팸 투어 후기
-다시 청송의 가을에 물들다
박태환
사노라면 갈림길을 만나 망설이기 마련이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처럼. 그런데 오늘은 그리 망설이지 않았다. 쉬 결정할 수 있었다. 한 행사는 일주일 뒤로 미루고, 초대 받은 음악회는 뿌리치고 팸 투어에 동참하기로 마음먹었다. 내겐 그만큼 의미 깊고 뜻 있는 행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의 수상자 얼굴, 얼굴들이 궁금했다. 대구일보 집행부와 운영위원들 그리고 심사한 분들과도 더 깊은 정을 나누고 싶었다. 예비심사를 하면서 느낀 소회도 말하고 싶었다. 또 한 가지, 내가 사는 구미시-국보 한 점을 비롯하여 문화재 및 사적들이 많은-를 홍보하여 수필대전에 참여하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지역을 글감으로 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것이 지역사회를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06시 30분에 집을 나서 15여 분 걸어 구미역에 도착했다. 07시 1분발 무궁화호 통근열차를 탔다. 동대구역을 나와 버스를 타고 법원 맞은편에서 내렸다. 신문사에 도착하니 08시 10분, 제일 먼저 도착한 것 같았다. 20분경이 되었을 무렵, 반갑게 인사하는 사람이 있었다. 구미수필의 황미연님, 무형문화재 박록주 명창을 소재로 한 <한>을 써냈는데 은상에 뽑혔다며 수상하러 간다고 하였다. 생각지 않았던 뜻밖의 만남, 축하할 일이라 더욱 반가웠다.
예정된 시각에 버스는 출발하였다. 탑승자는 모두 20명, 다른 사람들은 청송에서 합류하기로 했단다. 김서정 간사님의 인사말과 일정 안내가 있은 후 간사님의 사회로,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비롯하여 함께한 사연 및 소회를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먼저 운영위원부터 시작하여 심사위원 그리고 수상자들 순으로 이어졌다. 모두가 조리 정연하고 감칠맛 나게 말씀들을 잘도 하였다. 예상했던 대로 빼어난 연사들이었다. 그럴 수밖에, 자유로운 영혼들이 아니던가? 공부를 많이 한, 그래서 지혜가 철철 넘쳐나는 사람들, 서로서로 선생이 되고 동시에 학생이 되는 자리였다. ‘독서는 전인적인 사람을, 대화는 준비된 사람을, 글쓰기는 정확한 사람을 만든다.’고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이 말했던가. 독서와 글쓰기로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며 자신을 잘 가꾸어 안으로 탄탄하게 다져진 사람들, 발표가 끝날 때마다 버스 안을 가득하게 하는 박수소리로 모두가 한 마음이 되었다. 팸 투어 시작부터 기쁨과 즐거움이 넘쳐 행복한 하루가 될 것 같았다.
예정된 시각에 야송 미술관 주차장에 도착했다. 개별적으로 먼저 도착한 분들이 반가이 맞아주었다. 진용숙 경북문협 회장과 그 일행들, 안면 있는 분들과 악수를 나누며 미술관으로 갔다. ‘군립청송 야송미술관’, ‘군립’이라니, 인구 3만도 안 되는 작은 군에서 개인미술관을 세우다니! 감탄의 말이 절로 나왔다. 대단하다. 어제의 청송이 아니구나! 미술에 문외한인 나는 야송이라는 분을 잘 몰라 호기심이 발동할 수밖에. 너무 궁금해 ‘청량대운도 전시관 문을 밀고 앞장서 들어갔다. 아, 저 그림, 실경산수화, 입이 딱 벌어지고 발걸음이 절로 멈춰졌다. 그 멈춘 자리 앞에 백수의 신선 같은 어른 한 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작품의 주인 야송 이원좌 화백이었다. 절로 고개 숙여지고 존경의 마음이 샘솟았다. 먼저 길이 46m에 높이 6.7m의 크기에 압도 되었고, 작품의 눈부심에 어리둥절했다. 찌르르한 전율이 온 몸을 타고 흘렀다. 작가의 해설과 질의응답의 시간이 꽤 흘렀다. 여기저기서 감탄의 소리가 내내 이어졌다. 단체기념 촬영을 하고 작품을 2층에 올라가 다시 감상하면서 개인적으로도 여기저기서 사진을 찍었다. 다음은 해설사와 함께 대전시실, 중전시실, 소전시실, 미술도서관, 미술교육장을 설명을 들으며 두루 둘러보았다. 미술관을 나올 때까지 벌어진 입 쉬 다물지 못했다. 작품을 통하여 한 예술가의 위대한 영혼을 만나는 시간이었다. 귀로 눈으로뿐만 아니라 온몸으로 듣고 보았다. 뭔가 쏴한 느낌이 밀려들었다. 황홀한 시간이었다.
