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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 뗌므 - 안유환
땅거미 진 들판처럼 어둑한 기내에 다급한 남성의 목소리가 비명처럼 울려 퍼졌다.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소리를 지른 사람은 이코노미석 34열E좌석의 남자였다. 그 왼쪽 D좌석에 앉아있던 여인이 갑자기 실신한 것이다. 허성오는 두 줄 앞인 32열D좌석에서 수잠이 들어 있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한 남자가 소형 플래시를 좌우로 흔들면서 “Do we have a doctor-?”(의사 있습니까?)라고 외친다. 그 소리는 서너 차례나 쩌렁쩌렁 울리며 반복되었다. 그 남자 옆자리의 여인은 그의 아내였다. 그 찢어지는 듯한 고함이 곤히 잠들어 있던 승객들의 잠을 깨웠다. 안수영은 잠결에 혹시 비행기가 추락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깜짝 놀라 눈을 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는 그대로 잠을 자고, 몇몇 사람은 일어선 채로 소리 나는 쪽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허성오는 벌떡 일어나 소리친 그 남자에게로 다가갔다. 자리에서 엉거주춤 구푸린 그 남자 앞에는 금발의 여인이 좌석 팔걸이위로 쓰러져 있었다. 먼저 달려온 스튜어디스가 오른 손으로 실신한 여인의 어깨를 받치고 손목의 맥박을 확인하고 있다. 허성오는 스튜어디스에게 급하게 물었다.
“맥박이 잡혀요?”
“예, 아주 약하게―."
스튜어디스는 대답을 하면서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허성오는 실신한 여인의 손을 만져보았다. 손은 식은땀으로 온통 젖어 있었다. 허성오는 정신을 가다듬고 냉정을 되찾았다. 푸른 티셔츠 차림에 안경을 낀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그녀의 남편은 허성오의 거동을 주시하며 당황해하는 모습이었다. 실신한 여인의 몸매는 가늘고 얼굴엔 핏기가 없었다. 항공기 여행 중에는 허약체질이나 질환이 있으면 지속적인 스트레스로 인해 의식을 잃을 수 있다. 허성오는 오른쪽 엄지손가락으로 우선 지압의 기본인 합곡혈과 곡지혈을 강하게 눌렀다. 엄지 부근의 합곡혈은 다양한 통증을 완화시킬 수 있고, 팔꿈치 부위의 곡지혈은 온 몸의 기가 모이는 중요한 혈 자리이다. 몇 차례 힘껏 눌렀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허성오는 휴대하고 있던 사혈침을 꺼냈다. 이것은 응급처치를 위해 피를 뽑는 일종의 의료기구이다. 남자 승무원을 통해 그녀의 남편에게 양해를 구했다. 남편은 어찌할 바를 몰라 마지못해 허락하는 눈치였다. 허성오가 사혈침으로 손가락 끝 부위의 삼선혈을 차례로 따자 손가락마다 검은 피가 방울져 솟아올랐다. 잇달아 맑은 피가 나올 때까지 손가락 부위를 하나하나 짜주었다. 그녀의 남편은 얼굴을 찡그리며 몹시 불안해하는 표정이었다. 의식이 없던 여인이 몸을 비틀며 반응을 보였다. 합곡혈과 곡지혈을 번갈아 강하게 몇 번을 더 눌렀다. 여인은 의식이 돌아온 듯 축 처졌던 고개를 바로잡고 있었다.
정신과의사라고 신분을 밝힌 외국인 의사가 환자에게 접근 했으나 아무런 손을 쓰지 못했다. 어쩌면 그의 전문분야가 아니라는 직업의식 때문인지도 모른다. 석줄 뒤쪽 좌석에 일어서서 그 광경을 살피던 안수영은 앞으로 다가가 쓰러진 여인의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반팔의 베이지색 드레스를 입은 여인의 긴 목에는 목걸이, 팔목에는 다이아가 여러 개 박힌 팔찌가 반짝이고 있었다. 손가락에도 큼지막한 반지가 끼워져 있다. 승무원은 둘러선 사람들에게 정중히 제자리로 돌아가라고 말했다. 기내에서 큰 사건이라도 일어난 것으로 생각했던 승객들은 놀란 가슴을 추스르며 제자리를 찾아 갔다.
환자에게는 안정을 위해 몸을 눕힐 자리가 필요했다. 허성오는 우선 옆자리 두 사람의 외국인에게 손짓으로 양해를 구했다. 그들은 “Please, Please-”라는 말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성오는 두 좌석의 팔걸이를 올려 세우고 여인을 그 자리에 길게 눕혔다. 그리고 그녀의 혈액순환을 돕도록 남편에게 샌들을 벗기게 했다. 샌들은 잘 벗겨지지 않았다. 남편은 샌들 끈을 잡고 몇 번이나 당겼다, 놓았다 했다. 허성오는 이번에는 여인의 귀밑혈을 만져보았다. 이 부분의 근육이 뭉쳐지면 이명이 심해지거나 어지럼증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 여인의 오른쪽 귀밑혈은 부드러웠으나 왼 쪽은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허성오는 왼쪽 귀밑혈을 집중적으로 눌렀다. 여인은 신음소리를 내며 흐릿한 시선으로 멍하니 쳐다보다 다시 눈을 감았다. 허성오가 지압을 배운지는 30년도 더 되었다. 그는 신학교 시절에도 동기들이 체하거나 몸이 불편하면 지압으로 회복시켜준 적이 여러 차례 있었다. 그리고 처음 개척교회를 하면서도 동네의 환자들도 찾아가 돌보아 주었다. 여인은 고르게 숨을 쉬며 차츰 정상을 회복해가고 있었다.
