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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선의 방식 /이만섭
직선은 천성이 분명하다 바르고 기껍고
직선일수록 자신만만한 표정이다
이는 곧 정직한 내력을 지녔다 하겠는데
현악기의 줄처럼 그 힘을 팽창시켜 울리는 소리도
직선을 이루는 한 형식이다
나태하거나 느슨한 법 없이
망설이지 않고 배회하지 않으며
좋으면 좋다고 싫으면 싫다고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단순한 정직이다
밤하늘에 달이 차오를 때
지평선이 반듯하게 선을 긋고 열리는 일이나
별빛이 어둠 속을 뻗쳐와
여과 없이 눈빛과 마주치는 것도
직선의 또 다른 모습이다
가령, 빨랫줄에 바지랑대를 세우는 일은
직선의 힘을 얻어
허공을 가르며 쏘아대는 직사광선을
놓치지 않으려는 뜻이 담겨있다
그로 인하여 빨래는
마음 놓고 햇볕에 말릴 수 있을 것이다
바지랑대는 빨랫줄로 말미암고
빨랫줄은 바지랑대 때문에 더욱 올곧아지는
그 기꺼운 방식
- 2010 신춘문예 경향신문 당선 작 -
오래된 서가(書架) /이만섭
먼지 수북이 뒤집어쓴 채
케케묵은 책들의 색인번호를 다시 쓴다
빛바랜 표지를 뒤적일 때마다
세월에 짓눌린 활자들의 비명이
우르르 쏟아져 나온다
좀 먹은 자국에서는
볼모로 잡혀온 세월을 탓하듯 눈을 흘기고
오랫동안 방치된 까닭인지
사상도 사라진 무정부주의자처럼
주인의 명령에도 저항한다
손에 닿지 않은 그늘에 갇혀
풍장을 치르듯 적멸에 든 책들에
빛을 쏘이고 바람을 불어넣으려
부스럭부스럭 손끝에 올려보는 책장 소리
위편(韋編)*을 흉내 내는
내 위험한 독서
* 위편삼절
풍경의 소묘(素描) / 이만섭
한 하고 포근한 젖빛하늘
일광이 풍경을 흔연스레 비추는데
산이 강에 내려와 물을 베고 누워 있다
저렇듯 한가로운 날은 산도
물 곁에서 한 숨결 내리고 싶은 것일까,
거대한 몸집은 필시
일순간에 첨벙 하고 들여놓았을 터인데
물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표정은 숨죽인 듯 명징하다
바람은 어디서 불어올까,
물의 촉수들이 일제히 수런거리자
산이 재빠르게 물속을 빠져나간다
어느 쓸쓸한 저녁, 달이
강 가운데서 은밀히 노닐던 그 밤에도
물의 촉수들이 바람결에 수런거리자
달은 황급히 하늘로 돌아갔다
그때도 나는 깨달았다
고요는 풍경을 소묘하지만
중심을 잃으면 그리지 않는다는 것을,
박연폭(朴淵瀑)*을 베끼다 /이만섭
직하하는 물기둥은 전신이 비백(飛白)이다
어느 창공을 날다가 내려오는 천마의 흰 날개인가,
도끼로 빠갠 듯이 장엄하게 그어댄 붓질은
붓이 가지 않은 자리가 박연폭이라,
송도삼절에 두 인걸은 가고 홀로 남아
만고의 세월로 주야에 긋지 않으매
절륜한 사랑 찾아 쏟아지는 저 폭포,
동자를 뒤꼍에 두고 용소를 가리키는데
고매담(姑梅潭) 아래 자취 감춘 박(朴)선비를 찾는가,
넋 나간 듯 우러러보니 우레와 같은 물소리
귓전이 먹먹하다, 유성동(流聲洞)이 따로 없다,
*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
인왕제색도 (仁旺濟色圖)*를 보다 / 이만섭
산이 폐부 깊숙이 운무를 드리웠다.
견갑골 아래 반쯤 가린
비 갠 윤오월의 산색이 더욱 현묘하다.
필시 한바탕 소나기에 감흥이 일어
천만 년 적묵으로 정좌한 산의 자태가
농묵의 때를 얻은 것인가,
골마다 질탕치는 물소리에
金剛心으로 발원한 붓끝은
도끼날로 장작을 팬 듯,
싸리비로 마당을 쓸어내린 듯,
육신의 은거지에 음각을 하고
묵찰법(墨擦法)의 필의를 산골짜기에 秘藏하였다.
송림 사이로 드러난 山家의 지붕에도
촉촉하게 배어든 산기운은
낮게 내린 하늘을 이고
잿빛 궁륭(穹窿)을 머금었는데
老軀에 벗은 보이지 않고
비탈에서 마중하며 드는 처마는
차마 산제비라도 날아오를 듯 허공을 향해 뻗었다.
무심한 세월에도 굳건히 변치 않고
그대 정녕 자연으로 순명해 갈 때까지
이 한때, 인왕의 흰 산의 품에
묵적(墨跡)하자는 게 아닌가.
