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야할일, 반듯이 해야할일을 넘어서, 하기싫은일, 피하고 싶은일과 마주서는게 충성이라고 한다. 실감이 가는 귀한 말씀 아닌가 싶다. 좋아하는일, 하고싶은 일만 찾는 요즈음 사람들에게 귀에 들리는 말은 아닐수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하고싶은 일도 다 못한 세상인데, 라고. 그도 맞는말일수는 있다. 하기싫은일, 꼭 피하고 싶은일도 반듯이 해야하는 일이기에 문제가 있지 않을까. 사명이란 말도, 충성이란 말도 그래서 따라붙은 것일테고. 내 인생도 전부가 싫어하는 일 투성이었다. 가난한 전업주부에서 시작해서, 생산공장 노동자, 병원 간병인, 가사도우미를 겸한 아이 돌봄에 이르기까지. 결코 내가 원해서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내 인생에는 내가 그리 탐했고 그리워한 우아한 일상은 단한번도 없었다. 하기싫고, 피하고 싶고, 그러나 그럴수가 없어서 직면해야했던 초라한 인생에 당연히 충성이 있을리 없지않는가. 마지못한 삶속에 무슨 명분인들 있었을까. 늘 앞이 안보였다. 얼마나 막막했는지 모른다. 솔직히 말해서 내 영혼을 팔수만 있다면 팔고도 싶었다. 악마와도 거래를 하고 싶어했다. ㅎㅎㅎ. 악마까지도 나란 존제는 흥미가 없어했던 것이 다행인듯 싶다. 어쩌면 사람들은 자기 깜량과는 상관없이, 세상의 온갖것들을 소유하고 싶고, 누리고 싶어하는지도 모르겠다.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부귀영화까지, 경험해보지 않았기에 더 홀리는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사실, 내가 가진것 은근 많다. 아니, 적어도 부족한것은 없다. 불편한것도 없다. 그런데도 썩 만족해하지 않고있다. 여기서 더 갖은들 뭐에 쓰려고? 아들 집없는것, 아들 문제다. 손주들 공부에 흥미없는것, 손주들 문제다. 내 문제는 아니다. 내가 해결할수 있는 것도 당연히 아니다. 나는, 내 하루를 사는것도 버겁다. 바라는게 더 있는것도 아닌데 평온할수가 없어서 잠못이루고 뒤척이는게 어디 한두번인가.내 몫은 아니라고 하면서도 왜 이렇게 바람이 이는지, 왜 이렇게 조급한지, 그리고 불안불안한지 모르겠다. 이미 석양이다. 골짜기엔 그늘이 내리고 있고 나그네 발길은 서두르지 않으면 안되는데, 뭐에 그리도 집착하는 것인가. 집착한들 무슨 소용이 있는것도 아니지 않는가. 헛되고 헛되다고 누누히 설명해주고 있는 그 헛된것들을 꼭 잡아보길 원하는 헛된 갈망은 결국엔 나를 조급하게도하고 불행하게도 하고있다. 이미 충분하고, 불편한것은 없다면서도 어디까지가 진심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모르겠다. 나만 그런가. 얼굴한번 보자는 친구들의 요청에 건성으로 답하는 내 진심은 뭘까. 얼굴보자는 요청이 그냥 건내는 빈말임을 알아선가. 정말 나를 보고싶어하는 친구가 있다는 생각은 안한다. 왜냐하면 나 역시 꼭 보고싶은 것은 아니니까. 그렇다. 물론 그리운 것도 어느만끔은 사실이다. 그 그리움은 어린시절에 대한 꿈이고 아쉬움이지 반듯이 그 친구에대한 것은 아닐수도 있지않을까.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가 않는 내게 보고싶음인들 있을까. 오히려 만나고 난 뒤의 쓸쓸한 여운은 감당하기 어려울듯도 싶다. 안그런가? 어제도 작은손주 손을 잡고 교횔 다녀왔다. 예배에 전념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얼굴얼굴이 좋다. 본질에서 벗어나고 있다고 해야할지 모르겠다. 내 신앙의 척도인셈이다. 3월도 중순을 넘어섰다. 작년 이맘때는 감기로 잠을 자고 또 잤다. 잠을자다보니 봄이 와 있더라. 올해라고 뭐가 다를까. 봄은 오고, 노구는 지처간다. 길어서 만난 어느 노인 왈! 90은 되고나서 가야할게 아니냐며 깔깔 웃었다. 나도 함께 웃었다. 90까지 갈수도 있다. 그분이 부르시지 않으면 어쩌랴.내가 아무리 돌이질을 하더라도 무슨 소용이 있을까. 오래사는게 이미 재앙이 되어버렸다. 건강해도 너무 오래사는것은 짐이다. 아름다운 뒷모습을 남기고 아쉽다 싶을때 갔으면 참 좋겠다. 그런복을 주십시요.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