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말, 한국의 정부 예산에서 국방비의 비율은 33% 가량이었다. 그런데 공식적으로 집계된 실업률도 그와 비슷했다. 더구나 국민들의 절반은 절대 빈곤에 놓인 극빈층이었고, 도무지 가난으로부터의 탈출구가 보이지 않던 상황이었다.
- 김흥수의 <한국전쟁과 기복신앙확산연구>에서 발췌
국가 산업의 대외의존도는 90%에 이르렀고, 공업생산은 일제 말기의 절반도 안 되었다. 심지어 1960년까지도 수도 서울의 집들 중 39%가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다. 농촌은 더 심각해서 무려 82%의 가구들이 전기의 공급도 못 받았다.
- 한영우의 <다시찾는 우리역사> 제 3권에서 발췌
1955년, 한국의 대외 무역 중 총수출의 50%와 총수입의 30~50%가 일본을 상대로 한 무역에서 나왔다. 또, 미국은 한국에 원조를 주는 조건으로 일본 상품을 사라고 요구했다. 1958년 경에는 일본이 한국에서 수입하는 비중은 총 수입액의 0.35%, 수출액은 0.53%였으나 한국이 일본에서 수입하는 비중은 21%, 수출 비중은 57.3%에 이를 정도로 경제 분야의 대일 종속이 심했다.
- 이원덕의 <한일 과거사 처리의 원점: 일본의 전후처리 외교와 한일회담>에서 발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정부는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고 국민들의 막연한 반일 정서에 매달려 지지율을 올려 보려는 포퓰리점적인 외교를 일삼았다. 1955년 한국 정부는 갑작스럽게 한국인의 일본 왕래와 일본을 상대로 한 모든 무역을 전면 중지한다고 선언했고, 1959년에도 일본이 재일교포들을 북한으로 보내는 것을 이유로 다시 대일 경제 단교 및 왕래 금지 선언을 발표했다.
그러나 당시 한국의 경제 분야 대부분이 일본을 상대로 하고 있던 현실에서 이는 너무나도 무책임하고 비현실적인 정책이었다. 자칫하면 한국 경제 전체가 파탄으로 치닫을 우려가 있었다. 그래서 한국 정부는 1955년의 대일 단교 선언을 불과 열흘 만에 취소했고, 일본의 재일교포 북송이 끝나자마자 한일회담을 재개한다고 제의를 해왔다. 이승만 정권은 대일 정책은 뚜렷한 원칙도 없이 오직 이승만 본인의 즉흥적인 감정에 맞춰 나가는 식이었다.
그래서 1959년 6월 16일, 일본에 거주하는 재일한국인 거류민단은 "이제와서는 자유당이나 한국의 현 정부를 믿거나 지지할 수 없다."라고 발표하기까지했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는 식으로 오락가락하는 이승만 정부의 외교 정책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 서중석의 <비극의 현대지도자: 그들은 민족주의자인가 반민족주의자인가>에서 발췌
1956년, 한국 농가들이 안고 있던 부채의 80%는 사채였으며, 대부분의 농민들이 연간 60% 이상의 높은 이자에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1957년의 조사에 의하면, 농민들의 절반이 하루 세 끼의 식사도 제대로 못 먹을 정도로 궁핍했다.
이런 현실에서 유일한 탈출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서울로 떠나 손에 잡히는 대로 막일이나 하는 것 밖에 없었다. 하지만 서울로 간다고 해서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운이 좋은 극소수를 제외한 절대 다수의 농민들을 기다리는 것은 불안한 일용직 노동자나 그것도 잡지 못해서 가난한 실업자로 사는 길 뿐이었다.
- 박진도의 <근대화 물결에 떠내려간 농촌>과 한국사연구회의 <우리는 지난 100년 동안 어떻게 살았을까?> 2권에서 발췌
1950년대, 한국의 경제적 궁핍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증거가 하나 있다. 1956년 6월 16일, 황태영에 의해 정식으로 문을 연 HLKZ-TV 방송국은 1년도 안 된 1957년 5월 6일, 문을 닫고 말았다.