* 국보 216호 정선의 산수화
나무의 詩 / 이만섭
숲길을 지나다니면서도
나무 아래를 걸어다니면서도
여태껏 몰랐던 것이 있다
나무와 나무가 이루고 있는 간격이
한 편의 시라는 사실을,
나무는 서로 비켜 자라며 바람에 흔들려도
한결같이 나무만의 개성 있는 시를 쓰고 있다
멀리서나 지근거리에서나
가지마다 잎마다 팔을 벌려 관계하는 사이를
하나의 문장의 행간으로 마음 나누며
씨줄과 날줄로 짜여도
솔기마다 부딪힘이 없이 매듭짓는 피륙처럼
서로 물 스미듯 가지런히 닿아있다
관계로 놓인다는 것은
서로 사이에 조화로움을 갖는 것이다
나무와 나무가 그들 사이를
시처럼 조용히 보여주고 있다
달빛검투사 / 이만섭
직립의 나무를 빌러 검을 만들고
허공을 내리칠 제
노랗게 흘리는 피를 보았는가
그럼에도 비명 없는 달밤이 고요하다
그러니 주검이라고 할 리 없다
차라리 그윽해지는 까닭에
밤 풍경을 벤치처럼 뉘어놓는다거나
빨랫줄처럼 허공에 걸어놓는 일도
그 배후일 것이나
그가 이루고자 하는 꿈은
외롭거나 쓸쓸한 밤이
강물처럼 다스져지는 세상일 것이다
마침내 푸른 눈빛의 무사는
서편 산 등에 이르러
밤을 다스린 일망무제의 검을 들어
농익어 물컹해진 둥근 등을
스스로 베어버리고 떠나간다
봄밤의 달빛 소품들 / 이만섭
등 뒤에 푸른 별 무리 걸어놓고
휘영청 어둠을 밝혀 가부좌를 튼 화강암 너럭 마당, 고요가 벅차다
처마 끝 허공을 깎아 절벽으로 세워
남실남실 숨결 짓는 만조의 달빛바다
뜰의 꽃나무들 여린 새순 틔워 이슬 받아먹는데
두엄 가 늙은 고욤나무는 관음사 목어처럼 등 굽은 채 잠들었다
보드라운 비단 그물로 내린 호젓한 정적,
고단한 농기구들 쉬어 있는 헛청이며
어슴푸레 유폐된 뒷간 길에도
가뭇하게 번져 있는 적막감,
해묵은 대추나무 그림자도 담벼락에 기대서서
무료하다 못해 제 혼자 스무고개 내놓고
알아맞히면 안 잡아먹지
해진 옷깃 추스르며 부스스 부스스 몽달귀 분장을 하고
흙 속에 씨감자 파묻어놓고 비닐 덮어씌운
정지문 앞 텃밭이 유난히 새하얗다
손바닥만한 그리움조차도 견딜 수 없어
정처 없이 헤매고 싶은 봄밤,
장독대는 머리에 하얀 분진을 이고
음- 음- 그리움이란 이런 거라고 슬몃슬몃 귀띔해 주는데
잠든 창들이 일제히 불빛을 밝힌다
그리운 바오밥나무 / 이만섭
날씨가 추워진 탓일까,
세한도(歲寒圖)를 다시 본다
사람의 마음에 내린 나무의 뿌리를 읽는다
그리고 바오밥나무를 생각한다
나무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그때까지 그 아름드리나무를
나는 건성으로 보고 살아온 것이다
그가 생의 서쪽 부루 마운틴 계곡으로 자취를 감추고 나서
가시권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내 가슴의 헛헛함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길을 가다가도 나무가 그리울 때면
먼발치를 향해 고개를 들어
하늘에 닿을 듯 직립으로 서 있던 자리를 바라본다
그러다가 정작 소나기라도 만나면
천 년도 더 묵은 나무속으로 피신한다
넉넉한 품에서 비가 갤 때까지
쉼터인 양 시간을 허락받으면
밖은 높새가 이는 지 천둥이 치는 지
알 수 없이 아늑했다
가끔 일상의 저물녘이 쓸쓸할 때도
행여 나무의 긴 그림자가 어디선가 비춰올까 봐
사뭇 문밖을 내다보았다
그럴 때 가슴에 어리는 나무는
가슴이 안는 아름보다 더 크고 넓었다
바오밥나무가 그립다
물수제비 띄우는 법 / 이만섭
강가에 가면
나도 모르게 강물에 젖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 잠자코 강물을 바라만 보라
물 쪽을 향해 누군가를 부른다거나
손짓 하는 일은 가급적 삼가라
그것은 유유히 흐르는 물흐름을 거스르는 행위이다
조약돌 하나 손에 쥐고
뜨개질로 그리움에게 건너가기 위함이라면
벌판의 허수아비 새 쫓듯
훠어이 훠어이 내달릴 것이 아니라
그 마음 깊이로 가다듬어
강물이 저녁노을에 들 때까지 기다려 보라
곰살거리는 물결 잦아지고
강물이 조약돌 하나 던져주길 바랄 때
수계 위까지 낮아진 몸
강물과 몸의 각도에 시선을 두고
한껏 던져 물 위에 놓는 노둣돌
징검징검 건너 가는 그대의 팔매질은
어디까지 뻗어 갈 것인가
그리움도 마음길인데
조약돌 하나인들 강물에 던지는 일이
어디 예사로워서 쓰겠는가,
생의 저녁에 깃드는 불빛은 /이만섭
가끔은, 아주 가끔은
생의 저녁이
일상의 것보다 더 극명했으면 좋겠어
노을이라면 화염처럼 붉게
서녘 하늘을 태우는