일행은 3박5일 동안의 발리 여행을 마치고 귀국길에 올랐다. 현지 시각으로 0:20에 덴파사르 공항을 이륙한 대한항공 KE620 여객기는 어딘가 약간 불안한 느낌을 주면서 서울로 향하고 있었다. 이번 여행은 ‘신학교졸업 30주년기념 선교대회’로 동기부부 등 70여명이 참여했다. 이 가운데는 남미, 아프리카, 러시아, 미얀마 등 ‘땅 끝’으로 파송된 해외선교사 열두 가정도 함께 초청되었다. 목사 안수를 받고 목회를 시작한지가 올해로 30주년을 맞은 것이다. 비행기는 이륙 후에도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트럭처럼 한동안 심하게 덜컹거렸다. 기상조건이 몹시 좋지 않은 것 같았다. ‘안전벨트 착용’을 알리는 기내 방송이 간헐적으로 계속되었다. 언젠가는 비행 중 간이식탁의 물컵이 30cm쯤 높이 떠올랐다 떨어지며 엎질러진 것을 생각하면 그렇게 염려스런 상황은 아니라고 안수영은 마음을 진정시켰다. 자정을 넘긴지 한 시간이나 지났기에 승객들은 담요를 그러 덮고 대부분 잠들었다. 기내는 수면에 알맞은 어두운 조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안수영은 아내의 머리를 오른쪽 어깨에 받으며 나란히 등받이에 기대어 잠을 청하고 있었다. 비행기는 마치 양철지붕에 억수같이 쏟아지는 소낙비 소리를 내며 잠을 소란스럽게 했다.
"비행기도 소나기를 만나면 마치 양철지붕에 비가 떨어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나는 가봐?"
안수영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며 아내에게 말했다.
"나도 여태껏 그것과 흡사한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아내도 같은 느낌을 받고 있었다.
안수영은 지난 3월 승객 239명을 태우고 중국 베이징으로 향하든 중 연락이 두절된 항공기 사고를 떠올렸다. 그 말레이시아 항공 여객기의 추락지점은 아직까지 찾아내지 못했고 행방불명 상태로 남아있다. 이대로 비행기가 추락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잠은 저만치 달아났다. 안수영은 늘 드리던 기도제목가운데 하나를 생각하고 있었다.
‘언제 주님이 부르실지라도 복된 죽음을 맞게 하소서.’
‘복된 죽음’이란 언제나 주님 앞에 설 준비를 하고 있는 것과 함께 교통사고나 엉뚱한 곳에서 횡사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들어 있었다. 그러나 질병이나 위험 등 어떤 상황에서라도 죽음이 두렵지 않도록 믿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다짐이 더 강한 것이었다. 안수영은 스마트폰에서 ‘성경 앱’을 찾았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내가 아무 일에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온전히 담대해져서, 살든지 죽든지, 전과 같이 지금도, 내 몸에서 그리스도께서 존귀함을 받으시리라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빌1:20-21) 안수영은 빌립보서의 말씀을 묵상했다.
언제나 필요한 것은 믿음과 용기이다. 안수영은 읽던 것을 덮고 다시 기도하는 마음으로 눈을 감았다. 양철지붕위에 쏟아지는 소나기 같은 소리는 여전했다. 잠은 쉬 오지 않았다. 이번 여행은 지난 6월초로 일정을 잡아 놓았으나 4월 중순에 일어난 세월호 침몰사고로 두 달 뒤인 8월 하순으로 연기되었다. 계획대로 여행을 추진하려고 했으나 국민정서가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일정이 늦춰지면서 미리 예약을 해두었던 단체좌석은 여기저기로 흩어져 자리를 맞추느라 불편을 겪었다. 허성오를 비롯한 젊은 층 세 사람은 고3 수험생 자녀를 두고 있어 아내들이 참여하지 못했다. 안수영에게도 어려운 문제가 있었다. 유달리 더위를 못 견디는 아내가 8월 하순에는 우리나라 보다 더 더운 발리에 갈 수 없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안수영은 모처럼의 기념여행에 아내를 두고 혼자 떠날 수 없었다. 처음 동기회에서 보내준 여행준비 안내서에는 더위는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발리는 연평균 기온이 섭씨25~26도이고, 최저22도-최고29도로 견딜만했기 때문이다. 인터넷을 통해 확인한 연중기온도 21도~32도로 우리나라 여름과 별로 차이가 없었다.
‘발리는 열대 우림과 사바나 기후에 속하며 계절은 건기와 우기로 나뉜다. 우기는 10월~3월, 건기는 4월~9월까지이며 우기에는 게릴라성 소나기가 하루에 서너 번 정도 오는 것이 고작이다. 우기와 건기의 기온변화는 거의 없지만, 건기 때가 우기 때보다 일교차가 크기 때문에 따뜻한 옷을 준비하는 것이 좋다.’
