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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장손(長孫)’이라는 단어는 특별한 의미가 덧붙여진 것처럼 여겨졌다. 많은 자식들 가운데 장손이라는 위치가 지워지면, 자신과 한 가족만이 아닌 한 가문을 책임져야만 했기 때문이다. 실제의 권한 여부와 상관없이, 장손에게는 한 가문의 진로를 결정하는 임무가 부여되어 있었다. 물론 나이 어린 장손의 경우, 막후에서 나이가 많은 이들이 이미 결정한 것을 형식적으로 전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족보와 가문의 역사를 중시하는 몇몇 가문의 경우 여전히 가문과 장손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지만, 이러한 경우를 제외한다면 이제 장손에 대한 역할이나 사회적 의미는 점점 감소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전통적인 의미로 ‘장손’이 한 가문을 책임지고 그 역사를 이어가야 한다는 역할이 맡겨지기에, 이제는 오히려 결혼 상대로서 기피하는 존재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 책은 결혼을 해서 ‘장손 며느리’가 된 저자의 경험을 서술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한국 사회에서 기존의 ‘장손’의 역할과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아들을 낳아서 대를 이어야 한다’는 것이 암묵적인 장손 며느리에 대한 가장 중요한 조건이었다면, 저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딸 하나만’ 낳아 살았던 자신의 삶의 역정을 토로하고 있다. 그저 상대방이 좋아서 결혼을 했는데, 장손 며느리로서 살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간략하게 제시하고 있다.
‘나는 너거 아 못 봐준대~이, 알아서 해라이.’ 결혼을 하고 한 달 쯤 되는 시점에 던진 시어머니의 이 한 마디는 저자에게 그저 아들이든 딸이든 하나만 낳자는 결심을 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본가 소유인 기와집을 허물고 4층의 빌라를 짓겠다는 남편의 계획으로 인해, 건물을 다 지을 때까지 시어머니와 동거하는 신혼 생활을 함께 해야만 했던 경험도 토로하고 있다. ‘딸 같은 며느리’를 표방했지만, 시어미니에게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딸과 며느리의 차별도 목도하게 되었다고 한다. ‘장손며느리’인 저자가 딸을 낳았을 때는 병원에 얼굴만 비치고는 사라졌던 시어머니가 아들을 낳은 시동생의 집에서 산후 뒷바라지를 자청하는 모습에서, ‘딸과 아들’을 구별하는 남성 중심의 관념에 얽매인 현실을 절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몇 번의 유산 끝에 갖게된 아이기에 소중할 수밖에 없었지만, 시어머니를 비롯한 시집 식구들에게는 ‘장손며느리’ 노릇을 못한 것처럼 비춰졌을 것이라고 하겠다.
시어머니의 폭탄 선언으로 아이를 갖게 되면서 하던 일을 그만 둘 수밖에 없었고, 저자는 ‘엄마라는 특별한 유전자를 깨우기로’ 결심을 해서 그대로 실천하며 살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저자는 이러한 자신의 삶의 역정을 ‘출산과 육아의 숲’이란 제목의 첫 번째 항목에서 담담하게 토로하고 있다. 그리고 ‘장손며느리’로서의 의무와 굴레를 겪으면서, 저자는 그것을 ‘관습의 거대한 뿌리’라는 제목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장손며느리’는 아니지만 자신과 같은 처지의 동서에게 동질감을 느끼며, ‘동서라는 내 편’을 확인하면서 저자의 처지를 이해해주는 사람들이 적지 않음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아이를 가지면서 경력 단절을 겪어야만 했지만, ‘아이를 업고 하러 간 논술 수업’을 기꺼이 받아들였던 학부모 역시 저자를 이해해주던 ‘냐 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저자응 이처럼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그들이 보내준 연대의 햇살’로 인해서 그 상황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강조하고 있다.
장손며느리라는 이유로 묵묵히 제사 등 시댁 행사를 치러내야만 했기에, 저자에게 나타났던 ‘불안을 동반한 공황증’이라는 증세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아마도 이러한 상황이 의무라기보다는 관습이라고 여겼던 ‘장손며느리’의 위치를 벗어나려고 했던 것이라고 이해된다. ‘뭐? 그럼 지금 내보고 이 나이에 며느리도 없이 계속 제사를 지내라고?’ 그러한 저자의 결심을 듣고 난 후에 보인 시어머니의 이러한 반응 역시 저자의 위치를 새삼 일깨워주었던 말이었다고 고백한다.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여 글로 써서 연재했을 때, 독자들이 보여주었던 공감어린 반응은 저자에게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한 반응을 통해서 ‘이 땅엔 며느리도 많았고, 그 숫자만큼 겪었거나 겪고 있는 일들도 다양함’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저자는 책의 ‘에필로그’에서 자신의 경험을 진솔하게 토로한 ‘뒤늦은 각성이 며느리로 사는 모두에게 단단한 지지기 되기를 바란다’는 희망을 피력하고 있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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