매우 극사실적인 채색이면 더욱 좋겠어
하루가 지났다고
할 수 없이 오는 저녁이 아닌,
네모난 창에 갇혀
겨우 천정에 매달린 알전구나 켜는
이기적인 저녁이 아닌,
주렴 같은 어둠을 헤집고 뜨는
밤하늘의 별처럼
어둠으로부터 호명되듯이 깃드는,
그런 저녁은 생각만 해도
자분자분 웅숭깊다
비의 독서법 / 이만섭
비는 책을 통권으로 읽어내는 습성이 있다
그 집중력 하나만큼은 유별나다 하겠는데
이는 햇빛의 묵독법과는 사뭇 다르다
가령, 뙤약볕이 자글거리는 날 풀숲에 가 보면
방아깨비나 노린재 따위의 풀벌레들이
함께 책을 읽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주변은 독서실처럼 정숙하다
한 글자의 오독도 허용치 않을 듯
행간마다 투명하게 읽어내는 모습은 말 그대로 박이정이다
곁에 어린 풀여치가 더듬이를 세우고
풀잎의 행간을 짚어가면서 따라 읽는 것을
자세히 보니 햇빛이 읽어주는 것이다
그러나 비는 그런 온유한 탐독법이 아니다
처음부터 제 감정을 속속 드러내며 호명하듯 낭독한다
이르테면 정이박의 형식을 띤다
그가 목울대를 세우고 읽는 파상음을 따라가 보면
책갈피의 어디쯤인가 스스로 발목까지 빠진 음울한 대목에서
어떤 이는 그것을 비켜가지 못하고 휩쓸려
그만 눈시울부터 젖어나는데
가슴까지 스며든 독해력이 그곳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꽃은 누가 피우는가 / 이만섭
꽃은 누가 피우는가
그늘에서 꽃대가 몰래 피우는가
담장을 넘어온 바람이 피우는가
보아라, 꽃을 누가 피우는가를
거기에는 생명의 손이 있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감춰진 손
침묵으로 살아가는 따뜻한 손이
꽃을 피우고 있다
골목시장 어귀에 종일토록 쪼그려 앉아
풀무를 돌리는 노인을 보았는가
굽은 손등으로 회전기 감싸쥐고 튀밥을 튄다
봄날 벚꽃이 함박웃음 짓고 뛰쳐나오듯이
바구니에 쏟아지는 저 하얀 튀밥들,
아이들은 엄마 등 뒤에 숨어 있다가
환호성으로 만개한 꽃들을 바라본다
꽃을 피어내는 것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그 생명이 지닌 마음을 아름답게 가꾸는 것이다
자루 속에서 나오는 튀밥 한 공기가
기쁨을 나누고 있다
노인의 손이 꽃을 피어내고 있다
낙엽 한 접시 / 이만섭
공원 벤치에 낙엽 한 접시
바람이 놓고 갔을까,
누군가 김밥을 먹고 간 스티로폼 접시에
막 떠나는 가을을 배달해 온 것이다
이미 바닥에 수북이 쌓인 낙엽들과
주변에 흩어진 몇몇 낱장들은
그냥 습관적인 낙엽일 뿐인데,
스티로폼 접시에 떠나는 가을을 모듬해놓은 것이다
네 잎 클로버가 책갈피에 놓일 때
추억이 되었듯이
벤치의 낙엽 한 접시가
엉거주춤 발길을 붙들어 놓고
늦가을의 맛을 내고 있다
가을산 / 이만섭
푸른 날들이 깊어지면
수목은 등걸에 이끼를 피워내고
이파리마다 紋章을 색인한다
추억이란 반드시 한곳으로 모이는 거라고,
그리하여 더욱 투명해진 그리움으로
가슴에도 산 하나 우뚝 세운다
그대, 꽃이 진다고 서러워하던 때가 있었던가.
뒤따라 나선 푸름도 어느덧
골짜기마다 산그늘 비켜 세우고
저리도 숨죽여 메말라가는데
다시 꽃 때를 찾아왔구나,
그대와 나의 거리가
혹여 붕새의 날갯짓만이 헤아린다 해도
추억 저편의 향기를 어찌 무심히 지나치리,
지느러미 같던 등뼈는 굳어갈지라도
가슴에 들끓던 열망의 아우성은
탁본처럼 종이의 배면을 물들고
유폐된 옛사랑의 오솔길을 열고 오느니
그대와 내가 간직한 그리움마저
먼산으로 머물 수 있겠는가.
실밥 / 이만섭
허름한 옷에서 밥 짓는 냄새가 솔솔 난다
한 몸 가리어 풍상을 견디다 보니
타개진 솔기 사이에서 앵돌아 나오는 밥,
기제사에 메를 짓고 내오듯
밥은 끈기 잃어 퍼석퍼석하다
그간 옷은 말 못할 거식증에 시달린 것일까,
육감적으로 부끄러운 표정이다
몸의 접경지대에서 오랜 세월 부지하며
어미의 탯줄 같은 실을 빌어 옷을 먹여 살리더니
이제 저렇게 고스레처럼 문 밖에 내놓는다
산목숨인들 밥 거두면 그만일 진데
아무리 옷인들 아니 그럴까,
세월마당에 낡아진 옷이
실밥을 지어놓고 도대체 후줄그레하다
팽이의 약전(略傳) / 이만섭
나는 팽이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팽이가 되었다
호된 채찍으로만 살아가는,
돌아버리고 싶은 날들을 지나
이젠 돌아야만 사는 날이 되었다
채찍은 사디즘을 낳고
사디즘은 존재를 낳고
존재는 환희를 낳고..
