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몇분의 교우분들과 애기하면서 거의 희생적으로 봉사하시는 분들을
보게됩니다. 본당은 대도시에 비해서 경제적으로나 교통편으로나 아주 불편하고 열악한 환경입니다. 여기에 올라온 글들과 시진들이 다른분들이나 성지자료를 퍼올린글입니다. 어쩌면 우리들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일지도 모릅니다
제가 여기에 올리는 것은 이를 바라보는 우리들의 신앙고백과 신앙적인 생활변화를
각자 노트에 기록해 두시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파리외방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오면서 교우촌사람들에게 기록을 남기라고 애기를 했으며 이를 토대로 방인신부인 김대건,최양업 두분의 신부님이 주교에게 보고한 글을 통해서 불어로 파리에 보내졌으며 특히 최양업신부님에 의해서 라틴어로 번역되어서 교황청에 전해졌다고 알려져있습니다. 이를 근거로 탄생한것이 103위성인이신것입니다 아직도 황사영백서를 목숨걸고 전달하는 과정에서 순교하신 분과 한국전쟁중 순교하신분은 아직도 복자품에도 오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여기까지 저의 부족한 생각과 제가 김대건.최양업신부님의 편지글을 모은 책에서 본글입니다)
◎ 간략설명 : 학이 하늘로 올라가는 듯한 형상의 교우촌
◎ http://cafe.daum.net/jcccda
◎ 찾아가는 길 : [승용차] 중부내륙 고속도로 문경새재 IC에서 나와 901번 지방도로를 타고 문경읍을 지나 여우목 고개를 넘어 동로면사무소에서 59번 국도 단양 방면으로 좌회전하여 약 10km 가면 명전리가 나옵니다. 좌측의 명전교를 건너 명전 2리 노인회관에서 좌회전하여 계속 직진하면 명전 1리 경로당이 나옵니다. 이곳에서 도로 끝까지 계속 직진하면 건학 마을이 나옵니다.
경상북도 문경시 동로면 명전리 점터는 원래 예천군 동로면 지역으로 1895년 구한말 행정구역의 개편 때 문경군으로 편입되었다. 이 지역은 문경시의 최북단에 위치하여 충북 단양군 대강면과 재원군 덕산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사방이 높고 험준한 문숙봉(1162m), 황정산(959m), 대미산(1,115m) 천주봉(863m), 공덕산(912m) 등으로 둘러싸인 지극히 깊은 산중에 있다. 건학(乾鶴)이란 마을 이름도 마을 주위에 있는 산의 형상이 마치 학이 하늘로 올라가는 형상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처럼 깊고 험준한 심산궁곡에 언제부터 신자들이 살기 시작했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1801년 신유박해 전후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데 문헌상의 기록은 1827년 정해박해 때 바로 이웃 고을인 충청도 단양군 대강면 남천리의 가마기에 살던 순교 복자 박경화 바오로[朴甫祿, 1757-1827년) 가정이 건학의 이웃 마을인 상주 멍에목(현 문경시 동로면 명전리)으로 이주하여 왔다. 그러나 그해 4월 그믐경 그의 가족들은 상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상주 진영을 거쳐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여기서 한 승려와 교리에 대해 토론을 벌이기도 했던 그는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을 만큼 모진 형벌을 받아 그해 11월 15일(음력 9월 27일) 70세의 나이로 옥사했고, 아들인 박사의 안드레아(朴士儀, 1792-1839년)는 12년 동안 고통스러운 옥살이를 하다가 기해박해가 일어난 1839년 5월 26일(음력 4월 14일) 대구 관덕정에서 순교했다. 그뿐 아니라 병인박해가 시작된 1866년 1월 27일(음력 1865년 12월 11일) 이 마을에 살고 있던 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여우목 교우촌에 살던 성 이윤일 요한 회장의 아들인 이 시몬도 체포되어 공주 감영으로 이송된 후 옥중에서 교살되어 순교하였다.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이 마을에 살던 신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피난을 떠났다. 박해가 끝난 후에는 이 마을에 외교인인 김용락과 부럭이에서 이사 온 박종하 등이 살았으며 이들은 또한 1895년 민비시해 사건으로 일어나는 의병운동을 하게 되어 이곳은 의병운동의 본거지가 되어 왜병들과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그때까지 신자들은 이들의 보호를 받으면서 살다가 이 의병운동 때 마을을 떠났다고 한다. 현재는 김용락의 고손자인 김주형 가정 등 몇 가정이 고추, 담배 등 밭농사와 논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박경화 바오로와 박사의 안드레아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출처 : 안동교구 홈페이지,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4년 9월 1일)]