당시 쌀 한 가마의 가격은 1만 8천환이었는데, TV 한 대의 가격은 무려 34만 환이었다. 이러니 TV를 살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황부영은 1년 간의 월부제 판매방식을 도입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TV를 사가는 소비자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광고수입도 거의 없었고 광고주도 제대로 구하지 못하던 HLKZ는 결국, 매달 5백만 환의 재정 적자를 이기지 못한 채 간판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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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을 참하라!>를 쓴 백지원 선생께 이 자리를 빌어 부탁드립니다.
조선을 가리켜 "백성들의 피눈물로 버텨 온 인간 지옥이었다."라고 책에 적으셨던데, 제가 보기에는 1950년대의 한국이야말로 그런 수식어가 잘 어울립니다.
혹시, 앞으로 내실 역사 서적에서 1950년대의 한국사를 다루실 때, 저 문구를 넣어주실 의향은 없으신지요?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여러분께 당부드립니다.
앞으로 누가 "1950년대가 살기 좋았다."느니 "이승만이 정치를 잘했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1. 거짓말쟁이거나 2. 사기꾼이거나 3. 이승만 정권 시절에 정부 기관과 결탁해서 부정부패로 살았음에 틀림없다고 보시면 될 듯합니다.
첫댓글 이랬으니 1950년대 말 북한이 남한 보기를, 마치 지금의 우리가 북한 보듯 하였다는 얘기가 있죠.ㅡㅡ;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이 정치를 잘했다는 얘기는 여전히 일부에서 나오고 있는 현실입니다. '국제' 정치 즉 외교 말이죠. "내치에는 등신이지만 외교는 귀신"이라는 유명한 말... 그게 '자주'였다고 생각되지도 않지만...
냉정하게 말하면 이승만의 외교는 "공갈과 허세, 뻥카"로 점철되었습니다. 문제는 그게 실속도 없으면서 피우는 고집이었다는 거죠.
아이젠하워 천조국 대통령 각하의 잠을 깨운 사건은 참으로 유명하죠. ㅋㅋㅋㅋ 아마 이것을 자주의 시발점으로 열렬히 외치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1955년에 일본과의 모든 무역을 중단한다고 폭탄 선언했다가 불과 열흘 만에 이걸 취소했을 정도로 이승만의 외교 정책은 줏대도 없고 원칙도 없고 오락가락했습니다. -_-;
이승만을 까고 오늘날의 경제발전을 찬양하는 박통을 띄워주는 글인가, 이승만을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학문적으로 비주류권이며 극소수에 불과하고 무시해도 그만인 것을, 오히려 독립군 이승만의 반일주의적 성향만 띄워주는 것이니 님의 의도와는 다르게 완전 당했군요. 음모론적으로 접근해서 6.25전시장 시설물에 횡포부리고 난리부리는 뒤에 사주하는 세력들이 보수계열이라면?... 괴벨스의 선전선동이 나날히 발전할 뿐이다
이승만에 대한 비판이 박정희에 대한 찬양과는 무슨 상관관계가 있나요? 그리고 동시대 '독립운동가'(독립운동의 '지도자'를 자처한 이승만이 일개 독립군이었던 적은 없음) 이승만이 '친일파'들을 정권에 기용한 것도 유명한 얘기지요. 무엇을 당한 것인지도 알 수 없을 뿐이고, 갑자기 괴벨스의 선전선동은 왜 나오는 것인지도 알 수 없을 뿐이고...
말을 두서있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무슨 소리인지 도무지 알 수 없군요. 제가 언제 박정희를 띄웠습니까? 그리고 이승만 욕하면 다 빨갱이인가요?
그리고 이승만을 긍정적으로 보는 자들이 학문적으로 비루쥬로 극소수에 불과하니까, 무시해도 된다고요? 당장 뉴라이트만 봐도 이승만을 열렬히 찬양하고, 한국 최대의 언론사인 조선일보에서는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라고 극찬했는데요? 뉴라이트나 조선일보가 비주류고 극소수니까 무시해도 되는 세력입니까? 명실공히 한국 주류 사회의 언론을 장악하고 있는 자들인데요?
<1950년대 국민들의 삶이 비참했다> 라는 결론에는 동의합니다만, 위에 제시된 글들 중에는 그 결론을 이끌어낼 만한 근거일까 싶은 이야기들도 섞여 있어서 몇 자 적습니다.