건기에는 따뜻한 옷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읽어본 아내는 다시 세계적인 휴양지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그러나 아내가 날마다 들여다보는 스마트폰의 발리날씨는 달랐다. 대부분 27도~34도를 넘는 더위가 계속되는데다 몹시 구름이 끼거나 아니면 비가 내리는 날씨로 나타났다. 공교롭게도 맑은 날씨는 하루도 보이지 않았다. 수년전 8월 중순 필리핀여행 때 고온다습한 일기로 몹시 고생을 한 아내는 그때의 기억을 되새기며 이번에는 도저히 함께 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가벼운 당뇨로 인해 무더운 날씨엔 숨이 차고 견디기 어려워하는 것을 알면서 아내에게 동행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안수영도 함께 여행을 포기한 상태에서 출국을 며칠 앞두고 현지 선교사인 김진명에게 날씨를 확인해보았다. 결과는 ‘지금은 겨울인 이웃 나라 호주의 영향을 받아 아침저녁으로는 15~16도 정도이며 선선한 바람이 불어 발리여행에는 적기’라는 것이었다.
8월 26일, 일행은 인천공항을 이륙한 후 7시간의 비행 끝에 덴파사르 응우라라이 공항에 도착했다. 현지 시간은 자정을 넘기고 있었다. 생각보다는 덜 후텁지근했으나 그래도 미심쩍은 마음으로 안수영은 아내와 함께 발리 입국수속을 마쳤다. 여행사에서는 얼핏 보기에 수선화처럼 생긴 ‘캄보자 꽃목걸이’로 환영을 해주었다. 오래전 하와이를 방문했을 때 ‘알로하 꽃목걸이’로 환영하던 기억을 떠올렸다. 이 노란꽃목걸이는 오래도록 진한 향기를 발하며 숙소의 룸을 꽃 향으로 가득 채워주었다. 발리는 호주대륙에서 밀려오는 찬 공기로 인해 아침저녁으로 상쾌한 가을 날씨를 보이고 있었다. 낮에는 맑고 햇볕이 따끈할 때도 있었지만 더위로 인한 불편함은 전혀 없었다. 8월말과 9월은 발리 여행의 적기라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일행이 묵은 망드라(MANCTRA) 호텔은 발리 최대의 관광지인 누사두아에 위치하고 있었다. ㅁ자 형태로 건축된 이 호텔 가운데는 직사각형의 긴 풀장 시설을 갖추고 있어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며 수영하는 사람들을 바라볼 수도 있었다. 물놀이를 좋아하는 안수영의 아내는 이른 아침이나 저녁에는 풀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녀는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수영선수로 뛰었으나 대학진학을 위해 수영을 그만두었다. 주로 주말이나 주일에 치러지는 대회가 신앙생활의 걸림돌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나이에 비하면 그런대로 잘 유지해온 몸매 때문인지 수영복 차림으로 풀장 주변을 거니는 것도 전혀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여보, 이번에 발리에 오지 않았으면 평생을 두고 후회했을 것 같아요.”
안수영의 아내가 내뱉은 말이다.
“그렇고말고, 남편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는 말이 있잖아!”
안수영은 어깨를 으쓱하며 한마디 했다.
“남편 말이 아니라 어른들 말 들으면 떡이 생긴다, 는 것이 아닌가요?”
안수영의 아내는 눈을 흘기며 남편의 말을 바로잡았다.
끝없이 넓게 펼쳐진 하얀 모래사장에 화려한 에메랄드빛 물결이 넘실대는 빠당빠당 비치에서도 그의 아내는 눈 내린 날 강아지처럼 즐거워했다. 현대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호젓한 해변은 휴식과 재충전에 안성맞춤이었다. 외국인 부부 한 쌍이 가까운 곳에서 그의 아내의 몸을 모래에 묻어주고 있을 뿐 다른 여행객들은 철썩이는 파도에 발을 담그는 정도였다. 살기에 바쁜 탓인지 길거리에는 오토바이 행렬이 물결을 이루고 있지만 한가하게 해수욕을 즐기는 현지인들은 보이지 않았다. 안수영의 아내는 헤엄을 치다 조개를 잡기 시작했다. 옆으로 팔을 들고 엉덩이를 흔들며 발뒤축으로 조개를 찾는 모습이 트위스트를 추는 것 같다. 자맥질하여 건져 올린 조개는 발리 사람들처럼 약간 검은 색을 띠는 것이 특이했다. 안수영도 아내를 따라 조개를 잡기 시작하자 두 사람은 마주서서 트위스트를 추는 모양새다.
아내는 한 달쯤 발리에서 살고 싶다고 말했다. 라이언 머피 감독의 영화「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에서 원작자인 엘리자베스 길버트 역을 맡았던 미모의 여우 줄리아 로버츠가 반해버렸다는 그 해변! 아내는 발리의 에메랄드 물빛을 온 몸에 물들이려는 것 같았다. 안수영은 그의 시골교회 목회현장을 떠올리자 아내의 모습이 왠지 측은하게 보였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언제나 수더분한 시골아낙처럼 보이던 아내가 아직도 지난날의 젊음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보며 한편으로 자위를 한다. 가슴의 볼륨도 여전한 것 같아 안수영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안수영은 아내와 함께 놀아주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다른 이들은 일찌감치 비치파라솔 아래서 코코넛 생주스를 빨대로 마시며 안수영부부의 물장구치는 모습을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안수영은 아내와 수영을 즐기다 너무 시간이 늦어진 탓에 벌금으로 일행의 코코넛 주스 대금을 모두 물어야 했다. 해거름에 일행은 발리 7대 명소중 하나인 울루와뚜 절벽사원을 찾았다.
