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상을 내려서면 암릉의 연속이다. 우회로가 있긴 하지만
암릉의 오르내림을 반복하지 않을 수 없다.
아직 한 명의 산객도 만나지 못했다. 엷은 속옷 같은
흰 구름과 가끔 들리는 새소리가 적적함을 달래준다.
버겁고 피폐한 삶에서의 모진 일탈
충청북도 보은군은 그 지세가 대부분 산지를 이루는데 동쪽은 소백산맥이 이어져 높고 험준하며, 서쪽은 노령산맥이 뻗어있으나 대체로 낮은 지세를 형성하면서 중앙으로 평야가 전개되어있다.
예로부터 보은에서는 속리산 천왕봉을 지아비산, 구병산을 지어미산, 금적산을 아들산이라 하여 이들을 삼산으로 일컬어왔다니 이들 세 산이 두루 보은군을 휘감고 있음의 표현일 것이다.
보은군에 자리한 구병산九屛山은 구봉산九峰山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속리산에서 떨어져 나와 웅장하고 수려한 아홉 개의 봉우리가 병풍을 두른 듯 동서로 길게 이어졌으며 그 능선이 내속리면과 경북 상주시일대까지 뻗어있다.
속리산의 명성에 가려져 유명세에서 많이 밀리고 있지만 1999년 보은군에서 속리산과 구병산을 잇는 43.9km구간을 특허청에 충북알프스로 출원 등록하여 널리 홍보하면서 많은 산객들이 찾고 있다. 산객들 사이에 구전으로 전해져 하나의 고유명사처럼 부각된 영남알프스나 호남알프스와 달리 충북알프스는 기존등산로를 잇고 또 개설해 상품으로 특화시킨 것이다.
경남의 1000m 고지가 넘는 일곱 개의 산을 태극모양으로 이은 종주코스 영남알프스는 광활한 고원의 억새지대를 특징으로 하며, 지리산과 덕유산의 주능선을 바라보면서 100리를 넘게 걷는 호방한 산길 호남알프스는 육산과 바위산을 고루 느낄 수 있는 묘미가 있다. 충북알프스는 다양한 바위로 이루어진 출중한 암봉과 암릉산행이 매력적인 곳이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 산을 이어 길을 터주었으므로 감사한 마음으로 그곳을 걷게 된다.”
그렇게 부러 산을 연계시키며 그 산들을 찾지만 결국은 겨운 삶에서의 일탈이다. 버거운 속세에서의 피난처는 안락한 휴식처가 아닌 보다 힘든 곳이었음 싶었다. 진정한 결핍을 겪었을 때 비로소 삶을 전환시킬 수 있는 에너지를 얻게 되는 걸까. 처한 현실에 더 이상 나빠질 일이 없어보이므로 불가능하다싶은 일을 해내려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즈음의 산행은 길고, 멀고, 험한 곳을 택하곤 했는데 극한적으로 피폐하고 비루해졌다고 자인했기에 오히려 편안한 상태에서 새로운 세계를 만나려 했던 거였는지도 모르겠다.
비우고 또 비워 더 이상 비울 게 없으면 그 사람은 이미 성자요, 부처일 것이다. 누군가를 증오하고 무엇엔가 분노하는 것은 아직 다 비워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절대 긍정적인 현상이랄 수는 없지만 무언가 색다른 리듬을 추구하고 싶은 모진 일탈이 어느 때부터인가 삶의 한 부분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 한 부분을 채워주는 충북알프스에 감사한 마음이 든다.
구병산으로 올라 속리산, 상학봉으로 이어지는 충북알프스의 숱한 암릉구간을 무박으로 단번에 종주하기는 여러모로 녹녹치가 않다. 지리산이나 설악산처럼 산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교통도 무척 불편하다. 산행거리 약 24km지점 피앗재 아래에 피앗재산장이 있어 검색을 통해 거길 예약할 수 있었다. 두드리니 열리고 가고자하니 길이 생긴다.
혼자라서 더욱 조심스럽다
주말새벽 첫 고속버스를 타고 보은으로 가서 예정대로 장안면 서원리의 서원교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충북알프스 시발점이란 팻말을 보니 자치단체에서 애쓰는 노력이 충분히 느껴진다. 역시 감사하다. 결과적으로 산객들에게 편의를 주고 탐방욕구까지 채워주는 게 아닌가.