저 지칠 줄 모르는 살풀이는
소름끼치는 생의 법칙이다
수혈을 받아야 생명을 보전하는 환자처럼
자전을 잃어버린 몸은
채찍을 맞을 때마다
몸을 세상의 중심에 세운다
매번 어지럼증에 시달리면서도
매의 중독 앞에서
기꺼히 살아있다는 증거를 보여준
팽이가 되어버린 나는,
서 있는 나무 /이만섭
정면에서 보면 꿈쩍 않는 산이거나
아름으로 동여져 흐르는 강물이거나
강풍에 꺾인 가지 하나쯤은
훌쩍 눈물 서너 방울 독하게 묻어놓고 있던지
온몸으로 견뎌낸 생의 내력은
의연하다 못해 비장하다
그러나 측면에서 볼라치면
비바람이 훑고 간 서걱거린 자리마다
흔들림을 감당한 것들만 등지고 있다
이파리도, 가지도, 열매도,
그늘에 가린 노근의 물관조차도,
고요에 들면 모든 것을 다 잊고 마는 저녁은
가지 끝에 밤하늘의 달을 걸어놓고
운치 있는 수면에 드는 일은
강물이 달을 품고 있는 정경에 견줄만하다
그 깊은 심성을 헤아리자면
육신을 인두질 당한 인고의 세월에도
단 한 번도 불평을 드러내지 않았으니
관용과 화해의 배후에는
몸 안에 격정들을 해독해온 커다란 귀가 있다
그것은 더러 몸 밖에 옹이로 매듭을 지어 보이니
고향의 살구나무가 오랜 세월에도
무너진 흙담 곁에서
가지 꺾인 채 꿋꿋이 추억을 지키고 있으니
누가 어리석다고 할 것인가
직립의 그 견디는 힘을
바람의 무게 / 이만섭
바람이 허공에서 몸을 저울질한다
공중의 새들이 그러하듯이
좌우 날개로 평형을 유지하고
몸의 중력을 횡으로 두는 것이다
빠르면 빠를수록 더해지는 무게는
벌판을 지난다거나 강을 건널 때는
달음질하듯 몸을 잰다
나무가 흔들리고 물결이 이는 이유도
그 하중을 견디는 중이다
다른 비율은 허용치 않는 독식,
그것은 바람만이 지닌 무게다
그가 깃을 접을 때면
저울대 위 무게를 내리듯
허공은 비로소 바늘을 수직으로 세운다
밑줄 / 이만섭
어릴적 어머니는 햇빛 쨍쨍한 날은
마당에 든 햇살이 아깝다며
손수 빨랫줄을 쳐놓으시고
이불 홑청을 뜯어 냇가에 가서 빨았다
파초記 / 이만섭
볕 좋은 날
느티를 닮은 파초나무 큰 키 아래서
궁창을 바라본다
봄날을 빌려쓰는 나른함으로
푸른 저편, 꽃다지를 건너가는
솜사탕 같은 구름에 묻어가노라면
봄 꽃나무들 꽃등을 달던
三春의 가장 화사한 날이었던가
남행길에 들어
조치원에서 한 무리 새떼들의 영접을 받고
한밭 건너 금강에 발을 담그려 했던 심사는
남녘의 파초를 얻고자 했음이니
일월삼주가 따로 없었다
내 안에 씨감자 틔우듯
뜰이 무성하도록 잎잎이 푸른 동아리 지어
화경을 세우고 싶다
한철 눈부신 여름이고 싶다
파초여,
가만히,라는 말 /이만섭
저 말 애초부터 조신하다
여린 듯, 찬찬한 듯,
은근히 배어나
전체가 중심이며 전체가 가장자리다
자칫 깨어나기 쉬운 든 자리,
눈빛이나 몸짓보다도
마음이 먼저 살금스럽게 다가간다
철저히 묵인된 고요는
그 자체만으로 유유자적하다
칠월의 뙤약볕 아래
밍밍하게 익어가는 연못 같은,
그 위에 앉아있는 소금쟁이 같은,
그것 말고도
우리가 연애할 때,
사랑하는 사람 슬그머니 잡았던 손도
사실은 가만히, 있다.
청풍계*를 가다 / 이만섭
내가 명주바람과 마주한 것은 청계로 모전교 앞에서였다
뉘엿거리는 저녁 해 길이만큼이나
산그늘 따라 비스듬히 그가 쫓아왔던 것이다
아니다 아니다,
발아래 돌돌 거리는 내를 벗 삼다가 무심코 객을 맞던 것이었다
그때 나는 문우와 더불어 무슨 할 일이라도 찾고 있는 듯
해묶은 모과나무 아래를 해찰하고,
초파일 연등처럼 여유락락하게 듬성듬성 피어난 분홍 꽃들
봄 저녁을 화사하게 밝히는데
도끼날로 내려찍은 듯 서 있는 회색 빌딩 사이로
인왕골을 내려온 물살을 거슬러 나도 모르게 청풍계에 든 것이다
북악의 골짜기마다 노송을 입은 산자락
저 백악 아래 부벽준으로 붓질한 산수 간에
푸른 등걸로 날개 올린 삼림의 처마 끝
풍경 없이도 청음은 숲을 채우고
연둣빛 실버들도 재넘이 따라 춤을 춘다
이리오너라, 이리오너라,
원백 노인께 문안드리려 왔다
*정선의 진경 산수화
바람의 시선을 읽다 / 이만섭
그의 눈빛은 늘 열망에 차있다
머문 자리 따로 없고 비운 자리 따로 없는
어디론가 떠나지 않고선 못 배기는
야생마 같은 근성을 지녔다
그가 아늑한 골짜기나 구릉 아래 몸을 두지 않고
가파른 벼랑 끝이랄지
허공에 집을 짓고 사는 연유도
제 몸의 교활함을 믿기 때문이다
잎새에 햇빛이 내리쬐어도
어디선가 쥐눈이콩만한 눈동자로 지켜보고 있다
하지만 그의 자취를 면밀히 살피는 까닦은
나무의 꽃눈을 틔운다거나
그 꽃의 열매가 실한 가를 확인해보는 데 있다
정작 나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