점심을 먹고 객주문학관으로 갔다. 역시 <객주>의 주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앞의 야송 화백이 선풍도골의 품이었다면, 김주영 소설가는 태산준령의 묵직한 바위산 같다고나 할까. 운동선수로 친다면 중량급 유도선수, 뚝심의 황소 같은 듬직함이 풍겨졌다. “나에게 소설가는 재주가 아니라 뚝심이자 견디는 힘이었다.” 뚝심 없이는, 끈기를 지니지 않고는 쓸 수 없는 대하소설의 작가다운 말씀이 아닌가? 1979년 6월 1일 날짜로 서울신문에 연재를 시작하여 1984년 2월 29일에 마감한 <객주>, 그 어마어마한 분량의 말씀들을 약 5년에 걸쳐 쏟아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침 마르도록 설명하는 해설사의 안내를 받고 우여곡절 파란만장한 79년의 생애를 그려보며 전시관을 둘러보고서야 고개 끄덕일 수 있었지만, 아무튼 그 대작의 주인공이 우러러 보였다. 존경의 마음이 절로 들었다. 두 분 다 공교롭게도 1939년 생, 망팔(望八)의 연세임에도 건강한 모습으로 활기차게 활동하는 두 분이 더욱 돋보이고 존경스러웠다.
다음은 객주문학관 강당에서 시상식이 이어졌다. 수필대전의 수상자 33명에 대한 시상식, 대상에 김미옥님의 <얼굴무늬>, 금상으로 양성은님의 <은장대-아릿한 손빛을 어루만지다>, 은상으로는 황미연님의 <한>을 비롯하여 동상 2명, 장려상 28명, 영광스러운 수상을 힘찬 박수로 축하해주었다. 남다른 생각을 가지고, 오랜 시간 동안 피나는 노력과 뜨거운 열정으로 소재를 찾느라 발품을 팔고 생각하며 쓰고 다듬고 한 결과의 영광이 아닌가? 수상자는 물론 시상을 하는 사람과 축하객들도 한 마음으로 기뻐하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강당 안은 서로 손잡고 얼싸안는 온정으로 따뜻했다.
파천면 덕촌마을 그 한가운데에 자리한 송소고택, 조선 영조 때부터 청송 심씨 집안이 대를 이어 살던 고택, 만석꾼 부자 심처대의 7대손 송소 심호택이 1880년경에 지은 99칸의 집이다. 민간인으로 살고 살았던 99칸의 집은 전국에 세 곳뿐이란다. 고개 갸웃하면서도 이어지는 설명에 귀만 열고 따랐다. 이곳을 나는 전에도 한 번 방문했다. 도 교육위원 시절 도의원들과 다녀간 곳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내게 다가왔다. 느낌이 전과는 아주 달랐다. 시간의 흐름 탓일까. 동행한 사람들이 문우들이어서일까, 해설사의 열정적인 설명의 유무 차이일까, 아님 조금 전에 만난 두 거장들의 위대한 정신과 그 예술혼에 취해 내 마음에 무슨 변화라도 일어난 것일까? 아무튼 내게 송소고택은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온 게 사실이었다. 고택뿐만 아니라 둘러보는 청송이, 청송 사람들이 다 그러했다. 다시 말하지만 어제의 청송이 아니었다.
다음으로 오늘 여행지의 마지막인 백자전시장과 수석․화석전시장으로 갔다. 대명리조트가 옆에 있다고 했다. 객실이 316개란다. 가는 도중 해설사의 자랑스러운 안내말씀은 끝날 줄 몰랐다. 주왕산이 열두 번째로 국립공원이 되었고, 고택이 많은 파천면과 자연 경관이 수려한 부동면이 2011년에 국제솔로시티로, 또 올해 5월에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청송이 제주도 다음으로 지정되었단다. 너무 좋아하고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에 듣는 우리마저 신이 났다.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은 한 것이 두 가지가 있다며 자상하게 일러준다. 그것들은 바로 이곳에서 나는 꽃돌과 청송백자의 원료가 되는 백석탄의 하얀 돌이라 했다. 다른 곳에서 나는 꽃돌은 그 꽃의 지름이 5cm 내외인데, 청송 돌은 그 꽃의 지름이 85cm나 되는 것도 있다고 하였다. 또 백석탄의 돌은 그 색깔이 곱고 희기가 백설과 같아 백자 원료로 안성맞춤이란다. 그런 도자기와 수석 화석들을 빨리 보고 싶어 버스에서 내려 잰걸음으로 이동했다. 두 전시관은 이어져 있었다. 헛말이 아니었다. 그곳에도 해설사가 따로 있었다. 지금까지 동행한 해설사와 둘이서 앞뒤로 서로 간격을 두고 눈 반짝거리고 귀 쫑긋 세우는 우리들에게 열심히 설명해주느라 여념이 없었다. 생활도자기라 하지만 그 정교함에 감탄이 절로 나왔고 수석 화석전시장에서는 그 돌들의 크기와 아름다움에 발걸음이 옮겨지지 않았다. 모든 일행이 사진을 찍고 찍어주며 더 많이 눈에 담고자 했다.