안내판 옆의 나무계단을 오르며 긴 여정의 첫 단추를 꿴다. 늘 그랬듯 40km가 넘는 여정의 첫 걸음은 들뜬 마음과 긴장감이 마구 버무려지면서 내딛었고, 혼자일 땐 두려움도 없지 않았었다. 다섯 혹은 여섯 개의 산을 무박으로 홀로 종주하면서도 두려움을 떨쳐냈었는데 오늘은 두려움조차 무뎌지고 있는 것 같아 스스로를 추스른다.
그건 위험스러운 징조일 수 있다. 아예 긴장감이 없다는 건, 두려움이 솟지 않는다는 건 훨씬 큰 위험을 자초할 수 있다. 출발 전의 혼란을 털어버리고 나무계단을 오른다. 들머리 오르막부터 급경사의 계단이다.
30여 분 꾸준히 오르다가 올라온 길을 돌아보니 시골마을 보은의 소담한 가옥들과 전답이 산과 산 사이에 빼곡하게 이어진다. 날씨도 쾌청하고 바람도 적당히 불어주어 초반산행은 상쾌하게 시작하고 있는 편이다.
속리산주능선이 한눈에 보이는 곳에서 첫 휴식을 취한다. 오른쪽 천왕봉부터 비로봉, 입석대, 신선대, 문장대에 이어 관음봉까지 왼쪽으로 줄줄이 펼쳐졌다. 볼 때마다 장쾌하여 눈을 치뜨게 하는 풍광이다.
구병산은 남쪽경사면이 절벽이고 북쪽사면이 육산이라 등로는 거의 북사면으로 우회하여 이어지는데 어쩔 수 없이 바위지대를 타고 오르는 길이 많다. 그래서인지 곳곳에 밧줄이 흔하다. 칼바위능선도 자칫 주의력이 흐트러지면 위험을 초래하기 십상인 구간이다. 혼자라서 더욱 조심스럽다.
백지미재를 지나 삼가저수지와 구병산으로 갈라지는 삼거리에서 또 줄을 붙들고 바위를 오른다. 아래로 네모나게 각진 삼가저수지가 조그맣게 보인다.
바람굴, 여름에도 늘 서늘한 바람이 불어나오는 산기슭의 구멍이나 바위틈새를 풍혈風穴이라 하는데 구병산풍혈은 여름에는 냉풍이, 겨울에는 훈풍이 솔솔 불어나온다. 구병산 정상에서 서원계곡방향으로 약 30m지점에 직경 1m의 풍혈 한 개와 직경 30cm 풍혈이 세 개 발견되었다.
볼수록 경이로운 풍혈이다
2005년 1월 보은군 문화관광과 직원들이 충북알프스 등산로 정비를 위해 왔다가 발견했다는데 직접 보니 충분한 포상금을 받을만한 대발견이란 생각이 든다. 구병산풍혈은 전북 진안의 대두산풍혈, 울릉도 도동의 동래폭포풍혈과 함께 우리나라 3대 풍혈이라고 적혀있다. 풍혈중심에 손을 대니 자연에어컨처럼 시원한 바람이 나온다. 참으로 오묘하다. 상식적인 논리로는 이해되지 않는 대자연의 섭리에 고개만 끄덕일 뿐이다.
충북알프스는 종주구간의 거리상 크게 구병산, 속리산과 묘봉의 세 구간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첫 구간인 구병산 정상(해발 876m)은 그리 넓지 않지만 멋진 고목 한 그루가 곡예 하듯 매달려 있고 동서남북사방을 시원하게 바라볼 수 있다.
서원계곡, 만수계곡, 삼가저수지 등이 자리 잡고 있는 구병산은 기암절벽과 어우러진 단풍이 장관이라 가을산행지로 적격인 편이다. 서원계곡진입로 주변에 속리산의 정이품송을 닮은 큰 소나무가 있는데 정이품송의 부인이라 불리는 암소나무로 수령 250년이 넘은 충청북도 지정보호수이다. 따로 떨어져있는데 부부라니 아마도 한때 부부였다는 얘기인지도 모르겠다.
