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건국기년에 대해서 3번째 글을 씁니다. 이번 글에서 중요한 것은 고구려의 전왕실이 있었다는 삼국지 등의 기록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촛점을 맞추었습니다. 즉 삼국지 등과 삼국사기를 동시에 놓고 서로 다르게 표현된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이해가 주 목적입니다.
분석의 핵심은 삼국지에 등장하는 고구려의 전왕실 연노부가 과연 고구려에서는 어떤 세력인가라는 것입니다.
자. 본격적으로 논의를 시작하겠습니다.
고구려의 부의 명칭에 대해서는 사료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간혹 혼란이 생기기도 하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앞서 1428번 글 고구려의 5부에 관하여 라는 글에서 약간 언급을 했지만, 좀 더 부연 설명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지금 고구려 건국기년 문제를 논해야 하는데, 먼저 이 부분을 언급한 것은 이 부분을 명확히 해야 이후에 건국기년 문제도 접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구려의 5부에 대해서는 삼국지 고구려전에는 계루부, 절노부, 연(涓)노부, 관나부, 순노부 라고 되어 있습니다.
계루부는 왕실, 절노부는 왕비족, 연노부는 전왕족 이라고 표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후한서에는 소(消)노부, 절노부, 순노부, 관노부, 계루부 라고 표기합니다.
두 사서를 비교해 보면 소노부를 곧 연노부라고 하는 것을 쉽게 알 수가 있습니다.
물론 후한서에서도 소노부를 전 왕족이라고 표시하지요.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고구려에 5부가 있다는 표현이 없습니다. 그저 나부(那部)로 표기합니다.
왕실에 대해서는 어떤 부라는 표시가 없습니다. 그래서 삼국지와 후한서를 통해 왕실을 계루부로 이해하는 것에는 대체로 동의합니다.
삼국사기에서 나부에 대해서는 대무신왕 4년조에 부여에서 투항해온 부여왕의 종제를 낙씨왕에 봉하고 이를 연나부(掾那部)에 안치한 것이 가장 처음 기록입니다.
물론 추모왕이 비류국왕 송양을 다물국왕으로 삼은 것이 먼저지만, 나부라는 이름은 이때가 처음입니다.
대무신왕 15년조에는 대신 구도, 일구, 분구 등 3인을 비류부의 장으로 삼았다가 퇴출시킨 일이 나옵니다.
즉 비류국이 곧 비류부로 바뀌었음을 이 기록을 통해 볼 수가 있습니다.
민중왕 4년 9월에는 잠지락부 대가 재승이 1만여가구를 데리고 낙랑으로 가서 한나라에 귀부한 적이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잠지락부. 이것은 고구려 5부에 속하지 않는 부입니다.
이러한 부는 더 나타나는데, 태조대왕 20년에 등장하는 조나와 22년에 등장하는 주나입니다. 조나와 주나는 각기 관나부의 패자 달가, 환나부 패자 설유의 공격을 받고 패해 그 왕과 왕자가 잡혀옵니다. 즉 나부에는 왕이 있었던 것입니다.
자, 태조대왕 22년 기록까지만 보아도 우선 고구려에는 연나부, 비류나부, 관나부, 환나부 의 4부와 고구려에서 이탈한 잠지락부, 다른 부에게 패해 당한 조나부와 주나부가 보입니다. 조나와 주나는 고구려와 다른 별개의 세력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대략 서기 2세기 초에 고구려에서 볼 수 있는 부는 조나, 주나, 잠지락부, 연나부, 관나부, 환나부, 비류나부 등 여러 개의 부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잠지락부, 조나, 주나는 연나부, 관나부, 환나부 등에 비해 약세임을 알 수는 있습니다.
관나부, 환나부, 연나부, 비류나부가 왕실과 더불어 고구려 5부로 정착된 시점으로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시점은 태조대왕 후기부터 차대왕 시기인 서기 2세기 입니다. 태조대왕 80년(서기 132년) 왕제(王弟) 수성은 관나부의 미유, 환나부의 어지류, 비류나부의 양신 등과 함께 모임을 갖습니다. 이후 수성은 이들 3부 출신의 부하들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146년에 차대왕으로 등극합니다. 이후 관나부 미유는 좌보, 환나부 어지류도 좌보, 비류나부 양신은 중외대부에 각각 임명됩니다. 즉 차대왕 시기에는 왕실과 3개부가 권력을 갖고 있었던 셈입니다.
그런데 서기 165년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연(椽)나부의 명림답부가 왕을 시해하고 신대왕을 왕위에 올립니다. 신대왕을 이어 왕위에 오른 고국천왕은 연나부의 우소의 딸과 결혼을 합니다. 연나부는 고국천왕 초기에 매우 세력이 커서 4연나가 반란을 도모할 정도였습니다. 연나부에는 명림씨 외에도 우씨, 좌씨, 어씨, 연씨 등 여러 세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반란이 실패한 후 연나부는 일시 세력이 약화됩니다.
