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령체험이 주는 유익(2)-기쁨체험, 황홀체험
성령체험은 달콤하고 황홀한 체험을 동반한다
성령체험은 인간의 이성과 논리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감미로운 황홀감을 동반한다. 성령을 통해 정상 체험을 할 때 나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신부와 신랑의 관계가 된다. 신랑과 같이 있는 신부가 즐겁고, 기쁘고, 황홀한 무드에 잠기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마 9:15)?
신부와 신랑은 어떤 사이인가?
정상적으로 사랑하는 부부라면 둘만이 아는 깨알 쏟아지는 감미로움이 있지 않은가? 그저 둘이 있기만 해도 좋은 사이, 애정과 흠모로 가득한 눈길, 잠시만 보지 않아도 보고 싶어지는 사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생명의 기쁨과 즐거움을 나누는 사이가 아닌가?
한 지붕 아래 같이 살고, 한 이불 속에서 잠은 자지만 애정이 없는 부부, 남편은 열심히 돈을 벌고 아내는 열심히 자녀를 기르고 가사에 충실하지만 불꽃 튀는 애정이 없고 서로 뜨겁게 사모하는 마음이 없는 부부를 과연 진정한 부부라고 할 수 있을까?
지상에서의 부부의 관계는 신자인 신부와 신랑이신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예표한다(엡 5:30-33). 지상의 부부 관계가 불꽃 튀는 첫사랑의 감격과 뜨거움을 회복해야 하듯, 우리의 영적 신랑이신 예수와의 관계도 첫사랑의 감격과 뜨거움을 회복해야 한다. 신자는 정상 체험을 통해 영적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불꽃 튀는 친밀한 교제를 실제로 누릴 수 있다. 교회사를 통해 영성가들은 신랑 예수와의 친밀감이 주는 황홀한 체험을 끊임없이 추구해 왔다. 더군다나 세상살이에 지치고 피곤해 있을 때 우리 신랑 예수는 성령을 통해 세상이 주지 못하는 기쁨과 평강과 사랑을 주신다.
“평안을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 하지도 말라”(요 14:26).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요 성령 안에서 의와 희락과 평강이라”(롬 14:17).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 5:5하).
그런데 반·비성령운동파는 신자들이 하나님과 가지는 이런 기쁨체험, 황홀체험을 (불건전한) ‘신비주의’, ‘사교의 광란’이라면서 비난한다.
과연 그럴까?
장로교가 준수하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은 무엇인가?
문1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무엇인가?
답.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
(Q. 1. What is the chief end of man?
A. Man's chief end is to glorify God, and to enjoy him for ever).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한다’는 말은 신자라면 누구나 많이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한다? 입만 열면 하나님이 거룩과 공의를 말하는 반·비성령운동파들이 왜 자기들의 신앙의 근원인 소요리문답 1은 잘 모를까?
그들은 하나님을 즐거워해도 ‘조용하게 속으로’ 즐거워해야지 ‘방정맞게(?) 웃음을 터뜨리면서 감정적으로 즐거워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왜 안 되는가? 자기들이 하나님인가?
반대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성경은 감정적이고 노골적으로 기쁨을 표현하는 구절들이 많다.
“나는 오직 주의 인자하심을 의뢰하였사오니 내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소마약)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나를 후대하심이로다”(시 13:5, 6; 14:7; 16:11; ).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소마약) 즐거워할찌어다(길)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찌어다(라난)”(시 32:11).
여기에 사용된 히브리어 ‘소마약,’ ‘길,’ ‘라난’은 점잖은 웃음이 아니라 ‘터져나오는 웃음, 기뻐 날뛰는 것, 파안대소’를 말한다.
아기 예수를 만날 수 있게 된 동방박사들이 어떻게 기뻐했는가?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마 2:10).
When they saw the star, they were overjoyed (NIV).
원문을 비교적 직역하는 NASB는 이렇게 번역한다.
And when they saw the star, they rejoiced exceedingly with great joy (NASB).
(그들이 별을 보고 큰 기쁨으로 분에 넘치게 즐거워했다.)