장거리종주를 하면서 가야할 길을 내다보면 자칫 움츠러들 수 있다. 끝도 없이 멀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야한다.
“속리산에 위축되지 말고 어깨를 활짝 펴세요.”
“너나 잘하세요.”
곧 이르게 될 백운대와 아득하게 멀어 보이는 853m봉을 가늠하고는 진솔한 충고에 익숙지 않은 구병산을 떠난다. 정상을 내려서면 암릉의 연속이다. 우회로가 있긴 하지만 암릉의 오르내림을 반복하지 않을 수 없다. 아직까지 한 명의 산객도 만나지 못했다.
엷은 속옷 같은 흰 구름과 가끔 들리는 새소리가 적적함을 달래준다. 날아가는 게 힘겨워 억지로 날갯짓하는 연미색 나비 한 마리한테서 지난 세월의 데쟈뷰deja vu를 경험하는 듯하다.
삶의 흔적을 남기려는지 있는 힘 모두 실어 날개 퍼덕이건만 저 약한 기운으로 무후한 꽃술 중 단 하나에라도 끝을 남길 수 있을까. 어스름 노을은 한창 때와 달리 마구 무너져 내리고, 평화와 고혹이 공존하며 여유로움으로 무한할 것만 같던 숲은 한계에 다다라 우울한 적막에 덮여있구나.
맨홀처럼 퀭한 어둠속에서도 아직 숨결 남아있지만 생채기투성이 나래는 더 이상 힘을 싣지 못한다. 그저 타오르는 숨결을 찾아 헤맬 뿐이다. 결국 더 높이 솟구치지도 못하고 낮은 솔가지에 제 몸뚱이를 얹은 나비를 빤히 관찰하다가 처진 어깨를 곧추세운다.
“이 세상을 잘 마무리하고 떠나거라.”
바위를 타고 올라 853m봉에 이르렀다. 돌탑이 쌓여있고 나뭇가지에 무수히 많은 리본들이 달려있다. 여기서 목을 축이고 바로 방향을 잡아 적암리방향으로 내려가는 갈림길에 닿는다. 구병산만 단일 산행한다면 신선대를 둘러보고 다시 돌아와 하산할 수 있는 길이다.
구병산 853m봉에서 신선대로 마루금이 이어진다
외갓집 같은 피앗재산장에서 여장을 풀다
충북알프스 시발점을 통과한지 4시간 30분여가 지나 신선대(해발 820m)에 다다랐다. 여기서 형제봉까지도 먼 길인지라 걸음을 재촉한다.
신선대를 내려와 갈림길부터는 형제봉방향으로 능선이 이어진다. 산행로는 헬기장까지 무난하다. 헬기장에서 바라본 속리산 천왕봉의 삼각봉우리가 유난히 뾰족하다. 다시 좌측으로 내려서서는 리본을 유심히 찾게 된다. 산객들의 발길이 뜸해서인지 길이 흐려져 등로를 놓칠 우려가 없지 않다. 묘지도 지나게 되고 낙엽송조림지를 거치면서 장고개로 내려선다. 2차선차량도로인 장고개에서도 차량은 보지 못하고 통과한다.
흐르는 땀을 훔치며 올랐다가 헬기장에서 다시 내려서며 잘록한 안부에 이르렀고, 여기서 허름한 시멘트가옥을 만나게 되는데 율령산왕각이란 팻말이 걸려있다. 산신각인 것 같은데 밤에 혼자 지나치면 율령산왕이 불러 세울 것처럼 스산하다.
열심히 걸어 백토재를 지나고 또 꾸준하게 걸어 못재에 도착한다. 장고개와 백두대간 비재로 갈라지는 구간이다. 못재에서 땀깨나 흘리며 갈령재삼거리를 지나고 비재삼거리에 도달해서야 형제봉까지 700m 남았다는 이정표를 접한다.
백두대간상의 형제봉(해발 832m), 아무리 둘러봐도 형제인 듯한 봉우리가 하나 더 있지는 않다. 아무튼 여기까지 걸어온 길이 길고도 지루하지만 여기서도 바로 움직인다.
오늘산행의 종착지라 할 수 있는 피앗재에서 1.2km 내리막지점에 하룻밤 묵어갈 피앗재산장이 있다. 걸음이 빨라진다. 눅진한 피로가 몰려들어 쉬고 싶은 마음이 앞서기 때문이다.
