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서自序
기억할 수 없는 일들이 돌아갈 수 없는 날들이
항아리에 술이 괴듯 부글부글 끓어댄다
이쯤에 뒤를 돌아보자
숨도 한 번 고르고
바람벽을 오르다가 낭떠러지를 만난 나
양각으로 심장에 새긴 내 안의 상형문자들
배시시 비웃음 주며
허상이라 놓으라네
지울 만큼 지운 얼굴 버릴 만큼 버린 욕심
때때로 되살아나 폭풍처럼 뒤흔들어
나이테 아무리 감아도
나는 속이 빈 나무
2026년 가을 여주에서
김인숙
연밭
기품 있는 그대여 전주에 들리시거든
덕진 못 그득한 연밭 잠시라도 만나세요
세상사 잠시 내려놓고
극락여행 하시길...
가만히 눈을 감아요 풍겨소리가 들립니다
천상의 맑은 향도 코끝에서 맴돕니다
당신은 만날 겁니다
깨어있는 당신을
홍련이 활짝 열리면 청이도 보이구요
의상대사가 만났다던 관음님도 보입디다
전생은 알 수 없지만
후생은 알 것 같아요
당신의 봄날은?
동창회에서 가끔 보는 J
지점장 시절을 말한다
S는 사무관 시절을
또 누구는 이사 시절을
터질듯 화려한 봄날
그대들의 그 시절
화려했던 봄날이
나에게도 있었을까
잊혀진 기억까지
더듬더듬 찾아 간다
쫓기며 허둥대던 기억뿐
가고싶지 않은 옛길
젊음이 떠났대도
아쉬울 것 별로 없다
앞, 뒤, 옆 둘러봐도
미련 둘 일 없으니
이순의 모롱이에서
노래한다 나의 봄날
미완성 초상화
해마다 유월이면 그리다만 초상화
흑백사진 한 장 없이 총알받이 된 아버지
그리려 붓을 들어도 그릴수가 없었다
할어니 닮았대서 둥글넓적하게 그렸다가
이목구비 잘 생겼대서 꽃미남을 그렸다가
말갛고 깨끗하대서 성철스님 그렸다
팔순 넘은 친정엄마 오랜만에 오셔서
"에미야, 막똥이가 느이 아베 쏜 뺏시야
어쩌면 그리 도싱타냐 판배기다 판배기"
남겨진 핏덩이가 그리움을 그렸다가
이제야 미련 없이 붓을 내려놓았다
반백년 넘게 그리던 아버지의 초상화
우화
삼개월 된 손녀와
이순 넘은 할머니가
쇼팽의 피아노곡을 듣다
꽃잠에 빠집니다
손녀는 나비가 되고
할머니는 번데기가 되고
말의 뼈
죄가 죄를 낳고 거짓이 거짓을 낳아
남에게 쏜 말의 뼈 되돌아와 박히다
자신의 심장을 겨눈 송곳 같은 말의 뼈
존경받던 지도자가 필부보다 못하다니
가면 쓰고 나팔 불던 위선자의 민낯
콩으로 메주를 쑨대도 못 믿겠다 이제는
밥하기 싫은 날
반백년 수많은 식솔 부양하던 맏며느리
오늘 저녁 싱크대 앞에 서기가 너무 싫다
원인도 이유도 없이 괜히 그냥 싫을 뿐
깍두기 국물 섞인 깡보리밥 창피해
쫄쫄 굶고 집에 온 초등학교 브 시절
할어닌 아무 말 없이 부엌으로 가셨지
전쟁 중에 외아들 잃고 빙벽 앞의 할머니
맹물을 끓이시며 눈물닦고 또 닦고
조용히 꾸짖으시네 무엇이 부족하니?
화들짝 놀라 깨어 다가선 싱크대엔
여기저기 넘쳐나는 풍부한 식재료들
올챙이 그 시절 잊지마 생선 눈만 끔벅끔벅
소음과 소리 사이
시골 마을 새벽은 닭 울음이 문을 연다
알람시계 아니라도 새소리가 잠 깨우고
게으른 송아지 울음이 여름 한 낮 달구는데
허전한 노인들이 손주 삼아 키운 강아지
낮과 밤 구별 없이 밥값 하느라 멍멍댄다
질세라 개구리 합창 음정 박자 정확하고
아침은 아침대로 저녁은 저녁대로
수런수런 두런두런 소리에 묻혔는데
왜일까, 철옹성 아파트보다 깊은 잠 자는 이유
김인숙 선생님,
20년 만에 출간하신
소음과 소란사이가 세상의 빛을 보니
축하의 인사를 전하고 또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