언제나 그의 시선이 닿아 있다
나는 그의 시선을 건기로 읽지는 않는가
그를 곁눈질하지는 않는가
기차는 왜 직선인가/이만섭
기차가 풍경의 중심에 밑줄을 긋고 갈 때면 가시권에 든 추억들이 손을 흔든다 벌판의 바람은 얼마일 것이며 들풀 또한 수천수만 번 손을 흔들고 또 흔들었을 것이다 심지어 가시권 밖 무관한 것들도 추억이란 명분으로 찾아와 기차에 손을 흔들었던 것은 아닌지 그럴 때도 기차는 묵묵부답으로 떠나갔다 그래서 기차의 뒤태는 언제나 야속하다 못내 아쉬운 이별 앞에서도 직선을 가는 것만이 감당해야 할 몫인 듯 나는 새처럼 선회하여 돌아올 줄 모르니 기착지까지 연계된 선에 동승하는 마음이라면 그리움이 아니고 무엇일까 기다림의 끝에 오는 기차든 떠나간 기차든 밤하늘의 유성을 생각하면 더욱 분명해진다
나무의 내재율 / 이만섭
나무의 외관은 잎과 줄기 뿌리일테지만
좀 더 주의 깊게 살펴보면
전체가 3악장으로 된 시가형식을 띠고 있다
이를테면 이 세 부분이
한 문장이루며 생명의 서사를 쓴다
행길 가의 양버즘나무가 그렇고
산비탈의 떨기나무가 다르지 않는데
교목은 교목대로 관목은 관목대로
저마다 걸맞은 내재율을 담아
이파리는 햇빛 층에서
줄기는 바람 층에서
뿌리는 물관부에서
서로 광합성을 위한 화음을 키고 있다
이것은 꽃을 피우거나 열매를 맺기 위한
생명의식이 아닐까 싶은데
무릇 꽃이 아름답고 열매가 튼실함도
여기에서 나오는 듯싶다
어금니 /이만섭
어금니란 말, 가만히 우러내보면
어머니란 말과도 흡사하다
고루하게 나열해간 치아의 맨 뒤쪽에
어머니가 들어앉아 계시는 듯 하다
딱딱하고 질긴 내용물은 그곳에 와서 씹힌다
어릴 때 어머니는 그랬다
우리에게 질긴 음식을 넘겨줄 때
자근자근 살펴 당신이 먼저
부서뜨렸던 곳,
어머니는 삶의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도
그곳의 힘으로 버티며 살아오셨다
아마, 나를 낳으실 때도 어금니를 꽉 깨무셨으리라
이제 저 비워진 당신의 너울자리,
그루터기조차 뽑히셨으니
알사탕 하나도 그곳에서는 얼러내지 못하신다
생각하면 어룽어룽 눈물이 돋는다
가슴 산책 /이만섭
어쩌다 가슴에 들어와 보니
방들은 참 많기도 하구나
그래선지 저 생각에서 오는 것들은
쌓아둘 자리도 넉넉하구나
해 바른 방은 기쁨이 들고나며
창가에 꽃가지 걸어놓고
모퉁이에 그늘진 눅눅한 방
같은 방인데도 쓸쓸함이 꼼짝 않고 구들을 졌다
저곳엔 우울이 몇 번인가 기웃거렸으리
가둘 수 없는 바람 같은 것은
사랑채로 들어앉은 허파 쪽으로 보낸다 해도
슬픔이 뚜벅뚜벅 걸어들어와서
우물처럼 고여들 때
그런 때는 눈자위까지 퍼올려
눈물샘으로 흘려보내야 하리
명치 끝에 대문 하나 달아놓고
썰물이든 밀물이든 걸러내야 하리
갈대 /이만섭
강가에 가면 부르고 싶은 이름이 있다.
한 세월 외로움도 잊고 살았을,
그 외로움 위로해주고 싶어서
곁으로 가 가만히 자네라고 부르고 싶은,
창공을 가르며 날아온 청둥오리 떼
수초 사이에 깃들 때도
바람이 쏠리는 쪽으로 몸을 두어
새처럼 날개를 접었다.
그런 날들을 견디고 나면
헛헛해진 마음 부둥켜 안고
갈대도 가끔은 눈물을 삼켰을 것이다.
그도 한 번쯤은 강물 따라
멀리 흘러가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달밤이 오면
곁을 흐르는 강물을 누가 지키랴,
오랜 세월을 허공에 매달려
내색 없이 견뎌냈으니
외롭다는 생각도 아예 잊을 수밖에.
풍경이 길을 만든다 / 이만섭
굽은 길을 생각한다
당착에 빠진 길도 길이었다
협착과 구릉 사이를 지나서도
길은 언제나 풍경을 찾아다녔다
때로 아주 멀리
발길 닿지 않은 곳까지 가서
입때까지 감춘 모습을 찾아내고 풍경을 익힌다
발에 밟힌 들풀들도 누웠다가 일어나
자세를 가다듬는다
바람이 잦아드는 빈터의 길이나
산그늘 사이에 나있는 호젓한 산길이나
산, 내, 들, 강, 호수,
물가에서 갈대를 날리는 높새며
다 길의 행방에서 자취를 보인다
삶의 행여에 오른 길 저편
어디에도 변함없이 풍경은 기다린다
길에서 멀어질수록 삶은 아득해지고
길은 매번 그 사용법을 일러준다
풍경이 길을 만든다
잔설 /이만섭
겨울 패잔병들이 숨어든 삼나무 숲
군데군데 쫓겨간 발자국들이 어수선하다
나무들은 금세 내가 아군인 것을 알아차리고
골짜기 쪽으로 길을 터준다
동장군의 졸개들은 아직도 비탈 아래 매복해 있는 듯
능선에서나 부는 소소리바람 소리로 암호를 주고 받는데
무언가 등 뒤에서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
궁노루처럼 멈칫 놀란 나는
앗, 수류탄이다!