만수리 쪽으로 1km가량 내려가니 임도로 이어지고 그 앞으로 물 좋은 계곡이 보인다. 그리고 10여 분 더 지나 피앗재산장에 당도하자 어릴 적 외갓집싸리문을 열고 들어서는 기분이다. 충북알프스 중간지점이며 산 꾼들의 쉼터라고 적혀 있다.
백두대간과 충북알프스를 걷는 산객들이 주로 이용하는 산장이라 리본도 많이 달려있다. 저렴한 가격으로 저녁과 아침식사에 숙박, 게다가 점심도시락과 식수를 보충할 수 있으니 든든한 지원센터가 아닐 수 없다.
산등성녹음 내 가슴 깊이
햇살처럼 번지니
향수에 젖어 고향 그리는 시
푸른 그림자 번진 저 하늘에 쓰리라
떠나는 이 애달파하다
미처 못 한 이야기
타는 가슴 누르는 애절한 시
진홍립스틱 찍어 물드는 노을 위에 쓰리라
어느덧 계절 바뀌어
피앗재에 알록달록 단풍 들면
낙엽 부스러지는 슬픈 시
애잔한 맘 찬찬히 문지르며
흐르는 계류 은빛여울 위에 쓰리라
그리움 다시 새겨 짙은 감성
눈물 흐를 듯 설운 바이브레이션
그렇게 갈잎노래 부르리라
이른 새벽, 다시 혼자다
둘째 날, 새벽 4시에 일어나 5시에 아침식사까지 하니 어제의 피로가 싹 가셔져 무척 상쾌하다. 산장에서 함께 머문 몇 명의 산객들과 길을 나선다. 속리산 천왕봉까지는 동행이 될 것이다.
안개 뿌옇게 낀 이른 새벽 바윗길에서도 싱그러움을 느낀다. 생태계보호를 위해 출입을 금지시킨 한남금북정맥구간에서 방향을 틀어 속리산 최고봉인 천왕봉(해발 1058m)에 이르자 속리산주능선을 따라 왼쪽 끝으로 문장대가 선명하게 시야에 잡힌다.
“안전산행 하세요.”
잠깐 동안의 일행들은 반대방향으로 간다. 다시 혼자다. 수차례 속리산을 왔었다. 법주사에서 문장대로 올라와 천왕봉까지 왔다가 원점 회귀한 적이 있었는데 오늘은 그 길을 역으로 걸으며 속리산을 파고든다.
장각동 갈림길 헬기장에서 신선대와 문장대로 이어지는 암릉군의 생얼굴들이 산뜻하다. 종종 느꼈듯 이른 아침에 바라보는 바위봉우리는 화장기 없이 비누내음 가득한 여인의 얼굴처럼 싱그럽다.
“이게 얼마만인가, 다들 잘 지냈지?”
원숭이바위와 거북바위를 다시 만나자 이만저만 반가운 게 아니다.
“지도 잘 있었구면유.”
이어 곰바위도 얼굴 잊지 않고 아는 체 해준다. 그리고 우뚝 세워진 입석대를 마주한다.
1618년인 조선 광해군 10년에 25세의 충민공 임경업은 무과에 급제하였다. 임경업 장군에 대한 야사 혹은 전설은 전국 여러 곳에서 전해지는데 여기 입석대와 경업대도 그의 기개와 용맹에 대한 설화를 지니고 있다.
임경업 장군이 불과 7일 만에 입석대를 세워 수련을 연마했다고 전해 내려온다.
“겨우 7일? 7개월이나 7년이 아니었을까.”
걸음 멈춰 입석대를 바라보며 크기와 무게를 가늠하니 그 과장됨을 조금만 줄였으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존경하는 장군의 역발산기개세에 관념을 고정시킨다.
입석대와 그 뒤로 속리산 주능선이 길게 펼쳐졌다
경업대 역시 장군이 무술연마를 위한 수련장소로 삼아 그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경업대에서 다섯 걸음 떨어진 곳에 있는 뛸금바위는 임경업 장군이 바위를 뛰어넘는 훈련을 하였다고 하며, 장군이 머물며 공부하던 토굴 밑의 명천약수는 장군이 마시던 물이라 하여 장군수라 부른다는데 경업대를 찾는 이들이 즐겨 마신다고 한다.