“여보, 당신도 안경 조심해야죠.”
원숭이가 관광객의 선글라스나 모자를 벗겨간다는 현지 가이드의 얘기를 듣고 아내가 한 말이다.
“설마―? 꼭 잡고 있으면 괜찮겠지.”
안수영은 아내의 말도, 가이드의 말도 대수롭잖게 생각했다. 공원에는 여기저기 원숭이들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호텔로비에 걸린 대형사진에서 보았던 울루와뚜 전경은 마치 타이타닉호의 뱃머리처럼 뾰족하게 수평선을 향하고 있었다. 여기가 영화「빠삐용」의 마지막 절벽탈출 장면을 촬영한 곳이다. 사원으로 오르는 성벽계단 오른쪽 절벽 아래로 펼쳐진 만의 바다는 넓은 설원을 연상케 했다. 파도가 밀려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프라이팬에서 기름이 끓듯 제자리에서 하얀 ‘극세 파도’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 뒤로 건너다보이는 우뚝 선 절벽은 흡사 변산반도 채석강의 한 자락을 보는 듯했다. 구름 한 점 없는 코발트 빛 하늘아래 갈맷빛 바다는 잔잔한데 절벽아래서만 쉬지 않고 설원 같은 파도를 끓이고 있다. 절경에 넋이 빠진 사람들의 발걸음은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75미터 높이의 언덕바지에 세워진 힌두교 사원은 버섯모양처럼 생긴 여러 개의 탑들로 운치를 더했다. 한낮의 더위는 수그러들고 신선한 바닷바람이 여행객들의 땀을 식혀주고 있다. 적황, 선홍, 보라, 복숭아 색 등 화려한 색상의 열대 꽃들이 오솔길을 따라 지천으로 피어있다. 다시 공원으로 돌아 나왔을 때였다. 뒤에서 “여보-ㅅ”하는 아내의 날카로운 소리를 들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아니 눈도 깜짝할 틈도 없이 어느새 안수영의 안경을 원숭이가 나꿔채간 것이다. 원숭이는 저만치 달아났다. 관리인이 먹이를 던져주자 원숭이는 안경을 그 자리에 놓고 먹이를 받아먹었다. 안수영은 원숭이 주인에게 1달러를 주고 안경을 돌려받았다. 잠시 후에 비명과 함께 또 한 여인이 선글라스를 빼앗겼다.
“거 봐요. 아내의 말을 들으면 떡 생긴단 말이 맞잖아요.”
아내의 비아냥대는 말에 안수영은 대답할 말을 잊었다. 울루와뚜에서 바라보는 적도의 황혼은 환상적이었다. 일행은 3박5일의 발리 여행을 아쉬워하며 비행기는 서울로 향하고 있었다. 좌석 앞 모니터에는 ‘비행속도 847km/hr, 잔여시간 3:20hr’로 나타나 있다. 목적지 인천공항까지는 3시간 정도 더 가야 했다. 자갈길을 달리는 트럭처럼 덜컹거리던 느낌은 좀 덜하지만 양철지붕을 때리는 비 소리 같은 소음은 여전히 잠을 방해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객들은 그 소음에 익숙해지면서 잠에 빠져있었다. 뜻밖의 비명이 기내에 울려 퍼진 것은 이때였다. 잠결에 얼떨떨해진 안수영은 마침내 비행기가 추락하고 있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허성오는 실신한 여인의 남편에게 무언가 손짓을 해가며 대화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은 오른손 검지로 머리 위쪽으로 원을 그리며 아내가 현기증으로 쓰러졌다는 제스처를 하고 있었다. 허성오는 그에게서 아내의 병력을 알아보고 싶었으나 말이 잘 통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 부부는 프랑스인이었다. 마침 중간 갤리 옆 화장실에서 나오는 동기 곽정용을 손짓하여 불렀다. 곽정용은 15년 째 러시아 선교사로 일하지만 그는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했다.
쎄 모 나미. (C'est mon ami. - 내 친구입니다.)
허성오는 평소 익혀둔 인사말로 그 남자에게 곽정용을 소개했다.