▶모바일용 요약 설명◀ 문경시 동로면 명전리 점터는 원래 예천군 동로면 지역으로 1895년 문경군으로 편입되었습니다. 이 지역은 문경시의 최북단에 위치하여 충북 단양군 대강면과 재원군 덕산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고, 사방이 높고 험준한 산으로 둘러싸인 깊은 산중에 있습니다. 건학(乾鶴)이란 마을 이름도 마을 주위에 있는 산의 형상이 마치 학이 하늘로 올라가는 형상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이 깊은 산중이 신자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1801년 신유박해 전후로 추정됩니다. 문헌상의 기록으로는 1827년 정해박해 때 이웃 고을인 충청도 단양의 가마기에 살던 복자 박경화 바오로 가정이 건학의 이웃 마을인 상주 멍에목(현 동로면 명전리)으로 이주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그해 4월 그의 가족들은 상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상주 진영을 거쳐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었고, 여기서 노령의 박경화는 옥사하고 아들인 복자 박사의 안드레아는 12년 동안 옥살이를 하다가 기해박해가 일어난 1839년 5월 대구 관덕정에서 순교했습니다.
병인박해가 시작된 1866년 1월 이 마을에 살고 있던 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여우목 교우촌에 살던 성 이윤일 요한 회장의 아들인 이 시몬이 체포되어 공주 감영으로 이송된 후 옥중에서 교살되어 순교했습니다. 병인박해의 여파로 이 마을에 살던 신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피난을 떠났고, 박해가 끝난 후에는 외교인들이 들어와서 살았습니다. 박경화 바오로와 박사의 안드레아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습니다.
배교자의 밀고로 순교자를 낸 문경시의 최북단 교우촌
■ 순례지 정보
◎ 소재지 : 경상북도 문경시 동로면 명전리 건학
◎ 교통편 : [승용차] 중부내륙고속도로 문경 새재IC에서 문경읍을 지나 여우목 고개를 넘어 동로면 소재지에서 단양 방면으로 약 10km가면 명전리가 나온다. 좌측에 명전교를 건너 명전2리 노인회관에서 좌측 길로 계속 진행하여 가면 문수봉 산행들머리인 건학마을 산행안내판과 이정표가 있는 공터에 도착하게 된다. 이곳이 건학 마을이다. 명전1리노인회관에서 건학마을까지는 6.6㎞이다.
문경시의 최북단에 위치하여 충북 단양군 대강면과 제천시 덕산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이곳에 건학 교우촌이 있었는데, 병인박해 때 배교자의 탐욕과 밀고로 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이 시몬이 순교하고 교우촌 마을에 살던 신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피난을 떠났다.
건학 교우촌이 있던 문경시 동로면 명전리 점터는 원래 예천군 동로면 지역으로 1895년 문경군으로 편입되었다. 건학(乾鶴)이란 마을 이름도 마을 주위에 있는 산의 형상이 마치 학이 하늘로 올라가는 형상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곳 주민들은 보통 거느기라 부르고 있다.
신자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박해 초기부터가 아닌가 생각된다. 산지를 개간하여 생계를 유지하였고 또한 옹기를 구었던 확실한 흔적을 찾아볼 수는 없으나 이들이 처음 살았던 곳을 점터라고 부르는 데서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곳에 처음 박해의 손길이 닿은 것은 아마 1827년 정해박해 때로 추측된다. 즉 기록에 의하면 순교자 박경화(관명 도항, 朴甫祿, 1757∼1827, 바오로)는 바로 이웃 고을인 충청도 단양군 대강면 남천리의 가매기에 살다가 상주 멍에목으로 이사하였다가 몇 주일 후에 체포되어 상주 진영을 거쳐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어 옥사했고, 아들인 박사의(朴士儀, 일명 사심, 1792∼1839, 안드레아)는 대구 관덕정에서 순교했다.