훗날 정조대왕은 당대의 화백 김홍도에게 자신이 특히 존경했던 임경업 장군의 초상화를 새로 그리도록 시켰다고 하니 입석대와 경업대의 모양이 새롭게 각인된다. 속리산의 명물들을 두루 조우하고 내처 걸어 신선대(해발 1026m)에 이르렀다.
신선대휴게소에서 냉커피 한 잔을 마시고 곤두박질하듯 내려섰다가 가파르게 솟구친 문장대에 다다른다. 문장대(해발 1054m)는 휴일을 맞아 산객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최고봉인 천왕봉보다 문장대가 인기는 훨씬 많다.
단종을 시해하고 왕위에 오른 세조가 불치병에 걸렸는데 신하들과 산을 찾아 삼강오륜을 논하면서 병을 고쳤다는 곳이 여기 문장대이다. 임경업 장군의 전설에 귀 기울이며 미소를 지었었는데 세조의 치장에는 미간이 좁혀진다.
“성공한 쿠데타는 혁명이라고?”
철제계단에 올라서서 둘러보는 칠형제봉과 우측 끝으로 천왕봉까지 다양한 화강암 암릉과 단애의 멋진 풍광을 보며 세조의 역사에 반기를 든다.
“쿠데타는 쿠데타일 뿐이야. 아무리 미화하고 시간이 흐른다한들.”
다소 뿌옇던 연무가 말끔히 걷히자 늘재에서 조항산과 희양산을 잇는 백두대간마루금이 선명하다. 오늘 걸어온 천왕봉부터 곧 마주할 관음봉을 살펴보고 문장대를 내려선다. 여기서부터는 다시 초행길이다. 묘봉까지 4.9km, 온통 바위암릉 구간이다.
가도 가도 제자리 같았다
삼각형태의 근육질, 관음봉이 다가갈수록 위압감을 준다. 바위를 꺾어 돌고 휘어 감으며 오르내리길 반복하여 올라가서 세로로 갈라진 거대한 바위꼭대기에 심어놓은 관음봉 정상석(해발 985m) 앞에 섰다. 밧줄도 없는 최정상까지 간신히 올라 인증을 하고 둘러보는데 이곳이야 말로 최고의 전망장소라는 걸 실감하게 된다.
첩첩골골, 겹겹산봉…… 과연 충북알프스란 말이 무색하지 않다는 걸 느끼게 된다. 나희덕 시인의 ‘속리산에서’에 평탄한 길은 가도 가도 제자리 같았다는 구절이 떠오른다. 가도 가도 제자리를 배회하는 것만 같은 산길이다.
가파른 비탈만이
순결한 싸움터라고 여겨 온 나에게
속리산은 순하디 순한 길을 열어 보였다
산다는 일은
더 높이 오르는 게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라는 듯
평평한 길은 가도 가도 제자리 같았다
아직 높이에 대한 선망을 가진 나에게
세속을 벗어나도
세속의 습관은 남아 있는 나에게
산은 어깨를 낮추며 이렇게 속삭였다
산을 오르고 있지만
내가 넘는 건 정작 산이 아니라
산 속에 갇힌 시간일 거라고
오히려 산 아래서 밥을 끓여 먹고 살던
그 하루하루가
더 가파른 고비였을 거라고
속리산은
단숨에 오를 수도 있는 높이를
길게 길게 늘여서 내 앞에 펼쳐 주었다
가도 가도 나아가지 못하는 삶, 시인은 바로 어제부터 마냥 걷는 내게 충언해주고 응원을 보내주려 이 시를 지었나보다. 세속의 숱한 경쟁에서 밀리고 넘어지다가 찾은 산에서도 스스로 경쟁을 자초하는 걸 지적해주는 듯하다.
나무들마다 가늘게 휘어졌고 고개 젖혀 바라보면 눈길 닿는 곳마다 주름졌다. 굽은 산등성이, 허리 굽혀 오르는 산길. 불의와 비리에 물든 세상, 고개 돌려 외면하는 비틀림. 굽은 인생, 휜 처세……
“세상도 삶도 곧은 걸 찾기가 쉽지 않아.”