나도 모르게 몸을 지표면에 바짝 엎드린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데
사방이 쥐 죽은 듯 고요하다
슬그머니 일어나 툴툴 털고 경계에 드니
오리나무 삭정이 부러진 소리
부스스 나무의 각피가 유난히 허옇다
강물역에서 /이만섭
저녁강에 서면 / 이만섭
귀로의 뒷모습처럼
물들이 나작나작 엎드려 저녁강에 모여든다
노을 비낀 강 언덕의 갈대도
어둠을 맞느라 수런거린다
일광이 산화하는 짧은 시간에
강물은 저희끼리 저녁노을을 나누고
금비늘로 돋아낸 살갗을 서로 비비다가
밤의 적거지를 만들어
물결 위로 내리는 어둠을 이불처럼 끌어당긴다
하늘엔 별등이 하나 둘 켜지고
물로 흘러와서 물로 잠들어가는
저 포근한 평화,
이제 밤은
물의 고요를 위해 정적을 다스리고
바람도 더는 길을 트지 않을 것이며
하루 동안 저벅저벅 걸어온 몸을
깊고 아늑하게 두리라
내 마음도 강물의 수표면에 나직이 눕는다
가을은 편집중 / 이만섭
북창으로 햇살 비껴놓고
가을이 편집 중이다
날카로운 눈매에 까칠한 얼굴은
머릿단을 가느다랗게 말리며,
이 지난한 건기의 시나위는
갈대밭을 날아오른 한 무리 되새떼가
강 건너 하늘에다가 그물을 쳤다
자중지란에 시달리며
마침내 가을다운 가을을 위해
자칫 제 몸이 베일지도 모를
별신굿의 강신무나 타는 작두 날을 밟고
훠어이훠어이 쫓아서
날선 그리움이 무디어질 때까지
애끓는 열망을 색인하며
불온한 문자들을 지워간다
바야흐로 이 가을은 편집 중이다.
풀꽃 /이만섭
풀은 천성이 착해서
밤하늘의 별들을 모아다가 꽃을 피운다
풀잎만으로도
대지가 살아있다는 것을 보일진대,
길섶에 푸른 깃발을 꽂고
먼 길 가는 나그네를 배웅할 제면
몸에 별꽃을 피워 손을 흔든다
그럴 때면 바람도 이웃 되어
푸르게 푸르게 풀향기 흩날려주니
스르르 내리는 꿈속에
한 점 이슬로도 씨방을 짓고
계절이 다하면 순장하듯 대지에 드러눕는다
풀꽃이여,
꺾이지 않는 지조 하나로 살아가는
풀의 수명을 위로하고
마침내 뿌리에 생을 두던 마음이여,
내 곤궁한 삶의 기쁨이여,
누가 푸름을 조율하는가 / 이만섭
한 개의 현, 두 개의 현,
열두 개의 현, 혹은 스물네 개의 현,
그 배수가 집약되어
공명으로 번져 온 저 일색의 현현들,
알 수 없다
잎이 푸른 내력은 몸이 나무라는 것을,
광합성에 들기까지 햇빛은
창공에서 얼마나 부서져 내린 것일까,
실어 오고 실어 가고,
바람도 우듬지에서만 맴돈 것은 아닐 테지
밤사이에 소리 없이 일군 저 군락,
나무 아닌 삼림 없고
나무 아닌 터전 없고
터전을 바라보자니
가분수가 된 신록은 감당할 길이 없구나,
땅 기운 돋아 안개를 짓고
안개는 이슬을 짓고
이슬은 청명을 짓고
청명은 산수 간에 마음을 짓고
짓고 지어, 푸름 밖에서 성찬을 받자니
정녕 저 진경을 조율하는 자가
따로 있다는 말인가
당신의 목록 (目綠)
나의 노스텔지어는 이렇습니다
민음사 간 시집 <애너벨 . 리> 한 권,
그 19페이지에 담긴 당신의 미쁜 손길 위에
가만히 나의 손을 얹습니다
꽃 꽃 꽃잎이 흔들리듯 지금도 가슴이 떨리는군요
그때 당신은 도홧빛 얼굴로 다가왔고
나는 당신의 가슴 속 손거울을 살짝이 엿봅니다
거울은 반드시 사물의 정면을 비춰줍니다
그 무렵부터 초콜릿과 딤섬은 우리의 품목이었습니다
이것은 당신으로부터 작성한 첫 목록입니다
아, 깜빡 잊을 뻔했군요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건기의 사이프러스를 적시던 베를렌느의 비를,
비는 는개처럼 우리 사이를 흩뿌렸지요
촉촉해진 사월의 사과나무는 꽃눈을 틔우고
푸른 계절을 흰나방처럼 꿈꾸던 나
저녁이 오면 창가에서 장미를 위한 연가를 부릅니다.
