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 ‘습지주의자’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나뉘었습니다. 아주 좋다고 하시는 분도 계셨고, 별로라는 분도 계셨습니다. 저는 읽는 내내 별로였다, 좋았다, 아니 별로다, 아니 좋다, 는 느낌이 반복되었습니다. 좋았던 점은 수필처럼 쉽게 잘 읽힌다는 것과 저자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지나치게 솔직해서 책을 읽는 내내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책을 읽을 수 있었던 점이었고, 별로였던 점은 이 책을 펼치며 기대했던 습지에 대한 생태학적 해석이 나의 기대치에 미치지 못한다는 점이었습니다. 하긴 그건 이 책의 문제가 아니라, 내 맘에 맞는 뭔가가 딱 나타나야만 마음이 열리는 자기 중심적인 독자의 문제겠지요. 미팅 나갔을 때 첫인상이 별로라서 연락을 안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엄청난 퀸가였더라, 는 안타까운 사연처럼 제가 책의 진가를 잘 몰라봤을 수도 있고요. 그래도 다행히 임책방의 방장이신 임영근 님이 이 책에 나온 습지의 의미에 대해 아래와 같은 글을 써 주셨네요. 아래 글을 읽으며 습지주의, 즉 습지에 대한 ‘이념’을 잘 읽어내지 못했던 저를 반성하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다음 책은 아트 슈피겔만의 쥐(Maus)입니다. 유태인 수용소에 갇혀 죽을 뻔한 아버지의 이야기를 담은 책인데, 무려 만화책입니다. 날짜는 6/24(토) 오후 4시입니다. 장소는 사과나무치과 8층일 수도 있고, 날씨가 좋으면 마당이 있는 정원에서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열심히 책을 읽어 오십시오.
반 습지주의자의 고백
임영근
내가 반反 습지주의자, 안티 습지주의자인줄 까맣게 몰랐다. 김산하의 《습지주의자》를 펼치기 전에는. “촉촉한 것”은 피부에게나 양보해야 하고, 뽀송뽀송함을 최고의 편안함으로 여기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 얼마나 눅눅한지를 재서 불쾌의 정도를 측정하는 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 말하자면, 거대한 반 습지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도 이 책을 읽으며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어렸을 때 살던 성산포는 민물이 귀한 곳이었다. 제주도 전체가 현무암 덩어리라 비가 오더라도 물이 금방 땅 속으로 스며들어버린다. 특히나 섬이나 다름없이, 육지와 가느다란 길로 연결된 성산포에서는 민물이 정말 귀했다. 개천이나 시내는 말할 것도 없고 물웅덩이도 구경한 기억이 별로 없다.
집 바로 옆이 오정개 바닷가라 그곳에서 자주 놀았는데, 바닷가에 높은 절벽이 솟아 있었다. 절벽 색깔이 온통 붉은 색이었다. 가까이 가 보면 붉은 색으로 보이는 것은 찰흙처럼 끈적거리는 흙이었다. 학교 미술 시간에 필요한 찰흙을 굳이 살 필요가 없었다. 나무 막대기 따위로 슬슬 긁어 가면 훌륭한 찰흙을 얻을 수 있었다. 준비물 사는 것도 부담스럽던 시절, 돈 안들이고 자신 있게 가져갈 수 있는 시간, “찰흙 가져와”하는 시간을 은근히 기다리는 친구들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정말이지 하기 어려운 과제도 있었다. 개구리 알이나 올챙이 잡아오기. 물웅덩이조차 없는 곳이라서, 올챙이를 도저히 찾아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런 사정을 선생님도 알고 계셨는지, 준비물에 대해 별 말 없이 넘어가셨다.
그런데 놀랍게도 올챙이를 실제로 가져온 친구가 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캐물었더니 오정개에서 부두로 가는 길에 있는 용당벌에서 잡았다고 했다. 용당벌이 집에서 멀어 자주 다녀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몇 번 간 적이 있었다. 하지만 용당벌에 올챙이가 살 만한 연못이나 웅덩이를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친구의 말을 듣고 다시 한 번 용달벌을 가보았지만, 웅덩이 비슷한 것도 보지 못했다.
처음에 성산포에 이사 갔을 무렵, 오정개 바닷가 언덕에서 반딧불이 무리를 본 적이 있다. 노오란 불빛이 여름밤을 온통 밝히는 환상적인 경험이었다. 성산포에서 반딧불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 많은 반딧불이는 어디서 왔으며, 또 왜 갑자기 사라져 버린 것일까? 어린 시절부터 내내 의문을 품던 문제였다.
