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 이이는 따분한 성리학자가 아니었다!(백승종)
조광조는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으나, 수기치인에 관한 선비들의 논의는 사라지지 않았다. 세상에는 이미 뜻있는 선비들이 많아졌다. 특히 16세기 후반에는 조광조의 학맥을 계승한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등장하여 괄목할만한 업적을 달성했다. 이이는 수기치인에 관한 학문적 해명을 사실상 완성했다. 그의 『성학집요(聖學輯要)』는 하나의 기념탑이었다.
이이는 선조(재위 1567~1608)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그는 젊은 임금을 성의껏 보필하기 위해 2년 동안 성리학의 여러 경전에서 필요한 글을 발췌했다. 거기에 자신의 견해를 덧붙여 책자를 완성했다. 1575년(선조 7)의 일이었다.
『성학집요』는 『대학』을 뛰어넘은 제왕학 교재라고 볼 수 있다. 혹자는 이 책의 목차에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 등의 항목이 존재하지 않는 사실에 주목한다. 이이의 책에는 ‘수기(修己), 정가(正家), 위정(爲政), 도통(道統)’의 항목이 보인다. 이를 두고 조선의 임금은 일종의 제후였기 때문에, 평천하에 해당하는 사업이 불가능했다는 말도 한다. 얼핏 일리 있는 가설이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이이는 누구보다도 성리철학의 심오한 경지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자신감을 가지고 『대학』의 용어를 조금씩 변주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특히 마지막에 도통이란 항목을 설정했다. 이것은 성리학의 도(道)를 영구불변의 진리로 확신하고, 여러 성인(聖人)들을 통하여 이 도가 면면히 계승되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 책의 압권이다.
수기란 무엇인가. 이이는 뜻을 세우는 법부터 차근차근 설명했다. 이어서 세상의 이치를 배우는 법, 성실한 마음을 지키는 법,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마음을 넓히고 좋은 벗을 사귀면서 자신의 단점을 극복하는 법을 명확한 어조로 설명했다.
다음 단계는 정가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아내와 남편이 주관하는 일을 구별하는 것. 자식을 가르치고 친족을 대접하는 법도 일일이 서술했다. 수신의 내공이 가정생활에서 어떻게 실천되어야 할지를 검토한 것이다.
『성학집요』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일까. 입지(立志)를 중시한다는 점이다. 이이는 『격몽요결(擊蒙要訣)』, 곧 공부를 처음 시작한 청소년들을 위해 쓴 책에서도 입지를 무척 강조했다. 송나라의 주희는 성의와 정심이란 용어를 통해, 입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조선에서는 조광조, 조원기 등이 그 전통을 이어받았다. 이이는 그 점을 한층 더 강화한 것이다. 다음은 이이의 주장이다.
“배움에는 뜻을 세우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 뜻이 바로 서지 않고서도 공부를 이룬 경우는 아직 없었다. 그러므로 ‘몸을 닦는[修己]’ 조목에서는 ‘뜻을 세우는 일’이 가장 우선이다. 때문에 이를 제일 앞에 두었다.”
「정가」 편에서 이이는 근엄(謹嚴)을 강조했다. 과거에 조광조가 근독(謹獨)이라 하여, 홀로 있을 때를 삼간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이이는 부모를 섬길 때나 부부간에도 근엄함이 요구된다고 말했다. 자식을 가르치고 하인을 부리는 데도 선비는 언행을 삼가서,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 용납될 수 없다고 했다.
「위정(爲政)」 편은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이상 정치론이요, 다른 하나는 현실 정치론이었다. 전자의 중점은 덕치(德治)에 있다. 백성에 대한 배려와 사랑을 말한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이는 군신공치(君臣共治)에 방점을 찍었다. “좋은 조언이 정책에 구현되도록 한다. 임금이 자기 뜻을 버리고 신하들의 공론을 따라야 한다.” 그러면서 그는 순(舜)임금의 정치적 성공도 신하들의 의견을 존중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이는 황제 중심의 역대 중국 사회와는 멀찍이 거리를 두었다. 그의 사상은 임금과 신하가 함께 다스리는 공치를 강조한 정도전에 맞닿아 있었다.