쎄 땅 쁠레지흐. (C'est un plaisir. - 만나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앙샹떼. (Enchant´e. - 반갑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의 아내는 고지혈증을 앓아왔고 이따금 발작을 일으킬 때도 있었다. 그들 부부는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프랑스까지 여행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결혼30주년 기념여행으로 지난주간 발리에 왔다고 말했다. 이런 것들이 곽정용이 알아낸 것들이었다. 허성오는 그녀가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서다가 현기증을 호소하며 쓰러졌다는 것을 확인했다. 다양한 원인이 있겠지만 현기증은 세반고리관 기능이 약화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허성오는 귀 아래 돌기뼈 부근의 근육을 다시 지그시 눌러서 혈액순환을 자극했다. 여인의 흐릿한 눈동자가 중심을 잡아가고 있었다. 비행기의 좁은 좌석에 오래 앉아 있으면 하체로 피가 몰리면서 혈액순환이 장애를 일으킨다. 특히 고지혈증인 사람은 협심증, 심근경색 등 심혈관질환을 불러올 수 있다. 허성오는 샌들이 벗겨진 환자의 발을 만져보았다. 차가운 발이 식은땀에 젖어있는 것은 전신의 혈액순환에 이상이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허성오는 양쪽 발등의 태충혈을 지압하고 종아리를 강하게 마사지 했다. 여인은 약한 신음소리를 내며 얼굴을 몹시 찡그렸다. 발가락을 하나씩 비틀어 감각을 깨우고 무릎관절과 고관절 부위의 근육을 이완시켰다. 허성오는 자신의 지압술을 총동원하고 있었다. 여인은 마침내 의식을 회복하고 누운 채로 남편에게 무슨 말을 건넸다. 남편은 허리를 구푸려 여인의 뺨에 가볍게 키스했다. 여인에게는 좀 더 편한 자리에서 지속적인 안정이 필요했다. 그러나 400여개의 좌석을 보유하고도 기내에는 간이 양호실 하나 없었다.
“환자가 안정을 취할만한 장소가 없겠습니까?”
허성오는 승무원에게 물었다.
“마침 일등석이 하나 비어있습니다.”
승무원은 환자를 일등석 쪽으로 안내했다.
여인은 남편의 부축을 받으며 뒤따라가서 슬리퍼 시트에 누웠다. 허성오는 자기 자리로 돌아가 긴장을 풀며 눈을 감았다. 잠은 오지 않았다. 허성오는 발리여행 이틀 째날 저녁식사 후 호텔 연회장에서 드린 기념예배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특별히 막내인 자신이 설교를 맡았었다. 나이는 가장 어리지만 목회에 대한 열정과 영성을 감안하여 동기들은 그를 기념예배 설교자로 세운 것이었다. 대부분 연장 순으로 순서를 맡기던 이때까지의 행사에 비하면 이번의 경우는 파격적이었다.
“사람은 많지만 사람이 없다는 말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일꾼은 많은데 일꾼이 없다는 말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 만큼 한 사람을 뽑아서 쓰는 것이 쉽지 않고, 모든 것을 믿고 맡길만한 일꾼도 찾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을 하려면 사람을 뽑아서 쓸 수밖에 없습니다. 회사에서 유능한 일꾼을 뽑을 때는 성적순으로 선발하지요. 면접에서 인품을 본다고 하지만 결국은 필기시험 점수를 잘 받은 사람을 택하기 마련입니다. ······.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나님께서도 일꾼을 뽑아서 사용하십니다. 세상에서는 모든 것을 스펙이나 지식의 점수로 계산하지만 교회의 일꾼은 믿음의 분량대로 인정받습니다. 초대교회의 일꾼을 세울 때 사도들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고 말했습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고 칭찬받는 사람은 한마디로 믿음이 좋은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중풍병으로 괴로워하는 하인을 부탁하는 백부장을 보시고 ‘내가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마8:10) 말씀하시며 그의 믿음을 극찬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교회에서는 주일을 성수하고, 집회에 빠지지 않고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면 믿음이 좋다고 말합니다. 이 모든 것은 믿음이 있어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좋은 믿음으로 칭찬하는 사람은 그것과는 다르게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출석이나 헌금은 특별히 믿음이 좋은 사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라면 누구나 해야 할 기본의무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기본적인 것을 잘하는 사람을 두고 최고의 믿음으로 칭찬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칭찬하신 좋은 믿음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지극히 작은 자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허성오는 평소의 믿음대로 선포한 말씀을 되새겨보았다.
“사랑하는 동기 여러분, 보내심을 받고 목회자로 살아온 지 30년입니다. 전쟁과 공해와 메마른 이웃사랑이 지구촌을 위협하며 우리를 멸망의 자리로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큰 것을 이루지 못했어도 천대받고 소외당하는 지극히 작은 자를 사랑하는 목자의 자리를 끝까지 지켜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 시대의 ‘의인 열사람’으로 남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허성오는 설교에서 목소리를 높여 외치던 장면을 떠올리며 자기다짐을 새롭게 하고 있었다. 예배 후에는 울먹이는 해외선교 보고회가 두 시간이 넘게 진행되었다. 선교사들 가정에는 동기들이 생활비에서 푼푼이 모금한 금일봉씩도 전달되었다. 허성오는 환자가 어서 안정을 회복하기를 기도하며 잠을 청했다.
처음부터 가까이서 상황을 주시해온 안수영은 눈을 감아도 잠이 오지 않았다. 그의 아내는 모니터에서 영화를 보고 있었다. 안수영은 며칠간의 국내소식이 궁금해 뉴스를 검색했다. 그러나 2~3일이 지난 뉴스가 패키지로 편집되어 있어 오늘의 소식은 알 수 없었다. 안수영은 모니터에서 ‘교양’아이콘을 눌렀다.「내 인생을 바꿔준 괴테의 말 한마디」가 눈길을 끌었다. 그것은 언젠가 읽어보려고 했던 괴테의 명언 모음집이다.
“늙는다는 것은 기술이 아니다. 그러나 노년을 사는 것은 기술이다.”