예수님도 성령 안에서 크게 기뻐하셨다.
“이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헬, 아갈리아오)”(눅 10:21).
여기에 사용된 헬라어 ‘아갈리아오’는 ‘크게 기뻐하다, 기뻐 날뛰다’는 뜻이다.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그 성에는 큰 기쁨이 있더라”(행 8:5-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8-9).
구원을 받은 자라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큰 기쁨’으로 즐거워하는 것이 당연하다. 오죽 했으면 로이드 존스 목사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즐거움’(Joy Unspeakable)이란 제목으로 책을 쓰기까지 했을까!
여러분은 크게 기뻐할 때 이를 악물고 속으로만 ‘아, 기쁘다’라고만 하는가 좋아서 날뛰고 큰 소리를 지르면서 기뻐하는가?
외국과의 축구 시합을 할 때 우리 편이 한 골을 넣으면 앉아서 조용하게 ‘아, 기쁘구나’라고 속으로만 기뻐하는가, 아니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춤을 추거나 손을 높이 들고 손뼉을 치면서 기뻐하는가? 인간이 하는 축구시합을 관전하면서도 좋으면 기뻐 날뛰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온 몸으로 기뻐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그런데 정O철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도시에서 열린 찬양집회에서도 이 찬양을 불렀다. 그냥 부른 정도가 아니라 일어서서 크게 박수를 치면서, 뛰면서, 웃으면서, 열광하면서 이 노래를 불렀다. 견딜 수가 없어서 나는 그 노래가 다 끝나기 전에 나와 집으로 왔다. 이 노래의 작곡자의 사상도 불건전하고, 이 노래를 가사도 수상쩍은데 그런 노래를 부르면서 성도들이 그렇게 열광한다는 것이 불쾌하였다. 그것보다 더 싫었던 것은 교회의 분위기를 조금 건전하고 술 냄새 풍기지 않고 열광하는 나이트클럽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었다.”(‘종교적 황홀경을 경계하라’)
(*가사의 불건전성 비판에 대한 그의 오류-‘성령강림이 단회에 끝났다’고 착각하고 ‘위에서 부어주시거나 내려오시는 성령’에 대해 오해하니까 이런 오류를 저지르는 것이다. 성령강림 단회성 주장자들의 전형적인 오류이다-자세한 내용은 성경 Q&A ‘성령강림은 한번에 끝났는가’ 등을 참조)
과연 이렇게 드리는 찬양이 나이트클럽 식 찬양인가?
그렇다면 큰 일이다. 성경에서 나이트클럽 식으로 찬양했거나 찬양하라는 구절이 여러 군데 있기 때문이다. 미리암과 여인들은 소고 치고 춤추며 찬양했고(출 15:20), 시편은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여 뛰놀며 즐거워하라고 했으니 말이다. “의인은 기뻐하여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지어다”(시 68:3; 참조 시 13:5, 6; 14:7; 16:11; 32:11 등).
반대자들은 성경도 제대로 연구해 보지 않고, ‘자기들의 강한 기쁨과 황홀체험에 대한 무경험’과 ‘조용한 기쁨의 경험’만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평가하기 때문에 이런 오류를 저지르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기들은 경험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 제대로 된 성경해석을 한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건전한 경험 없는 성경 해석은 이처럼 편파적이고 논리적인 해석만 낳을 뿐이다.
존 파이퍼 목사는 『여호와를 기뻐하라』에서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라’고 할 정도로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는 기쁨이야 말로 기독교인의 참된 징표라고 역설한다.
"내가 당신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다.
외부의 세상은 교회의 조직적인 노력에는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들이 관심을 가질 단 한 가지는 사람들이 기쁨의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는 고대 세계를 이런 식으로 정복했다. 이 사람들의 놀랄만한 기쁨 때문이었다. 비록 그들을 감옥에 집어넣거나, 죽이더라도, 아무런 상관없이 그들은 즐거워하고 환란에서도 즐거워했다"(로이드 존스, Joy Unspeakable).
