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 예찬
최옥분
“참 맛있다.”
뚝배기에 멸치 가루를 듬뿍 넣고 매운 고추와 양파를 송송 썰어 넣고 빡빡 된장을 끓였다. 잘 찐 호박잎에 밥을 싸서 먹으니 입안에서 혀가 춤을 춘다.
어릴 적 엄마는 해마다 봄이면 시골 담장 밑에 호박씨를 넣었다. 호박 넝쿨은 담장을 온통 뒤덮으며 잘도 자랐다. 가마솥에 밥을 안쳐놓고 담장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부드러운 어린잎을 따서 밥솥에 찌고, 된장도 뚝배기에 담아 함께 쪄냈다. 그때의 그 맛을 생각하며 그리움도 함께 싸먹는다.
초복이 다가올 때면 애호박도 탐스럽게 자란다. 엄마는 미리 빻아놓은 밀가루로 손칼국수를 만든다. 손바닥만 한 덩어리가 점점 커져 두레상만 해지고, 얄팍해지면 곱게 접어서 가늘게 썰고, 애호박도 채 썰어 넣고 끓인다. 멸치육수도 귀하던 시절 우리밀이어서 그런지 양념장만 넣어도 참 구수하고 맛이 있었다.
방학 때가 되면 햇빛이 쨍쨍한 날 엄마는 국수를 뽑으러 간다. 밀을 머리에 이고 이웃 마을 오리쯤 가면 국수를 뽑아주는 방앗간이 있다. 밀을 갈아서 밀기울은 갈라내고 뽀얀 가루로 실 같은 하얀 국수 가락을 만들어 작대기에 걸어서 마당 가득히 널어 둔다.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실타래처럼 펼쳐진 그 풍경은 처다만 봐도 배가 불렀다. 심심한 나는 가락국수를 끊어서 과자처럼 똑똑 씹어 먹기도 하고 돌을 주워 나무 그늘에서 혼자 공기놀이도 하며 긴 시간을 기다린다.
점심때가 되면 그 집에서 국수를 삶아 준다. 칼국수와는 식감이 다른 매끈하게 넘어가는 가락국수는 꿀맛이었다. 국수는 한나절 말리면 다 마른다. 방앗간 주인아저씨는 걸어놓은 국수를 먹기 좋게 잘라서 박스에 담아 주면, 엄마는 머리에 이고 오리 길을 또 걸어서 온다. 지금 생각하면 참 무겁고 힘들었을 텐데, 힘 든 내색도 없이 당연한 듯 그렇게 하셨다.
어느 해는 호박을 심었는데, 잎은 무성하나 호박이 전혀 달리지 않았다. 엄마는
“참 얄굿데이 잎은 이래 좋은데, 우째 호박이 안 열 리노 참! 희한하네.”
하시며 여름 내내 호박대신 잎만 따먹었다. 그런데 가을이 되어 뒷집 할아버지가 부르는 소리에 나가보니, 잘 익은 호박 한 덩이를 담 너머로 넘겨주셨다. 세상에 그 많은 영양을 혼자 다 섭취하고 얼마나 몸집을 키웠는지 *큰 버지기만 했다. 그때까지 내가 본 호박 중 가장 컸고 아직도 그만한 것은 보지 못했다. 지금 같으면 사진 찍어 카톡에 올리고, 야단이겠지만 그때는 전깃불이 아닌 호롱불을 켜고 살던 시대라 카톡은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가을이 되면 호박은 누렇게 익어 겨우내 저장해놓고 전을 부쳐 먹거나 죽을 끓여 먹기도 하고 떡도 해먹는다. 서리가 오기 전에 엄마는 호박순을 마저 따다 된장국을 끓여 주셨다.
씨앗은 고명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바가지에 담아놓고 간식이 귀한 시절 입이 심심하면 호박씨를 까먹었다. 뭐 하나 버릴 것 없는 호박, 맛이 강하지도 않고 순하면서 은근한 맛을 일 년 내내 즐겨 먹는다. 한 가지 재료로 이렇게 다양한 요리로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게 또 있을까.
그래서일까. 호박에 관한 속담도 참 많이 있다. 좋은 일이 연거푸 있을 때는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온다.’고 하지 않는가, ‘호박 넝쿨과 딸은 옮겨 놓은 데로 간다.’는 말도 있다. 혹간 남이 잘되는 것을 시기하고 방해하는 사람에게는 ‘자라나는 호박에 말뚝 박는다,’는 말이나 ‘호박꽃도 꽃이냐‘고 하는 말은 호박에 대한 모독이다.
남편이 국수를 좋아해 여름이면 저녁엔 매일 같이 국수를 삶는다. 멸치, 다시마와 늦가을에 말려둔 무 몇 조각과 양파를 넣고 육수를 낸다. 냉장고에 넣어둔 시원한 다시 물에 고명은 애호박볶음 계란지단이 전부지만, 우리 집 국수 맛이 제일이라며 후루룩 소리가 나기 바쁘게 그릇은 비워진다. 날이 서늘해지면 따끈한 칼국수에도 호박은 빠지지 않는다. 반찬이 마땅치 않아도, 애호박에 새우젓 볶음을 하거나 전을 부쳐 먹기도 한다. 생선과도 잘 어울리는 호박은 우리 집 냉장고에 늘 한자리를 차지한다.
자리를 가리지 않고 어디서나 잘 자라는 신토불이, 사계절 내내 즐겨먹는 호박을 예찬하며 오늘도 애호박 두 덩이를 사 왔다.
*버지기: 손잡이가 달린 옹기, 자배기 보다 크고 속이 깊어 물을 길어오거나 그릇을 씻을 때 사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