괴테의 말 한 마디에서 맨 먼저 나오는 말이다.
“무언가를 이루려면 자기를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사람을 다 만족 시킬 수는 없다. 그것은 바보들이 하는 짓이다.”
이 말은 언제나 목회자들에게는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말이다. 안수영은 읽어 내려가던 곳에서 눈길을 멈추고 지난 목회를 돌아보았다. 목회자의 일이란 모든 사람을 다 만족시킬 수는 없지만 한 사람이라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라도 결코 외면하지 말아야 하는 목회자의 일이야 말로 사람들이 보기에는 바보들이 하는 짓이다. 안수영은 잘 나가는 일간신문 기자였다. 수 십대 일의 경쟁을 뚫고 입사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잇고 있는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느 날 사표를 쓰고 목회자의 길을 택했다. 불혹을 눈앞에 둔 안수영에게 그것은 완전한 자기포기였다. 그러나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 오로지 ‘바보들이 하는 짓’을 반복하며 죽어라고 달려왔던 것이다. 목회란 몇 사람만을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려는 자세를 버리지 말아야한다. 아마 이러한 사실과 고충을 미리 알았다면 신학교 지망자는 현재의 절반 수준으로 줄어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저녁 아내가 몇몇 사모들과 함께 풀장에서 수영을 하고 있을 동안 안수영은 동년배인 고지송과 함께 2층 테라스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고개를 내밀면 풀장에서 수영하는 사람들이 내려다보였다.
“난 아직도 헬라어 첫 시간에 들어오신 P교수님이 ‘목사가 되기 전에 먼저 인간이 되라’고 하신 말씀을 잊을 수 없어.”
안수영은 30여 년 전의 선지동산으로 이야기를 끌고 올라갔다.
“교회사 강의시간에는 K교수님이 ‘공과 사를 분명이 하라. 공적인 것은 우표 한 장이라도 사적인 용도에 써서는 안 된다’고 하시던 말씀도 있었지.”
고지송도 함께 공부하던 때를 돌아보았다.
고지송과 안수영은 신학교3년 동안의 절반을 기숙사 한방에서 함께 지냈다. 고지송은 졸업을 하자마자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안수영은 지리산 자락의 조그만 교회로 들어갔다. 어떤 이들은 신학교 1학년 때부터 교회 개척을 시도 하는 것을 보았고, 모두가 큰 목회의 비전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안수영이 모든 것을 버리고 선지동산에 오른 것은 목회자가 없는 교회나 아무도 가지 않는 벽지나 낙도의 교회를 찾아가기 위한 일념이었다. 당시 대도시 지역에는 우후죽순처럼 개척교회가 생겨났으나 시골지역에는 목회자가 없는 교회가 더러 있었다. 안수영의 꿈은 외면당하는 작은 교회에 있었다. 그 교회는 40여년의 역사가운데 2년을 넘긴 교역자는 단 한사람, 50대 목회자가 3년 가까이 시무했을 뿐이며 대부분이 1년도 채우지 못하고 떠나갔다. 안수영이 이 교회에 부임할 때는 3년 동안 교역자가 없었다. 안수영은 이 교회를 섬기면서 거쳐 간 수많은 교역자들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자녀교육 문제, 경제적 어려움, 문화적인 갈등 등 어려운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그는 맨 처음 하나님 앞에서 결단했던 마음을 굳게 잡고 있었다.
5년 전 교회당을 신축하고 이제는 자립의 기틀도 마련했지만 돌아보면 꿈같은 일이었다. 때로 막내동역자인 허성오가 안수영의 시골교회를 찾아와 자비량 심령부흥회를 개최하기도 하고 그의 지압과 침술로 전도의 문을 넓혀 가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안수영의 목회는 앞으로 2년밖에 남지 않았다. 오늘까지 안수영이 교회를 지켜올 수 있었던 것은 아내의 격려와 희생적 헌신을 빼놓을 수 없다.
“어떻게 그렇게 막무가내로 선지동산으로 달려갔는지, 나도 나를 모르겠어.”
안수영은 캔콜라를 마시며 말을 이었다.
“살아온 날들을 몇 겹이나 벗겨보아도 한동안 내 모습은 보이지 않았어.”
고지송이 말을 받았다.
“나도 마찬가지야. 나를 찾기까지 얼마나 많은 기도를 했던지. 오랜 시간이 지나자 비로소 살아오며 차곡차곡 쌓아놓은 것들이 하나씩 보이기 시작하드라고-.”
“얼마나 버릴 것이 많던지. 버리고 나면 또 하나가 드러나고, 버리면 또 나타나고. 버려야 할 것들이 마치 옹달샘에서 솟아오르는 샘물 같았어.”
“선지동산으로 올라올 때는 모든 것을 다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버려야 할 것들이 그렇게 많이 남아있었으니-.”
“정말이지! 소유도 명예도 교만했던 마음까지도 다 비웠는데-.”
“모든 욕심을 다 버렸다고 생각했지. 버리지 않고는 신학교 생활을 계속할 수 없었지.”
안수영은 회사에 사표를 쓸 때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을 다 버린다고 생각했었다.
“내겐 오래도록 버리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어. 마치 아간의 외투처럼.”
고지송은 묵은 고민을 털어놓았다.