찬송가 작가 아이작 와츠는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1704년 10월 22일에 성령이 주시는 가장 즐겁고 위로가 되는 영향을 받았다 . . . 이것은 1689년에 처음으로 받은 것과 같은 것이었다 . . .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단어로 표현한 것보다 더 뛰어난 것이었다.
그때 나는 마음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즐거움으로 녹았고, 하나님의 사랑이 내 마음속에 너무나 풍성하게 부어져서 기쁨의 눈물이 내 눈에서 한없이 솟아났다(롬 5:5). 내 마음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완전히 압도당했다.”
미국 제1차 영적대각성운동의 지도자인 조너선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이런 체험에 대한 사람들의 비판에 대해 이렇게 항변했다.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을 받은 어떤 사람들이 일종의 황홀경의 상태에 들어가서 자신을 잊어 버리고 강하고 유쾌한 상상의 세계로 넘어가 일종의 환상을 보고 마치 자신이 하늘에까지 올라가 영광스러운 광경을 목격한 것처럼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데, 그러한 일들이 하나님의 성령께 속해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나는 그러한 경우를 잘 알고 있다. 이러한 일들을 설명하는데 마귀의 도움을 빌릴 필요가 없다. 이러한 것들이 광신적이거나 병든 뇌에서 발생한 것이라면 나(에드워즈)는 내 뇌가 그런 병에 오래 걸려 있었으면 좋겠다. 만일 그것이 정신착란이라면 인간 세계가 이러한 자비롭고 온유하고 덕스럽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정신착란으로 다 사로잡힐 수 있기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한다."
(Jonathan Edwards, “The Distinguishing Marks of A Work of the Spirit of God,” Jonathan Edwards on Revival, The Banner of Truth Trust, 1987)
과연 오늘날의 반·비성령운동파들이 이런 기쁨을 누리는가?
필자도 어느 날, 기도를 한참 하고 났더니 내 안에서 갑자기 주체할 수 없는 웃음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울음으로 응답해주셨는데 이번에는 신기하게도 웃음으로 응답해 주신 것이다.
“이것 봐라. 하나님이 웃기시네. 그런데 웃고 나니 너무 좋네.”
기도 후에 하나님이 주시는 웃음을 실컷 웃고 나면 기도 하기 이전의 염려, 불안, 스트레스가 일시에 사라지고 행복한 기분이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또한 은혜 받고 울 때 휴지나 손수건을 사용해야 하는 번거로움도 일시에 없어졌다. 하나님이 형편에 따라 시대에 따라 은혜를 주시는 방법도 달라진 것이다.
사실 오래 전에 신학교를 다닐 때, 힘든 일이 있어서 관련 말씀들을 묵상하고 큰 소리로 읽으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을 때 이와 비슷한 체험을 한 적이 있었다. 신학교에 다니면서도 믿음이 없어 불안해 하는 내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관련 성경구절을 크게 암송하면서 내 마음에 기쁨이 임하기를 기도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약 1:2).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벧전 1:6).
그런데 아무리 기뻐하려 해도 염려와 근심이 떠나지 않았다. 며칠을 이런 식으로 계속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뜨겁고 환한 것이 마음에 임하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과 황홀함’이 나를 사로 잡았다. 염려와 불안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입에서는 찬송이 절로 흘러나왔다.
마음에는 사랑과 기쁨이 충만하여 앞으로는 전혀 화를 내거나 죄를 지을 것 같지 않았다. 일 주일 정도 천국의 삶을 살았다. 그러더니 서서히 빠지기 시작하더니 평시로 돌아와 버렸다.
이런 체험은 말씀묵상에서 오는 것과는 다른 체험이었다. 말씀묵상 중에는 주로 ‘조용하고 그윽한 기쁨과 평안’을 체험했다.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그런데 이때는 나의 모든 마음을 사로잡을 정도로 ‘갑작스럽고 강렬한 기쁨과 평안’이 임한 것이다. 이후 필자는 이런 기쁨과 황홀체험을 수시로 즐기고 있다.
지금까지 개신교는 말씀과 기도는 강조하면서도 성령이 주시는 이런 기쁨체험, 황홀체험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거자 무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이런 체험을 누리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다.