고국천왕은 이에 정권을 일신하고자 4부로 하여금 새로운 인재를 추천하게 하는데 이때 을파소가 등용됩니다. 당시 고구려 전역을 4부라고 하는 것으로 볼 때 왕실 혹은 연나부를 제외한 4부가 존재하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따라서 태조대왕 중기 이후부터 시작된 고구려 5부제가 이때에도 잘 지속되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고국천왕이 죽은 후 연나부의 우씨왕후가 왕의 둘째동생인 연우와 밀통하여 그를 산상왕에 추대함으로써 연나부는 다시 부흥을 합니다. 산상왕의 새로운 왕비는 바로 형수였던 우씨왕후였지요. 이때 왕위에 오를 수 있는 1순위자인 발기는 소노가와 연합을 하고 대항하다 패배하여 하호 4만여명을 거느리고 후한의 공손강에 가서 도움을 요청했다가 실패했습니다. 소노가와 발기의 세력은 다시 비류수상에 돌아와 거주했습니다.
자. 삼국사기에서 소노가라는 표현은 단 한번 고국천왕 즉위조에 주석으로 등장합니다. 이 소노가는 어떤 세력인가가 궁금해집니다. 삼국사기는 이 표현을 삼국지에서 빌려온 것입니다. 그런데 삼국지에는 소노가가 즉 연노부의 대가라고 표시를 합니다. 즉 전왕실이었던 연노부를 일컫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삼국사기에서 등장하는 연나부, 비류나부, 관나부, 환나부 중에는 어디일까. 우선 연나부는 아님이 확실합니다. 왜냐하면 연나부는 산상왕의 다음 왕인 동천왕 시기에 국상 명림어수를 배출하고, 중천왕 시기에는 연씨가에서 왕후를 배출합니다. 또한 연나부 명림홀도가 중천왕의 사위가 됩니다. 서천왕때에는 우수의 딸이 왕이 되는데 우수 역시 우씨왕후와 성이 같으므로 연나부 출신으로 볼 수 있게습니다. 따라서 연나부는 삼국지에서 왕비족으로 일컫는 절노부임에 분명한 것입니다.
그럼 관나부는 어떤가. 관나부는 중천왕 시기에 관나부인이란 여인을 배출하는데, 왕이 소후로 삼고자 했지만, 연씨왕후의 질투를 받아서 마침내는 바다에 빠져죽고 맙니다. 그런데 이 기록에 보면 연씨왕후가 관나부인을 전사(田舍)의 여자. 즉 시골에서 농사나 짓는 여자라고 비난하는 말이 나옵니다. 관나부는 이때 완전히 몰락했음을 알 수 있지요. 따라서 관나부를 전왕실로 보기는 좀 어렵습니다. 게다가 삼국지와 후한서에 등장하는 관노부가 있으므로, 삼국사기의 관나부는 삼국지 등의 관나부로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제 환나부와 비류나부가 남았습니다. 환나부 인물 가운데는 연나부 명림답부가 산상왕을 추대한 이후로는 삼국사기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환나부는 한마디로 관나부처럼 몰락했다는 것이겠지요. 환나부는 그냥 삼국지 등의 순노부로 보고자 합니다.
그럼 비류나부가 전왕실인 연노부라는 것이 가설을 세워보지요. 그러면 삼국지에 의거하여 발기를 따라 요동에 갔다가 다시 돌아온 소노부도 곧 연노부가 되는 셈이니까, 비류나부가 곧 소노부라는 말도 됩니다. 그런데 이 소노부는 삼국사기에는 오로지 하나 다시 돌아와서 비류수가에 머물렀다는 기록 뿐입니다.
소노부가 다시 돌아와 머문 곳은 아무래도 자신들의 원 거주지였겠지요. 그러면 비류수와 관련이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런데 비류수에는 바로 송양왕의 비류국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비류국은 대무신왕 시기에 이미 비류부로 변합니다. 그렇다면 비류부가 곧 소노부=연나부=전왕실 이란 공식이 성립되는 것인가요.
여기서 중요한 기록을 봅시다. 산상왕이 집권 한 이후(197년)인 중천왕 7년(254년)에 국상 명림어수가 죽은 후에 다음 국상으로 비류나부 패자인 음우가 국상이 되었다는 삼국사기 기록입니다.
그렇다면 비류나부는 산상왕 이후에도 살아남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삼국지에 연노부는 본래의 국주(國主)였으므로, 지금은 비록 왕이 되지 못하지만 그 적통을 이은 대인은 고추가의 칭호를 얻었으며, 자체의 종묘를 세우고 영성과 사직에 따로 제사를 지낸다는 기록을 상기해볼 때 삼국지(위략도 마찬가지)가 지어진 무렵인 서기 280년대까지 고구려에서 왕실과 왕비족이 아님에도 세력을 유지할 수 있는 세력은 곧 비류나부 뿐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도 왕비족인 연나부는 삼국지에는 절노부로 표시되면서 그 대인이 고추가의 칭호를 받는다고 되어 있지요. 그렇다면 이제 비류나부가 고구려의 전왕실이었음을 연노부=소노부 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고구려 건국 기년에 대해서 언급할 때 아주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고구려의 전왕실은 바로 비류국의 송양왕의 왕실이었다는 것입니다. 즉 고구려는 송양왕의 비류국의 후신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더욱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점을 놓치면 지금까지의 논의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은 송양왕의 비류국이 고구려의 전왕실이라고 본 것은 어디까지나 중국인의 시각이라는 것입니다. 즉 고구려에서는 송양왕의 비류국을 계승하였다는 아무런 의식도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점이 고구려 건국기년 검토에서 아주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계속 예정)
@@@@ 검토 결과 내가 예전에 가졌던 생각과는 조금 다른 결론에 도달하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좀 작성에 시일이 걸렸습니다. 빠른 시일내에 나머지 건국기년에 대한 결론 글을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