“무엇을 숨겨 놓았길래?”
안수영은 고개를 돌려 고지송을 쳐다보았다.
“장막 안에 묻어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꽁꽁 숨겨놓은 것이었어. 아집!”
고지송은 길게 숨을 들이쉬면서 말을 계속했다.
“다 버린다고 생각했는데 왜 그것은 누가 볼세라 내 가슴에 깊어 숨겨 놓았을까? 그 아집이란 것이 얼마나 주님의 뜻을 헷갈리게 했는지 몰라. 우리가 원하던 것은 스스로 띠 띠고 가고픈 곳이었지. 그런데 30년의 세월이 지나고 보니 자기가 원치 않던 자리에 서있었어. 나는 공부도 더 할 겸 영국행을 택했지만 얼마 후 아프리카로 가지 않으면 안 되었어. 마치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마케도니아 사람의 환상을 보았던 바울처럼 말이야.”
고지송의 고왔던 얼굴은 검게 탔고 오지 현장으로 들어가던 차가 굴러 지금은 한쪽 다리를 절고 있었다. 식구들의 고생은 더욱 말이 아니었다.
“지금 보면 어디에 서있는 동기들이라 할지라도 모두가 하나씩 그리스도의 흔적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아! 어떤 이는 시골에 묻혀있어도 구름 속의 달처럼 은은하게 빛이 묻어나는 것이 보여.”
안수영은 오랜만에 만나는 동기들이 대견스러웠다.
“우리 동기들은 유달리 별처럼 모서리가 날카로운 사람들이 많았지. 비판의식도 강하고-. 전직이 기자이고 방송프로듀서도 끼어 있었으니 조용하기는 어려웠잖아. 입학하기 전에는 ‘YH무역 여공농성사건’을 배후에서 도왔고, 졸업 후에는 경실련을 처음으로 발족시켰던 서인석도 함께 공부를 했으니 바람 잘 날이 없었지.”
말하는 고지송은 NBC 방송 프로듀서였고, 듣고 있는 안수영은 C일보 사회부 기자였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지. 이제는 그 날카롭던 모서리가 다 닳아 쟁반처럼 둥근 별이 되었어! 날마다 자기를 닦아내다보니 이제는 그 거칠던 마음바닥이 마치 희미하게나마 주님의 빛을 반사하는 동경(銅鏡)으로 변한 것 같아.”
안수영은 고지송의 말을 들으며 ‘처음 생각’을 떠올려 보았다. 그것은 예수 위해 죽는 것이었다. 방법도 길도 알지 못했으나 불나비처럼 선지동산으로 몰려들었던 친구들이 어느새 목회30주년을 맞았다. 몇몇은 은퇴를 했으나 대부분은 아직 목회현장에 서있다. 그때 신학교 문을 두드린 사람들은 유난히 나이 차이가 많았다. 어떤 이는 고등학교 때 가르친 제자를 신학교에서 만나게 되었다. 갓 대학을 졸업한 허성오는 그때 제일 나이가 어린 막내였고 안수영은 고령층에 속하여 15년이나 더 나이가 많았다. 허성오는 때로 저녁이면 기숙사 안수영의 방을 찾아와 지압을 하고 어깨를 주물러주며 하루의 피로를 풀어주기도 했던 사랑스런 막내였다. 그는 신학교 시절 1년에 신구약성경 20독을 하는 열심 파였다. 그리고 그는 닥치는 모든 어려움을 기도로 해결하던 사람이었다. 그가 이제는 D시에서 동기들 중 가장 큰 목회를 하고 있다. 그의 목회의 능력은 기도와 말씀에서 나온 것으로 보였다.
안수영의 아내는 영화를 보다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머리를 뒤로 젖히고 잠들어 있었다. 엊저녁 생각에 잠겨있던 안수영은 다시금 모니터로 눈길을 돌려 ‘괴테의 말 한마디’를 보고 있다. 이번에는 ‘처음 의도대로 자기 인생을 마무리할 줄 아는 자가 행복한 사람이다.’라는 말을 다시 생각해본다. 안수영이 처음 의도 한 것은 목회자가 아니었다. 안수영은 작가가 되고 싶었다. 글 쓰는 사람을 생각하다가 기자가 되었던 것이다. 결혼 후에는 3대째 신앙을 이어받은 아내의 꽁무니를 부지런히 따라 다니면서 목회자에 대한 열망이 끌어 올랐다. 인생을 가장 보람 있게 사는 길은 다른 사람을 위해 헌신하는 일이란 것을 깨달으면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신학도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타의 반은 믿음이 돈독한 아내의 간곡한 권유였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목회를 끝마치면 안수영은 처음 의도한 작가의 길을 걸으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동안의 귀한 신앙체험들을 작품으로 형상화하고 싶은 것이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다시 허성오의 뒷자리가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기내 벽면 대형 모니터에서 비행기는 붉은 띠를 끌고 한반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잔여시간 1:07hr’. 안수영이 둘러선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여다보니 일등석에 가있던 그 여인이 자기 좌석에서 널브러져 있었다.
“이 분이 왜 자기자리로 돌아왔습니까?”
허성오가 남자 승무원에게 항의하다시피 물었다.
“한참 전에 본인이 괜찮다면서 자기 좌석으로 가기를 원했습니다. 아마 일등석이 부담스러웠나 봅니다.”
