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일보
용대리 황태덕장
이우식
저들은 지금 한껏 목청 돋우고 있다
동해 푸른 목숨 비릿한 몸을 빌어
가슴 속 대못 지우며 뽑아내는 판소리
파도가 울어대고 폭풍이 내달리는 건
결코 환청이 아닌 누군가의 거친 숨결
본능의 아름다움이란 아, 바로 이것인가
벌떡 일어나서 성큼성큼 다가온
산이 불을 토하듯 단숨에 휘갈겨버린
그것은 저 이중섭의 ‘흰소’ 같지 않은가
서릿발 맺힌 매듭 한결 풀어 젖히고
언 몸 서로 부딪혀 뜨겁게 비비다가
벼랑 끝 붙잡은 손을 타악 놓은 그 장엄
* 1955년 평창 출생. 평창군청 근무
■ 경남신문
내소사 설화
이은정
내소사엔 아직도 꽃봉오리 맺혀 있다
꽃살문 사이사이 천여 일이 맺혀있다
바래고 지워진 세월 결 따라 맺혀 있다
사미승 두고 간 마음 한쪽 들여다보면
아득하고 아득하여 목탁소리 처연하다
몇 번의 업을 닦아야 꽃봉오리 피어날까
내소천 가로 질러 살아나는 시간들
물이 되고 흙이 된 사람들을 잊지 못해
천년의 대웅보전 곁에 꿈결처럼 맺혀 있다
* 1976년 마산 출생. 창원전문대 문헌정보과 졸업. 변호사 이희용 법률사무소 근무
■ 농민신문
휴대폰
서정택
기약에서 멀어질까 시시로 하늘창 열고
소슬한 목청 걸어 임에게 보냅니다
목련꽃 도드라지며 향 올리는 사월이면
생전에 못 다한 말씀 무슨 생각 그리 깊어
매냥 어루던 항아리에 젖은 꽃잎 띄웁니까
김장파 실뿌리보다 짜고 매운 눈물 꽃
당신의 등 뒤에는 다 큰 눈이 있습니다
진동처럼 흔들일 때 함께 움찔하면서
긴 세월 종지에 담긴 겨자 찍던 눈입니다
아버지 내 아버지 버들잎 같은 내 아버지
여린 가지 죄다 꺾어 이 몸에게 내리소서
깍지 낀 손가락 풀어 사다리 엮어 드릴게요
1962년 경기 오산 출생. 2004 《시조월드》 신인상 당선. 나래시조시인협회 회원. 현 한일농원 근무
■ 동아일보
화첩기행
김종훈
오종종한 징검돌이 샛강 건너는 배경으로
미루나무 두엇 벗 삼아 길나서는 물줄기와
기슭에 물수제비 뜨는 아이들도 그려 넣는다
여릴 대로 여리더니 어깨 맞댄 물길들이
한 줌 달빛에도 울렁이던 맑은 서정을 삼키고
여울은 화폭을 휘적이며 세차게 뒤척인다
구도마저 바꿀 기세로 홰를 치며 내달리다
분냄새 이겨 바른 도회지 그 풍광에서
노을빛 그리움에 젖어 물비늘 종일 눕는다
어느새 귓가 허연 강가 풀빛 아이 불러내며
캔버스를 수놓던 현란한 물빛 지운 채
꿈꾸던 역류를 접고 강은 고요 속으로 흐른다
1959년 경남 고성 출생. 진주교대 교육대학원 졸업. 현,울산 신정초등학교 교사
■ 국제신문
화첩 기행
김종훈
폭포 소리 휘몰아친다
강하고 화려하게
절창의 한 대목을 풀어놓은 가을 캔버스
제 노래 겨워 겨워서 산과 산이 자지러진다
굿판은 끝이 났다
주연은 이미 가고
추임새로 덧칠하던 꾼들마저 하나 둘 떠나
늦은 밤 불꺼진 무대, 시나브로 무너진다
뉘우침이 밀려온다
섣달 초입 그 한기처럼
버릴 거 다 버리고 구원하듯 팔 벌린 나무
나이테 또 하나 그리며 속절없이 여위어간다
이제 붓을 놓으려나
다독이는 침묵의 말들
화폭마다 다복다복 여백을 채워 넣고
순백의 적요 속으로 풍경들이 걸어간다
■ 매일신문
주남 저수지
이화우
한기가 엄습하는 주남지의 겨울은
보냄이 두려운지 제 몸까지 얼어붙어
조그만 흔들림에도 파열음을 내보인다.
지상에 매인시간, 속절없이 풀리고
붙박인 삶을 거듭 강요하는 갈대들
시린 손 하얗게 닿아도 거둘 줄을 모른다.