아, 가는 곳마다 경탄을 금치 못하게 하는 청송에도 어둠살이 내리고 있었다. 양옆으로 이어져 있는 상가에는 이미 불이 켜져 있었다. 상점마다 기념품과 산나물, 명품 쳥송사과가 불빛을 받아 반짝거리며 우리들의 눈길을 붙잡았다. 그 길의 끄트머리쯤에 우리가 찾는 식당이 있었다, 내원산장 식당. 두부된장찌게를 곁들인 비빔밥을 주문했다. 청송 약수로 빚은 막걸리로 건배를 했다. 남들은 한 잔으로 끝내거나 바라보기만 하는데 나는 서너 잔을 들이켰다. 맛이 보통이 아니었다. 입에 짝짝 달라붙었다. 얼큰한 기운에 솟을 즈음 점심을 먹은 식당의 주인 생각이 났다. 친절하고 정이 철철 넘치던 남자 주인장이 맛있는 닭죽을 먹는 내내 필요한 것을 하나하나 챙겨주며 여분의 죽을 식탁마다 한 그릇씩 더 내놨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혹시 댁에 노모나 어른이 계신 분이 있다면 이 죽을 싸드릴 테니 가지고 가라’고 했다. 비밀 봉지에 두 개를 싸서 내놓던 그분의 손님맞이 정성을 어찌 잊으랴!
미술관과 문학관의 두 어른을 비롯하여 오늘 만난 청송의 모든 사람들을 오래오래 잊을 수 없으리라. 모두가 한 마음 같이 청송을 아끼고 사랑하며 자랑스러워하였다. 그만큼 손님접대에 정성을 다했다. 그것이 더없이 자연스러웠다. 그들의 애향심이 더욱 돋보였다. 우리 모든 국민들이 본받아야 할 일이라 생각했다. 이른 바 ‘헬 조선’이니, ‘살고 싶지 않은 나라’, ‘떠나고 싶은 나라’라며 스스로를 폄하하고 우리나라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국민들이 많은 이때에 청송 군민들의 애향, 애국심은 우리들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정말 청송 팸 투어에 함께한 것이 나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나의 자만심이었나? 물들이러 갔다가, 되레 잔뜩 물들고 돌아왔다. 물들려 마음 흠씬 취하고 말았다. 이래저래 나라 안팎으로 걱정스런 일 이어져 구름 낀 날들 많았었는데, 청송의 늦가을, 살랑살랑 부는 서풍이 그 구름 말끔하게 걷어 간 것일까? 내 마음도 가을 하늘처럼 맑아질 수 있었다. 그리고 안이하게 살아온 내 삶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되었다. 새로운 시각, 보다 넓은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변화와 발전을 위한 걸음을 익혀야겠다는 다짐도 했다. 함께한 사람들이, 청송의 산과 들이, 농부의 일손을 기다리는 들판의 주렁주렁한 빨간 사과가, 무엇보다 지역을 아끼고 사랑하며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청송의 사람들이 가르침과 깨달음을 안겨준 큰 책들이었다. 가슴 설레게 하는 책읽기, 감동의 연속이었다. 말하기 쓰기보다 온통 듣기 읽기에 쏠린 하루, 그 듣기 읽기에 빠져 꼬박 열두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를 모를 정도였다. 청송을 여러 번 찾았었다. 올 때마다 새롭다. 다시 청송의 가을에 흠뻑 물든 것이다. 즐거웠고 행복했다. 조금도 지루하거나 피곤하지 않았다. 정말 의미 깊고 멋진 하루였다.
첫댓글 청송에서의 하루가 마치 그림같습니다.
청송에서의 하루~!! 좋은, 보람된 시간(만남)을 축하드립니다.
회장님 유려한 필력, 부럽습니다.
덕분에 청송 문화 예술 여행 잘 했습니다.
수필이 참 매력적인 장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함께 다녀온듯합니다 내고향 청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