기독교에서는 이런 체험을 성령체험, 위기체험, 정상체험이라고 부르지만 심리학이나 세상에서는 의식변형 체험, 아하 체험, 브레이크-아웃 체험, 법열 체험(불교), 쿤달리니 각성 체험(요가)이라 부른다.
그런데 비판자들은 이런 체험에 대해 기독교 관련 서적은 보지 않고 세상 심리학이나 요가서적만 보는지 성령운동파의 이런 체험을 심리학이 말하는 ‘의식변형 체험’이나 요가의 ‘쿤달리니 체험’으로 매도하다.
필자는 그들이 실제로 의식변형의 체험이나 쿤달리니 체험을 했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저 그런 책들이 묘사하는 외적 모습만 안다고 생각한다. 만일 그랬다면 그들이야 말로 마귀적 체험을 한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체험, 황홀체험을 오랫동안 정기적으로 누리고 있다. 그래서 세상이 말하는 의식변형 체험이나 아하 체험 등에 관한 심리학 서적들도 읽어보았다. 또한 최근에 궁금해서 쿤달리니 관련 서적들을 보았더니 이런 체험을 한 사람들은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린다고 한다.
당연하다. ‘쿤달리니’ 자체가 ‘사람 속에 존재하는 뱀의 기운’ 즉 귀신이고 쿤달리니 요가는 뱀의 기운 즉 귀신을 활성화하는 훈련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초기에는 머리가 맑아지고 새로운 깨달음이 오는 것 같지만 결국은 마귀의 밥이 되어 영육간에 심한 고통을 당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이 주시는 기쁨체험, 황홀체험은 이런 후유증이 전혀 없다.
필자는 20여년 간 정기적으로 이런 체험을 누리는데, 체험할 때마다 영과 마음이 깨끗하고 강건해 짐을 느끼고, 이성과 분별력은 더욱 똑똑해져서 말씀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설교 말씀 준비도 더 잘 되고, 하나님과 성경에 대한 사랑과 확신이 강해지고 이웃에 대한 사랑도 늘어나는 것을 체험한다. 조나선 에드워즈가 제시한 5가지 영분별 시험에 모두 합격이다.
성령운동파들이 예배 중 참석자들을 이런 체험으로 인도할 때, ‘생각과 마음을 비우고 주님께 맡기라’는 말은 ‘인간적이고 육신적인 생각과 마음’을 비우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맡기라는 것이지 비이성적이거나 무뇌자가 되라는 아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기 때문이다’(롬 8:6).
그런데 반·비성령운동파들은 자기들이 이런 직접 체험이 없기 때문에 외적 유사성만으로 영적 현상을 판단하여 기독교 예배에서 나타나는 이런 현상(들)을 심리적 현상, 마약 현상 및 사교적 현상 등으로 매도하는 것이다. 이는 비신자들이 기독교가 불교나 다른 종교나 마찬가지라고 하는 주장과 같은 논리이다. 어떤 현상의 ‘알맹이’의 차이는 모르고 외적 ‘유사성’만으로 서로가 동일하다고 생각하는 ‘유유상종 회합의 오류’(guilt by association)를 범하는 것이다.
이는 기독교계에 가장 만연하는 치명적인 오류이다.
특히 이단 감별사로 자처하는 미국의 존 맥아더, 행크 해네그라프 및 데이브 헌트, 한국의 정O철은 물론 대부분의 이단 감별사들이 이런 ‘치명적 논리적 오류’의 명수들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교회에서 일어나는 이런 현상에 대해 ‘하나님의 사람들이 어떻게 기록했는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세상의 심리학자나 사교 서적만 참고하는 것 같다. 건전한 체험이 없으니 분별력도 없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이 자기들 눈에는 모두가 세상적이고 사교적 현상으로만 보이는 것이다. 그 결과 자기 의가 발동하여 힘써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 10:2-3).
이런 자들에게는 약이 따로 없다.
말로 해보았자 우이독경이고 마이동풍에 불과하다. 바울이 되기 전의 사울처럼 제대로 성령체험을 하여 왕창 깨어지는 수밖에 없다.
제발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