관음봉을 내려와 다시 능선을 걸어 여적암과 미타사로 갈라지는 북가치에 이르고 600m를 더 걸어 묘봉(해발 874m)에 도착하였다. 관음봉에서 여기 묘봉까지 거친 암릉은 없지만 굴곡이 심하다. 배낭을 풀고 정상석 옆에 앉으니 이마에 맺혔던 땀이 턱밑까지 흘러내린다.
“여기는 정상!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다.”
이곳 묘봉에는 산악인 고상돈을 기리는 표지목이 세워져있다. 1977년 9월, 세계최고봉 에베레스트(해발 8848m)를 등정한 최초의 한국인으로 고상돈에 의해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여덟 번째로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국가가 된다. 세계최고봉의 정상에서 무전을 통해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다고 소리친 그의 목소리가 생생하다.
1979년 북아메리카최고봉인 알래스카산맥의 매킨리산(해발 6191m) 원정 대장으로 정상등정에 성공하고 하산하던 중 안타깝게도 웨스턴 리브 800m빙벽에서 이일교 대원과 함께 추락해 사망하였다. 그의 묘소는 죽어서도 산악인임을 강조하듯 한라산의 해발 1100m고지에 있다. 표지목을 어루만져보고 여정을 이어간다.
가야할 상학봉까지도 멀지는 않지만 길이 곱지 않아 보인다. 역시 쉽지 않다. 숱한 오르내림을 거듭하게 된다. 석벽에 가라진 틈새, 바위가 막아서고 그 틈으로 비좁게 길을 내준다. 밧줄이 지겨울 때쯤 되어서야 상학봉(해발 834m)에 다다랐다. 묘봉에서 상학봉까지 겨우 1km인데 훨씬 긴 길을 온 것처럼 버겁고 시간도 많이 걸렸다. 상학봉에서 어제부터의 행로를 되짚어본다.
“다시 그 길을 반복하라면?”
절대 못할 거란 생각이 든다. 군대를 두 번 가라는 거나 다름없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전역, 아니 하산을 준비한다. 100리가 넘는 종주 중 가장 반가운 구간이 더 이상 고도를 높이지 않는 최종봉우리일 것이다. 물론 그 지점에서 이미 뿌듯한 성취감을 느끼고 있는 중이다.
신정리와 활목재 갈림길에서 신정리로 방향을 잡는다. 좁은 바위굴을 통과하고, 암봉의 사면을 조심조심 올라섰다가 밧줄을 잡고 내려서며 길을 줄여나간다. 그리고 최종 날머리에 도착하면서 긴장이 풀어지고 다리에 근근이 남아있던 근력도 풀어지는 걸 느낀다.
충북알프스. 1박 2일의 대장정을 마치고 아무데나 털썩 주저앉았는데 평소 느끼지 못했던 묘한 감정이 마구 솟구친다. 얼른 손등으로 눈가를 훔친다. 왜 눈물이 맺히는 걸까. 누가 볼세라 생각보다 손이 앞선다.
다소 암울한 마음을 지니고 찾아왔던 산에서 무언가를 덜어냈나 보다. 그래서 감사한 마음이 일었던 듯하다.
“죄송합니다. 진심으로 사죄합니다.”
내려온 산을 올려다보며 진정 뉘우치게 된다. 원怨은 잘못된 상황을 남에게서 찾아 풀고자 함이며, 한恨은 잘못된 처지를 제 스스로에게 돌리는 비애라 했던가. 자기 자신을 증오하고 학대하며 맺힌 한을 풀겠다는 것은 빈 공간에 욕구를 채우려는 이기에 다름 아니기에, 그런 마음으로 찾아온 속리산과 구병산에 죄책감이 들고 말았다.
툭툭 엉덩이를 털고 도로를 걷는데 산길을 닦아 혼자서도 안전하게 하산할 수 있도록 해준 충북 보은군에 보은하고자 하는 마음이 절로 생긴다.
때 / 늦봄
곳 / 서원리 - 백미지재 - 구병산 - 신선대 - 장고개 - 동관음고개 - 못재 - 갈령재 - 피앗재 - 피앗재산장 - 속리산 천왕봉 - 신선대 - 문장대 - 관음봉 - 북가치 - 묘봉 - 상학봉 - 신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