그런데 이 멍에목은 바로 건학 이웃의 자연 부락이며 현재 같은 동로면 명전리에 속한다. 그 후 1866년 병인박해 몇 달 전인 1865년 가을, 예천 고을에 살던 양반 계급의 냉담자인 황가는 품행이 고약하여 다른 도둑들과 짜고 여러 고을의 교우촌을 유린하였다. 교우들이 합심하여 퇴치하자 원한을 품고 포졸을 앞세워 월악산 밑 부럭이 마을의 존경받고 가사가 넉넉한 박 프란치스코 가정을 덮쳤다. 박 프란치스코는 미리 피신하여 잡히지 않았고, 그 마을에 사는 다른 신자들이 잡혀 갔다.
이때 잡혀 간 부녀자와 아이들을 구하고자 이 마을에 살고 있던 전 하비에르와 여우목[狐項里] 성 이윤일 요한 회장의 아들인 이 시몬이 이들을 뒤쫓다가 오히려 포졸들에게 잡혀 예천 관장에게 잡혀 갔다. 공주 감영으로 이송 후 관장은 곧 사형 선고를 내렸고 복잡한 절차와 지연을 피하기 위하여 옥중에서 교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곧 1865년 12월 10일경(음)에 두 순교자는 치명하니 전 하비에르는 나이 49세요, 이 시몬은 24세였다.
1866년 병인박해 전, 칼레(Calais, 姜, 1833~1884, 아돌프) 신부는 한실을 중심으로 부근의 건학, 부럭, 여우목, 사실 신자촌과 백화산 너머 충북 연풍 등지에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며 전교 활동을 하였다. 1865년 12월 1일(음)에는 부근의 건학 신자촌에 성사를 주러 갔을 때 마침 그 몇 주일 전에 순교한 전 하비에르의 부인과 아들이 미사에 참례하고 순교자를 위해서 미사를 청했다.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이 마을에 살던 신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피난을 떠났다.
■ 순교자
◆ 전 프란치스꼬 사베리오(1816∼1865)
전 프란치스꼬는 한국 천주교가 들어올 때부터 신앙을 받아들인 중인(中人) 집안의 구교우 가정으로 충청도 내포지방 출신이었다. 그의 부친은 오랫동안 회장직을 맡아 훌륭하게 교회에 봉사하였고 그도 부친의 뒤를 이어 회장이 되었다.
그는 충청도에서 살다가 칠곡 한티로 피난가서 살았으며 1860년 경신박해가 일어나자 대구 부근의 달비골(달서구 상인동)로 이사를 갔다가 다시 건학으로 이사하여 농사를 지으며 아내와 세 자녀와 더불어 조용히 살았다. 그리고 알려진 지식과 온화한 성격과 영혼들의 구원을 위한 열성으로 모든 사람들의 애정과 존경을 받았던 분이었다.
◆ 이 요한 시몬(1841∼1865)
이 요한은 여우목 회장인 이윤일 회장의 아들로 3대째 구교우 집안이며 고향은 충청도 내포지방이다. 중인(中人) 집안으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가정이며, 벌써 3명이 순교 월계관을 받은 순교자 가문의 사람이다.
그런데 그의 부친도 명망이 높은 분으로 몇 달 후인 1867년 1월(양)에 순교하여, 103위 성인이 되었다. 이 요한은 신자촌을 두루 다니며 신자들의 재산을 약탈하던 예천의 황가라는 사람에 의해 포졸에게 체포되어 관아로 끌려갔다가 공주 감사에게 압송되어 배교할 것을 강요당하였다. 그러나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으므로 옥중에서 교살 당하여 순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