윗사람(임금)이 자기의 뜻을 버리고 아랫사람들(신하)의 공론을 따라야 한다고 했다. 조선 선비들의 정치관을 이보다 더 잘 요약하기는 어렵다. 서양의 기사들에게서는 도저히 발견할 수 없는 특색이다. 그들은 주군(영주, 왕, 교회)의 명령에 절대복종하는 존재였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유교문화권에 속한다고 하지만, 일본의 사무라이도 주군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존재였다. 심지어 유교 문화의 본고장이라는 중국 사회에서도 신하들은 황제의 절대권력에 대항하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러나 조선 사회에서는 달랐다. 조선에서는 누구도 군신공치의 이념을 정면으로 비판하지 못했다.
현실정치의 난관을 뚫기 위해서 이이는 여러 가지 대책을 마련했다. 그는 단순 소박한 이상주의자가 아니었다. 정도전을 계승한 당대 최고의 경세가였다. 어떻게 하면 백성이 마음 편히 생업에 종사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 끝에, 이이는 세금도 적게, 부역도 가볍게 하라고 주장했다. 형벌을 삼가고, 나라의 쓰임새를 줄이고, 재물의 생산을 늘려 민생이 넉넉해지게 하자고 했다.
그런 점에서 이이는 국가의 기강을 세우는 일이 급선무라고 보았다. “정치에는 기강을 세우는 것이 첫째입니다. 기강은 국가의 원기(元氣)입니다. 기강이 서지 않으면 만사가 무너지고, 원기가 튼튼하지 않으면 온몸이 해이해집니다.” 또 이렇게도 주장했다. 기강이 무너지면, “혹시라도 사변이 일어나면 마치 오래된 흙담이 무너지듯 다 허물어지고 맙니다. 다시는 구제할 방법을 찾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선조는 이이의 고언(苦言)을 따르지 않았다. 그 결과는 어땠는가. 조선왕조는 임진왜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오랫동안 질서를 회복하지 못했다.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선조와 측근들은 개혁을 망설였다. 우유부단한 조정의 형세를 지켜보며, 이이의 심경은 더욱 난감해졌다. 그러나 안간힘을 내어, 그들에게 용기를 불어넣고자 했다. 그래서 이이는 이런 말도 했다.
“성왕의 정치는 책에 모두 진술되어 있습니다. 마치 규구(規矩: 컴퍼스 및 자)가 손에 있어 모난 물건과 둥근 물건을 그릴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처음에는 손에 익지 않을지언정 점차 익숙해질 것입니다. 어찌 왕도정치를 시행할 수 없다고 걱정하겠습니까?”
조선시대에 수기치인의 길을 밝힌 책으로, 이이의 『성학집요』를 뛰어넘는 책이 다시는 없었다. 그런데 이런 책이 있으면 무엇하겠는가? 마땅한 사람이 없어서 왕도정치는 끝내 제대로 구현되지 못했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출처: 백승종, <<신사와 선비>>(사우, 2018; 한굴출판문화산업진흥원 우수콘텐츠 선정)
사족: 우리는 “공치(共治)”의 이상을 오랫동안 가슴에 품었습니다.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보다 한걸음 앞서 한국이 민주주의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만든 귀중한 문화유산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공치의 바탕은 “공론”이지요.
그런데 오늘날 한국사회는 사적 이익을 공론처럼 꾸미는 사람들이 많아서 매우 혼란합니다. 개인의 탐욕과 소집단의 이익을 마치 정정당당한 여론처럼 위장하는 기득권층과 주요 매체의 거짓된 보도 때문에,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진퇴양난의 늪에 빠진 듯합니다. 이야말로 조선 후기사회의 발목을 잡은 고질병, 이른바 “당쟁”과 무슨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교양 시민의 역할이 참으로 중요한 때입니다. “깨시민”의 공론이 이 사회의 흐름을 결정하는 날이 어서 밝아오기를 바랍니다.
첫댓글 코로나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 외침이 들려옵니다. 거짓된 보도가 언제나 사라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