승무원의 말을 한쪽귀로 들으면서 허성오는 플래시로 여인의 동공을 비춰보았다. 동공은 열린 채 수축작용을 멈추었다. 맥박은 가늘게 뛰고 있었으나 호흡은 멈춘 것 같았다. 이대로 4~5분이 지나면 한 생명이 끝나거나 살아나도 식물인간이 되고 마는 것이다. 허성오는 좁은 공간에서 오는 지속적인 스트레스가 고지혈증이 심한 여인에게 심혈관질환을 유발시킨 것으로 보았다. 왼편 창문 쪽 좌석에 앉아있던 한국인 여자승객 한사람이 갖고 있던 우황청심환을 건네주었다. 그러나 승무원은 그 약품은 사용할 수 없다고 말했다. 뒤에 안 것이지만 승무원들은 응급구조를 위한 심장제세동기를 두고도 조작법에 익숙하지 못했던 것이다. 허성오는 그 자리에 환자를 더 둘 수 없다고 판단했다. 허성오는 여인을 들쳐 업고 다시 일등석으로 가서 길게 눕혔다.
“헬로- 헬로-, 헬로-.”
허성오는 다급하게 큰소리로 일깨웠다. 어깨를 흔들며 소리쳤으나 여인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아직도 맥박은 뛰고 있으나 호흡은 완전히 정지되었다. 119에 신고는커녕 응급처치를 할 수 있는 의사 한 사람도 없다. 허성오는 ‘돌팔이’지만 책임감을 느꼈다. 즉시 인공호흡을 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누구를 붙잡고 이야기를 하거나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남편에게 길게 설명할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머리를 아래로 젖히고 턱을 들어 올려 기도를 최대한 개방시켰다. 오른 손으로 입을 막고 환자의 코로 숨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는 창세기의 말씀을 떠올렸다.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허성오는 이 말을 마음속으로 반복하며 하나님이 여인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고 생각하며 기도했다. 환자의 가슴이 부풀어 오르도록 급히 숨을 불어 넣었다. 이윽고 빠르게 일정한 간격으로 가슴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수년전 전교인 여름수련회장에서 여자청년 하나가 물에 빠져 의식을 잃은 적이 있었다. 허성오는 그때도 인공호흡법으로 그녀를 살려내었다. 또 기회 있을 때마다 청년들에게 한 차례씩 심폐소생술 시범을 보이기도 했었다. 흉부압박은 30회, 인공호흡은 2회를 번갈아가며 반복해야 한다. 그리고 압박속도는 분당 100회 정도가 적당하다. 허성오의 얼굴에는 비지땀이 흐르고 있었다. 3분쯤 시간이 흘렀을 때 환자의 숨통이 트이고 가벼운 기침을 했다. 가슴압박을 멈추고 허성오는 속으로 ‘할렐루야, 감사합니다.’를 연발했다. 둘러서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 가운데 누군가 먼저 박수를 쳤다. 일제히 환호와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허성오는 스튜어디스로부터 산소 호흡기를 넘겨받아 환자에게 착용시켰다. 여인은 규칙적으로 숨을 쉬고 있었다. 허성오는 남편에게 아내의 팔다리를 주물러주도록 하고 옆자리에 걸터앉아 여인의 상태를 지켜보았다. 혹, 호흡이 정지되면 다시 인공호흡을 시켜야 하기 때문이었다.
“선생님,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할지 모르겠습니다. 댁의 주소와 연락처를 좀 알려주시지요.”
승무원이 옆에서 허성오에게 말했다. 그는 허성오에게 해외여행 때 혜택을 주거나 응분의 사례를 하려는 뜻을 비쳤다.
“나는 해외여행을 자주 하지 않습니다. 의사도 없는 위급한 상황에서 내가 해야 할 바를 한 것뿐입니다. 승무원들이 오히려 수고가 많았지요.”
허성오는 정중하게 사양하며 그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구태여 목사의 신분을 밝히지도 않았다. 여기저기서 웅성웅성하던 기내 분위기는 다시 평정을 회복하고 있었다. 먼발치서 기웃거리던 사람들도 모두 제자리로 돌아갔다. 잠시 후 이륙할 때처럼 비행기가 덜커덕거렸다. 비행기는 곧 인천공항에 무사히 착륙했다. 선반에서 가방과 짐 꾸러미를 꺼내고 승객들은 차례로 통로를 걸어 나갔다. 맨 마지막에 안수영은 허성오의 가방을 끌고 나왔다. 여인의 남편은 “Thank you very much.” 라고 말하며 허성오의 두 손을 꼭 잡았다. 두 사람의 시선은 다시 여인에게로 향했다. 누워있는 여인은 겨우 눈을 뜨고 허성오를 올려다보았다.
쥬 뗌므. (Je t'aime. - 당신을 사랑합니다.)
허성오는 두 손을 꼬부려 하트 모양을 만들어 보이며 환한 얼굴로 여인에게 인사했다. 여인의 창백한 얼굴에 엷은 미소가 비치는 것 같았다. 허성오가 승무원들의 전송을 받으며 마지막 트랩을 내려올 때는 앰뷸런스가 경광등을 켜고 사이렌을 울리며 막 도착하고 있었다. - <부산소설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