얼마 전, 친구들과 함께 신영복 선생의 《담론》을 읽었다. 노자를 해설하는 장에서는 주로 상선약수上善若水를 중심 화두로 삼았다. 《도덕경》8장에 나오는 내용인데,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물처럼 사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삶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도움을 줄 뿐, 다투거나 이기려 하지 않고
사람들이 꺼려하는 낮은 곳에 머물기에
도道와 가깝습니다.
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
다투지 않고 나아가는 물의 속성을 빗대어 물처럼 아름다운 삶의 모습을 노래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꺼려하는 낮은 곳”에 머물려 하는 물의 속성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있는 듯하다. 신영복 선생은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을 궁극적으로는 ‘바다’로 해석하고, 민초의 정치학을 말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다른 노자 해설에서도 거의 비슷한 해석이다. 계곡에서 비롯한 물이 강을 이루고 바다로 흘러가는 이미지로 상선약수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런데, 《습지주의자》를 읽어보니 노자가 말한 “사람들이 꺼려하는 낮은 곳”은 습지로 보는 것이 더 잘 맞아 떨어지는 것 같다. 읍습하다는 말처럼 습지는 음산하고 눅눅하여 사람들이 꺼리는 곳이다. 우리 동양 사람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슬픔의 늪’처럼 빠지고 싶지 않은 곳, 헤어 나오기 위해 발버둥쳐야 하는 곳이다. 책에서 언급한 swamp thing처럼, “늪에서 나온 머시기”, 즉“일종의 괴물을 뜻하는데 얼마나 괴상하고 이상하면 괴물이라는 칭호마저 불허하고 그냥 어떤 것thing으로 표현”하겠는가? 그 정도로 습지와 관련된 대중의 이미지는 더 나빠질 수 없을 정도로 바닥을 치고 있다.
하지만 “생명을 잉태하고 발생시키는”습지는 끊임없이 재창조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풍부한 물과 영양분 덕분에 그 만큼 생명 활동이 왕성하고, 그렇게 비옥한 만큼 생명체의 다양성이 낮아지는 역설이 생겨나는 곳이라고 김산하는 말한다. 영양분이 많을수록 소수의 우점종이 지배하기 때문이다. 이런 비옥한 곳에 비해, 열악한 습지에서는 식충식물이라는 특별한 종이 생겨나기도 했다. 필수요소인“인과 질소를 일반적인 흙에서처럼 찾을 수 없어”곤충을 먹게 되었다는 신기한 이야기이다.
열악한 곳은 열악한 대로, 풍성한 곳은 풍성한 대로 끝없는 생명 활동이 이루어지는 가장 낮은 곳, 사람들이 지독히도 꺼려하는 곳, 습지. 노자가 말하는 “사람들이 꺼려하는 낮은 곳”은 앞으로 습지로 해석하고 싶다.
반딧불이 애벌레는 다슬기를 먹이로 수중생활을 하면서 자란다고 한다. 그렇다면 용당벌 어딘가에도 분명 습지가 있었을 것이다. 비가 오면 생겨났다가 말라버리는 곳일 수도 있고, 식물들에 가려 겨우 존재하며 눈에 띄지 않는 습지였을 수도 있다. 아무튼 그곳에서 다슬기가 자라고 올챙이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아이가 걸음마를 떼고 제법 잘 걸어다닐 때, 자주 산책을 다니곤 했다. 비라도 오고 난 뒤면, 곳곳에 작은 웅덩이가 생겨났다. 웅덩이가 보이면 아이가 환한 표정을 지으며 웅덩이로 다가갔다. 오른 발을 들고 웅덩이에 철썩. 물이 찰지게 발을 감싼다. 다시 한 번, 철썩. 철썩거리는 소리가 끝나지 않고, 물웅덩이를 신난 듯 바로 보는 아이의 표정. 그렇게 신발과 옷자락이 젖어도 철썩, 철썩.
그러던 아이는 벌써 자라 청년이 되었다. 질척거리는 것이면 무엇이든 몹시도 질색하는 청년이. 철썩거리던 어린 시절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다. 혹시라도 이 청년이 연애를 하게 되고, 결혼하여 아이라도 낳게 된다면. 고인 물을 보고 환한 표정으로 달려가는 아이를 바라보며, 고인 물을 철썩거리던 어린 시절의 모습을 떠올리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내일은 친구들과 대화천 나들이를 할 계획이다. 가까이 있는 곳이건만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번 나들이에서는 몸도 마음도 축축히 스며들어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