1. 대외의존도는 국민들의 삶이 비참했는지 여부와는 별개의 문제
대외의존도란 보통 국민소득에서 수입과 수출이 차지하는 비율을 말합니다. 이는 수출이 엄청나게 잘 되어 돈을 마구마구 벌어들이는 상황인 경우에도 대외의존도가 매우 높아지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대외의존도가 낮은 경제란, 수출과 수입이 거의 없이 내수만으로 돌아가는 경제라고 보시면 됩니다.
따라서 대외의존도 90%라는 것만으로는 그 시대가 비참했는지에 대한 근거가 되진 않습
니다. 참고로 2000~2007년 무렵의 우리나라 대외의존도는 80% 안팎에 있었고, 2008년의 경우에는 100% 를 넘겨(통계에 따라서는 90% 이상으로 보기도 함) 극도로 대외의존도가 높아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대외의존도가 높아지던 시기의 삶이 더 나빠진 것은 아닙니다.
외국의 예를 보더라도 2008년도 무렵 무역을 많이 하는 작은 규모 부국들은 대외의존도가 높은 경우가 많은데, 싱가폴(362%), 홍콩(348%), 벨기에(188%), 네덜란드(118%) 등이 그러했지요. 대외의존도가 낮은 경우는 잘 사는 나라라기보다는 주로 영토나 인구 등으로 인해 시장규모가 큰 나라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2. 수출입에서 대일 종속 수준이 높다(대일 무역의존도가 높다)는 것 역시 그 자체로서 국민들의 삶이 비참하다는 것과는 별개입니다. 1971년의 경우, 대일 무역종속은 약화되었지만 그 자리를 대신하여 대미 무역종속이 강화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전체 수출액의 50%, 전체 수입액의 30% 정도가 미국과의 교역에서 발생하였으니 위에 언급된 1958년 대일종속의 상황과 대략 비슷한 종속상황이라고 볼 수 있지요. 그러나 종속상황이 비슷하다 하여 1971년의 삶이 1958년의 삶과 비슷한 수준이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겁니다.
요컨대 대외의존도나 특정국가 무역의존도가 높다고 국민의 삶이 열악한 것도 아니고 반대로 낮다고 국민의 삶이 좋아
진다 말할 수 없습니다.
>.<님의 수준은 역시... 매번 감탄합니다 ㅋ
대외 의존도가 높다는 건 ...세계 경제 악재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하므로..경제 정책, 외교정책의 걸림돌로 작용하죠...
유럽의 작은 나라와 아시아의 작은 나라에선 어쩔 수 없이 대외의존도가 높다 하겠지만....대외의존도가 높은건 안정적인 경제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는데.또한, 안정적인 외교정책의 악재로 작용하는건 부인할 수가 없죠..
그리운길 님// 맞습니다. 대외의존도가 높으면 외부충격에 매우 취약해집니다. 특히 특정국가에 대한 의존도가 높으면 경제종속의 가능성까지 있지요. 그래서 대외의존도가 높은 게 무조건 바람직하다고 보진 않습니다.
이승만은 육이오때 튄것만으로도 지도자로서 실격입니다 하늘이시니 살아남아야 한다 ㅡㅡ? 물런 전시니 통께서 살아서 지휘를 해야겠죠 그러나 최소한 국민에게 알리고 도망갔어야죠 국민에게 거짓말하고 혼자간건 용서가 안되는거죠 그리고 옛날 티비보면 "이승만 할아버지 생신"이란 어이없는 방송도 했죠
글쓴이 말씀대로 한심한 사람입니다
하긴 독립운동 시절 때도 제대로 독립운동은 안하고 띵까띵가 놀았던 인간인데, 국정을 제대로 했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죠. ㅎㅎㅎ 정말 대통령이라고 부르기도 아까운 인물입니다.
임정 초대 대통령으로서 탄핵하는 사건이 있을 때 독립운동계열에서 그를 확실히 알았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그래도 워낙 유명한 인물이라서 그랬던지...
4. 개신교 목사들의 설교 들으면....이승만정권을 비호하죠...이승만정권이 개신교가 대한민국에 뿌리 내리고..확장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죠...
개신교 확장에는 이승만 보다는 박정희 정권의 공이 컸습니다. 이승만은 강제적으로 무엇인가를 하려고 시도는 했지만 별로 성공은 못했습니다. 박정희 정권시절 한국 개신교는 폭발적으로 늘어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