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손숙)
배우 손숙
“밥 먹고 가거라” “밥 먹자” “밥 먹었니?”
어릴 적 내가 할머니, 엄마한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밥’이었던 것 같다. 유난히 몸이 약해서 집안 애물단지였던 나는 끼니 때마다 할머니, 엄마의 애를 태웠다. 그래서 나의 유일한 무기는 “밥 안 먹어!”였다. 뭔가 기분이 나쁘거나 갖고 싶은 것이 있거나 가족들의 관심을 끌어야 할 일이 생기면 나는 밥을 무기로 흥정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때는 그깟 밥이 왜 그렇게 중요한 건지 알지도 못했고 알 수도 없었다. 일제 수탈, 전쟁, 온갖 천재지변을 겪으면서 부모들의 지상 과제는 자식들을 안 굶기고 든든하게 밥을 먹이는 거였다. 논에 물 들어가는 것하고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것이 가장 행복했다.
밥숟가락 놓는 날이 세상 하직하는 날이다. 가족들 삼시 세끼 밥 먹이려고 새벽부터 일하러 간다. 세상의 가장 큰 행복은 가족들이 둘러앉아 밥 먹는 시간이다. 그래서 우리는 가족을 식구(食口)라고도 부른다. 우리 할머니는 “내 집에 오는 사람들에게 밥 한 그릇 먹이는 게 사람의 도리”라고 늘 말씀하셨다.
언젠가 프랑스 에비앙엘 갔다가 LPGA 골프대회를 우연히 본 적이 있다. 경기 전날 저녁, 어느 수퍼마켓에서 한국 선수의 어머니를 우연히 만났다. 딸의 컨디션이 영 회복되지 않아 밥을 찾는다면서 쌀을 사기 위해 시내를 헤매고 있었다. 아주 조그만 소도시여서 쌀 사기가 쉽지 않았던 것 같다. “따뜻한 밥 한 그릇만 먹이면 아이가 기운이 날 것 같은데….” 하면서 안타까워하는 그 어머니를 보면서 나는 한국 사람한테 밥은 생명이란 걸 새삼 느꼈다. 동시에 나의 어머니가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돌아가시기 직전 병원에 누워계신 어머니를 뵈러 갔는데 날 보시자마자 첫 마디가 “밥은 먹고 다니냐?”였다. 내게, 아니 이 땅의 모든 자식들에게 밥은 바로 어머니다. 그리고 국력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모든 부모님들은 자식들에게 삼시 세끼 밥을 먹이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계실 거다. 우리는 하루에 도대체 밥이라는 말을 몇 번이나 하면서 살고 있는 걸까. ‘밥 먹었니?’ ‘언제 밥 먹자’ ‘요새 밥맛이 없어서’….
첫댓글 밥은 묵고 댕기냐..참 따뜻한 한 마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