사랑은 목록을 만드는 거라고 말했나요
그런 저녁은 밑줄을 그어 당신의 목록을 적습니다
추가, 또 추가, 목록에 등재되던 수많은 언어들,
먼바다로 가는 푸른 기차는 언제쯤 오나요
당신과 나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그럴 때마다 계절의 약속은 더욱 묻습니다
기다림은 배낭처럼 꼬박꼬박 꾸려집니다
한 시절 가슴에 쓰여진 우리들의 시편들
당신, 이 여름 당신에 대한 나의 노스텔지어를 열고
나 이렇게 당신의 목록을 읽습니다
가랑잎 변주 /이만섭
가겠다고 벼르는 것일까,
바람 비낀 난간에 번지점프라도 할 듯
불붙으면 이내
화르르 타버릴 것만 같은데,
메마른 가슴 다독이며
허공을 엿보는 가을나무
아차, 하는 사이
바람에 추락하지 않게
사뿐히 날려보낼 채비를 서두르며
가르랑가르랑
목젖이 아리도록 키는 저 변주,
소슬한 탄금(彈琴) / 이만섭
바람의 연주를 듣는 저녁
꽃등 같은 붉은 열매를 매단 마가목 활엽들이
수런수런 배경으로 서 있네
이파리마다 고스라져
어디서 현을 키는지 물을 수 없네
한때, 물오른 버들가지 희롱하고
하얀 배꽃 분분히 날리던 사연들은 다 잊었는데
쫓고 쫓기는 분주한 몸짓에서
여전히 드러나는 방랑 벽은
갈색 숨결로 묻어오는 마른 향기조차도
거칠게 다가올 때는
수수밭을 쓸고 둔덕의 억새꽃마저 흔드네
그리하여 어디에도 새 한 마리 날지 않는
허공으로 허공으로 내 마음을 이끄네
처음 들려주던 낮은 목소리는
G선의 음계처럼 지평에서 일었어도
아무도 듣는 이 없이 외로울 때면
야성의 아우성으로 벌판을 허허로이 난무했네
이제 서걱서걱 계절의 쓸쓸함을 노래하며
흩어지는 저 탄금 소리가
마침내 저녁길의 이정비처럼 나를 세우네
나뭇잎 하나에도 손수 현을 키는
저 악기 소리 소슬하네
주름의 문장 /이만섭
무엇을 바라볼 때, 그것이 빤히 보이는데도
감추고 있는 것이 더 크고 깊은 것이 있다
이를테면 나무의 껍질 같은 것이다
나무는 그 몸속에 나이테가 있다는 것을
표피에 덕지덕지 껍질로 씌워놓고 있다
그러니까 몸속에다 세월의 문장을 감춰놓고 있다
어디 나무뿐일까, 사람도 나이가 들면 들수록
길고 긴 세월의 문장을 몸속 깊은 곳에 쓴다
세상의 주름이란 주름은 다 이것의 얼굴이
이것은 사물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되겠는데
가령 어둠 속에서 빗발치는 양철지붕인들
그 가슴에 골판지 같은 문장을 쓰지 않고서야
어찌 밤새워 쏟아지는 빗소리를 감당해낼 수 있을까,
은행잎 지는 길 / 이만섭
은행잎 지는 길을 걷습니다
단 하나의 색깔로 물들어
노랗게 지는 잎,
이파리마다 어느 한 곳도 빼놓은 곳이 없습니다
바람은 열 마디 손가락을 다 펴들고
육성으로 흔들어댑니다
어서 가,
어서 가,
친정어머니가 딸을 보내듯,
저 환한 나무 아래인들
어찌 이별의 슬픔이야 없겠습니까,
애써 눈물을 감추고
보내는 가 봅니다
그래서, 떠난 이후
다시 그리워할 수 있음에
길 자체가 추억인가 봅니다.
비의 무늬를 보다 / 이만섭
수묵의 다섯 빛깔 가운데
맨 마지막에 번지는 농묵 같은,
잎새들 뒤란에 그늘을 짓고
스미고 스며
불빛 창에 귀를 여는 도화나무
봄날 어느 한때, 흙담 곁으로
자드락자드락 오선지의 선율을 밟고 와
나직이 귀엣말로 노래했는데
또다시 추억의 음표를 달고
잎새마다 그리움의 지문을 찍으며
젖은 불빛 사이로 발그레 드리운
투명한 비의 무늬를 본다.