묵묵히 떠날 때를 기다리는 새들은
습관처럼 부리로 물속을 더듬지만
채우면 채운만큼의 헛배도 불러온다.
묻어나는 그리움, 별빛에 길을 두고
귀향을 서두르는 부산한 마음 있어
어둠에 눈은 더 커져 그 빛까지 삼킨다.
1965년 경주 출생. 영남대 국문과 졸업. 초록숲, 울산공단문학동인. 현대자동차 근무
■ 부산일보
겨울, 새벽 일터
김진길
외투깃 절로 서는 대한절 이른 아침
밤새 지친 가로등이 어둠을 배웅하고
발갛게 얼음 든 귓불. 목도리를 후빈다
장작불 익어가는 공사장 한 모퉁이
곁불 쬐는 인부들의 웅숭그린 어깨 위로
허어연 입김 모가며 안부를 건네고
아직 어스름한 언 땅 위의 그림자들
잉걸불 환한 온기로 가슴마저 녹여내며
묵직한 삶의 봇짐을 한 덩이씩 부린다
알큰하니 몸 데워야 하루가 거든하다고
바람 숭숭 든 찌개에 소주 한잔 곁들이는
한 평생 노역의 훈장이 새벽달에 빛난다
* 1969년 강원도 영월 출생. 육군3사관학교. 대전대 행정대학원 졸. 2003 《시조문학》 신인상. 현재
육본정훈공보실 근무
■ 조선일보 신춘문예
주산지 물빛
조성문
청송 땅 샛별 품은 갈맷빛 외진 못물 갓밝이 저뭇한 숲 휘감아 도는 골짝만 된비알 뼈마디 꺾는 물소리 가득하다
호반새 울음 뒤에 퍼지는 새벽 물안개 실오리 감긴 어둠도 한 올씩 풀어내고 삭은 살 연기가 되고 재 되는 저 춤사위
사는 일 짐 부려놓고 제 거울 들여다보는 고요도 버거운 이 차갑게 돌아앉고 못 속에 누운 왕버들 퉁퉁 부은 발이 시리다
숨 돌릴 겨를 없이 짙붉게 타는 수달래 먹울음 되재우고 저마다 갈길 여는가 내 앞에 툭툭 튄 물살 쌍무지개 지른다
* 1965년 전남 함평 출생. 한국외국어대학교 한국어교육과 졸업. 민족시사관학교 회원. 현재 인항고등학교 교사
■ 중앙일보 중앙신인문학상
먼 길
문수영
먼지를 닦아내고 허전함 걷어내고 그림을 걸기 위해 벽에다 못을 칩니다
아무나 가 닿지 못할 허공인줄 모르고
버티는 벽 속엔 무엇이 숨어 있기에 번번이 내 마음 튕겨져 나오나요?
액자 속 망초꽃들은 우수수 지는데....
어쩌면 나 모르는 박쥐의 집이 있어 햇살에 눈이 부셔 창문을 닫은 걸까요
오늘도 몸 웅크리고 밤이 오길 기다리며
어둠 하나 보지 못한 그런 눈을 갖고서 날마다 겉모습만 꾸미고 살았으니
한 뼘도 안 되는 거리가 참 아득한 강입니다.
비지땀 흘리면서 내일은 산에 올라 내 안에 흐린 안개 죄다 풀어내고 싶습니다
발 뻗고 누웠던 집이 상처 위에 핀 꽃이라니!
* 1957년 경북 김천 출생. 1980년 동덕여대 국문과 졸업. 2003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에 시 추천. 고려대 인문정보대학원 재학중
■ 서울신문
국립중앙박물관
한분옥
투명한 유리집에 한 여인이 살고 있다
천년이 흘러간 뒤 다시 천년 반석에 놓여
꽃같은 싱싱한 웃음, 늘 그 자리에 바치고
세속 모든 언어들이 여기와 갈앉는다
풍경도 울지 않은 채, 감도는 작은 고요
해묵은 청동의 녹이 봄빛 파랗게 물들이고
가까이 다가서면 이웃집 아낙도 같은
어쩌면 옷깃 한번 스치고 간 머언 인연 같은
아니야, 나를 어루신 우리 어머니 손길 같은
실선 따라 흘러내린 빛나는 고운 눈썹
떨쳐낸 유혹하며 숨겨진 예감하며
살 에는 바람 소리도 춥지만은 않구나
* 1951년 경남 김해 출생. 부산교대 및 대학원졸. 울산대 행정학과 박사과정 수료. 《예술계》 신인상 수필 당선. 제7회 가람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