 결정적으로 시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아마도 가족 안에 새겨진 시간의 형상들)와 매력적으로 뒤섞이지 못했다는 인상을 주었다. 언급한 작품들 이외에 특별히 인상적인 작품을 찾지 못한 것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설빈의 시는 보내온 열 편의 시가 다소 편차를 보이기는 했지만 상상력의 깊이와 넓이의 측면에서 세 명의 후보작 중 가장 패기 있는 작품들로 느껴졌다. 시 한 편 한 편의 길이가 다소 길게 느껴지는 경우도 있고 출처를 알 수 없는 다양한 이미지들이 조금 두서없이 장황하게 병치되는 부분들도 없지 않지만, 그러한 병치가 말의 반복과 변주를 통해 리듬감을 형성해 시적 긴장을 성공적으로 이룰 때나, 결국 시인의 의도 안에 잘 통제되고 있는 듯한 안정감으로 승화될 경우, 그 매력이 상당했다. <울타리의 노래>가 전자에 속하는 성공적 사례라면 <몰락의 맛>은 후자에 속한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자신만의 독창적이고도 견고한 세계를 오랜 습작의 기간을 통해 단련해왔다는 확신은 받을 수 없었다. 생경함에 기대려는 태도가 오히려 낡은 느낌으로 다가오기도 했고(“규토硅土” “빛의 탄주彈奏”와 같은 낯선 한자 어휘를 노출시키는 장면들), 비슷한 이미지의 어휘들을 교체하며 같은 문장 구조를 단조롭게 나열하는 <빛>과 같은 시는 시적 방법론에 대한 응모자 자신의 불안을 반증하기도 했다. 물론, 스스로의 미숙함에 대한 불안으로 인해 범하는 실수가 줄어들 경우 어떤 매력적인 작품을 보여줄지는 <울타리의 노래> 같은 시가 증명해주고 있다. 이 가능성을 쉽게 저버릴 수는 없었다.
<미래의 식탁> 외 9편을 응모한 제주림은 간결한 문장들 속에 일상적 삶의 단편들을 낯선 방식으로 매끄럽게 녹여내는 솜씨가 안정적이다. 이 응모자가 얼마나 오랜 습작의 시기를 거쳤는지 확신하게 해주는 부분이다. 관례에 어긋나는 언급인 듯도 하지만, 사실 제주림이 작년 신인상 심사의 본심에서 언급되었던 어떤 응모자와 다른 이름의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시를 보고 한눈에 알아 볼 수 있었는데 놀랍게도 작년의 심사평에서 언급되었던 이 응모자의 단점들이 올해의 응모작에서는 거의 대부분 보완되어 있었다. 그래서 특별히 애착이 가는 응모자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일상의 익숙한 풍경들을 낯선 관계를 통해 재현하는 방식이 한정적이라는 점, 다루고 있는 대상 세계가 조금 협소하다는 점 등 많은 부분이 극복되어 있었다. 그런데 심사 현장에서 한 심사자가 지적했듯 제주림의 시는 아직 첫 시집을 내지는 않았지만 최근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이십대 중‧후반의 어떤 여성 시인들이 공통적으로 보이는 미니멀리즘적 경향을 환기한다는 점에서 우리를 주저하게 했다. 이러한 공통된 시적 성향이 어떤 시대나 세대의 일반적 특징을 재현한 결과인지, 아니며 그저 일시적인 문학적 유행 현상의 결과인지 명확하게 따져봐야 할 문제이지만, 어느 쪽이든 이러한 사정으로 인해 제주림만의 독창성이 희박해지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제주림의 시를 읽으며 우리는 시적 독창성과 완성도를 함께 갖추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다시 한 번 절감하게 되었다.
이 세 명의 후보자 중 특히 이설빈과 제주림의 시에 대해 오랫동안 논의하였다. 논의가 꽤 길어졌는데 이는 심사위원 간의 의견 차이 때문이라기보다는 이 두 응모자 간의 뚜렷한 특징의 차이 때문이었다. 세 명의 심사위원들 각자가 애초에 당선작으로 염두에 둔 쪽은 분명한 편이었지만, 이설빈과 제주림의 시를 함께 낱낱이 비교해 읽을수록 각각의 매력은 물론 아쉬움도 상대적으로 커지면서 마지막에는 어느 쪽도 쉽게 지지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설빈이 보여주는 미숙함과 가능성에 대해, 제주림의 시가 보여주는 안정감과 익숙함에 대해 주로 이야기했다. 이야기가 끊임없이 공전되었고 결국 신인상의 기본 취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고, 마침내 우리는 이설빈을 선택했다. 뻔한 말로 현재의 완성도보다는 미래의 가능성을 생각하기로 했다. 마지막에 손에서 내려놓은 제주림의 시에 대해서는 여전히 아쉬운 마음이 크고, 결국 손에서 놓지 않은 이설빈의 시에 대해 불안한 마음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단호해지기로 했다. 우리는 이설빈의 가능성을 믿어보기로 했다.
선택을 당하는 쪽이 아니라 이번에는 운 좋게도 선택을 하는 쪽의 입장에 서게 된 사람으로서, 선택하지 않고 내려놓은 쪽에 마음이 더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우리 자신의 수많은 경험을 통해 알고 있듯 선택에서 배제된 사람은 쉽게 자책에 빠진다. 상실과 실망에 대한 보상 행위로 자신을 선택하지 않은 사람을 탓해볼 수도 있다. 건강한 결과로 이어지려면 어느 쪽이 더 효과적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아무튼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그 과정들이 부디 스치듯 짧게 지나가기를 바란다. 스스로를 믿고 앞을 보기를 바란다. 조금은 뿌듯한 마음으로, 대체로는 불안한 심정으로 시인으로서의 첫 발을 내딛고 있는 수상자 이설빈에게도 똑같은 말을 반복해 하고 싶다. 스스로를 믿고 앞을 바라보자.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1989년 서울 출생. 강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재학 중.
어렵고
가렵다.
두렵고
마렵다.
——《문학과사회》2014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