환승, 군자역에서 / 이만섭
저녁 7시, 역사 안으로 들어오는 전동차가
한 마리 악어 같다
계단을 내려간 사람들,
마라강 언덕 아래 이르렀는가
한입에 먹어치우고 떠나버린 전동차
전동차에서 내려 계단을 오르는 사람들,
하루의 강을 건너와
생의 해방지대를 향해 앞다투는가,
쫓기는 누우떼처럼
굼실굼실 검푸른 등걸이 굽이친다
곳곳에 나붙어 안내하는 표지판
군자역인데,
그래, 말은 늘 그렇지 행위보다 점잖지
낙오하지 않기 위해 촘촘한 대열에 합류해 가는
나는 일개 群子일 뿐,
도시는 늘 분주함으로 진가를 확인한다
그리하여 군중은 광장을 만들고
광장의 중심에 꽂히는 깃발,
깃발이 나부끼는 쪽으로 이동하는 사람들이
한순간 강물처럼 보였다
석류 / 이만섭
혹여, 그리움을 가슴에 품되
그 열정 가슴만큼만
다독이지 못해 끝내 터져버린 붉은 속살은
감당할 길이 없구나
나는 환장이란 말이 무슨 뜻인고 했더니
저리도 미쳐 빠개져버린 가슴을 두고
이르는 말인 줄 차마 몰랐다
파적도(破寂圖)를 보다 / 이만섭
적요의 한낮이 황급하다
복사꽃 만개한 뜨락에
화들짝 고요를 깨뜨리고 달아나는
검은 고양이의 눈빛,
봄이라야 오는 봄으로 치자면
저 혼비백산에도
버선발로 쫓아가는 노구의 몸은
한갓 꽃이 피는 줄만 알았겠지
바람이 아니어도
철없이 우듬지를 꺾고 가는
어처구니없이 속는 봄날이 야속하다
쩌억, 대를 가르듯
한바탕 파적으로 깨어나는 봄은
어찌 그르침만일까,
감나무 상형문자 / 이만섭
뜰앞 나무가 아침 창문에 상형문자를 쓴다
먼동을 비켜 온 햇살로
써놓은 글자는 말간 수묵색이다
나무는 아침마다 그의 문장을 쓰고 간다
잎이 무성할 때는
참새떼도 날아와 지저귈 수 있는
산뜻한 소전체(小篆體)를 쓰고
잎이 헐벗을 때는삭은 옹이에도 근골의 손길 내려
강건한 대전체(大篆體)를 쓴다
그의 조형언어는 사철 내내 몸을 베낀다
그러나 감꽃이 필 때만은
유난히 그때만은
행간마다 비백(飛白)을 날려
향기라도 베어 문듯 가뿐하다
나무도 문자로 성정(性情)을 드러낸다
겨울 아침 감나무가
문자향 배인 상형문자을 써놓고
함박눈은 사륵사륵 나무의 문자를 타고 앉는다
안개꽃 연가/이만섭
그립다고 말하는 그리움은 그리움이 아니다
슬프다고 울먹이는 슬픔이
슬픔이 아니듯,
별빛 아래 밤새워 기도해본 적이 있는가,
그 밤을 건너와 이슬 젖은 아침
가만히, 정작 가만히 꽃등을 들고 서 있는
수채화 같은 너의 착하디 착한 가슴
그리움이여, 나직하고 나직하여라
너를 바라보다가 나는
끝내 이명의 뒤끝처럼 먹먹해진 귓불로 서 있다
그루터기 / 이만섭
나무는 죽어서도 풍장을 치른다
밑동이 잘린 채 뼛속 깊이 생의 이름을 쓴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무라는 말로서
그 이름을 대신한다면
굳이 죽었다고 말하는 것이 온당할까,
생을 움켜쥐고 수원지를 찾아 헤매던 뿌리는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땅속 깊이 박힌 채 몸의 중심부에서
여전히 무슨 소식이 오길 기다리는 것이나 아닐까,
베인 밑동은 깊은 고뇌에 들었다
살아 잎을 틔워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건만
수액을 나르던 등피는 잘려나가고
화살의 과녁처럼 나이테만 동그마니 남았다
그 표적에 앉아 세월의 출구 쪽으로 귀를 연다
똑, 똑, 석회암 동굴에서 종유석을 키우는 물방울 소리
오랜 세월 풍찬노숙으로 키운 얼마나 애써온 생인가,
생명을 지키던 가쁜 숨소리가
전류를 머금은 코일처럼 찌릿찌릿 감겨온다
생을 그리 내주고도 표정은 이처럼 담담할까,
누구나 삶의 단층을 들여다보면 그곳에
생이 지니고 온 지도가 혈류처럼 간직되어 있다
더 굵게 더 광활하게,
그러니까 생은 둥글기 위해 살았던 것이다
나무 한그루 자라서 베어질 때까지 평생토록
하늘을 향해 생명의 문장을 써온 것이 그 이유라면
이제 몸의 가장 낮은 자리에 중심을 내려
저렇게 나이테만 남기고 피안에 들었다
나무가 생의 이력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시(詩)를 말리다 / 이만섭
가을 볕에 시(詩)를 말린다
농부는 씨앗를 말리고
나는 가슴의 담낭에서 괴어나오는
낯선 언어들을 펼쳐놓고
눅눅한 시를 말린다
마악 나온 나의 시는 감정이 뜨겁다
모락모락 김을 피어내며
낯 모르는 물가의 아이처럼
자꾸만 달아나려 한다
그렇기에 아직은 기다려야 하는 습한 언어다
사유는 탯줄처럼 언어의 끈을 매달아
가을빛 앞에서 기다림에 들고있다
씨앗처럼 시가 말려지는 동안
창가에 이는 훈훈한 바람,
따사로운 햇빛에 튼실하게 말려간 시의 언어들이
마음의 도화지에 점차 모여들고 있다
그들의 자리를 찾아서
겨울 연밭에 가서 /이만섭
연꽃들이 다비식을 치른 새미원에 갔었네
두물머리 질펀한 강물 곁에
한 자취 그대로 인연을 짓고 떠난 자리
꽃의 뒤태가 나직나직 아른거리고 있었네
꽃은 강물을 안고 피었다가 떠났건만
질 때는 화엄으로 졌는가
폐곡선의 늪을 수놓은 헤일 수 없는 건조체
삭아 검불이 된 생의 경전을 이리저리 뒤적이다가
꽃의 지문을 해독하네
불립문자를 짓고 생명을 밀어올린 마른 꽃대
예불을 드리듯 조심스럽게 일으키는 손
찰랑, 강물이 손등을 씻어주네
인연이란 지은 곳에서 다하고
다한 곳에서 짓는 것인가
어느덧 내가 연꽃으로 환생하고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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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섭 시인: 전북 고창 출생
현 거주 : 경기도 하남시 창우동
2010년 신춘문예 경향신문 시 [ 직선의 방식]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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