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선생은 학생의 자유, 홀로서기, 창조를 실현한다.
선생은 학생한테서 그가 지니고 있는 모든 비본질적 포장을 벗겨버린다. 그러나 그의 부정은 동시에, 학생 내면에 숨어 있는 깊은 실체를 표출시킨다. 마이다는 말한다.
“아케가라수 스님은 기요자와 스님과 함께 사는 동안 순진(純眞)해졌다. 본디 빛나는 아케가라수가 기요자와에 의하여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선생에 의하여 학생 자신의 ‘본디 빛나는’ 모습이 드러날 때 그의 삶은 자유, 홀로서기, 창조와 같은 긍정적 가치를 지니게 된다. 이제 그 세 가지 가치들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선생이 학생에게서 실현하는 그 가치들은 기본적으로 학생이 무상의 진리와 하나 된 데서 오는 것들이다.
[자유]
마이다는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가치를 ‘자유(freedom)’로 본다. 그는 그것을 “값이 없는 보물”이라 부른다. 불교의 모든 가르침이 그것을 얻기 위해 고안되었다.
마이다에 따르면, 자유는 자기 자신이 되는 자유를 의미한다. 선생에 의해서 자신의 모든 것이 부서질 때 학생은 스스로 만든 아상(我想)에서 해방되어 본연의 자기(what he really is)로 돌아간다. 이런 경험을 일컬어 자유 또는 자기로부터의 해방 또는 무아(無我)라고 한다. 마이다는 아케가라수의 자유로운 삶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것은 선생에 의하여 실현된 자유다.
“아케가라수 스님의 겉모습은 조금도 무겁거나 엄숙하거나 굳어져 있지 않았다. 그는 선생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았으며 다른 어떤 얼굴도 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를 진짜 어수룩한 보통 사람으로 만났다. 그에게서는 불교 냄새도 나지 않았고 도덕군자의 냄새도 나지 않았다. 그는 그냥 그였다. 그냥 사람이었다. 그냥 자기 자신이었다. 그것이 곧 해방이요 자유다. 그것을 떠나 어디에서 우리의 옹근 자유를 찾을 수 있겠는가?”
완전히 자유로워진 아케가라수는 주변에 자유로운 분위기를 만들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선생과 가졌던 자유로운 분위기에 대하여 마이다는 말한다.
“그런 분이었기에 나는 그를 만날 때 아무것도 보류할 필요가 없었다. 무엇이든지 말하고 싶은 대로 선생에게 말할 수 있었다. 우리 사이에는 언제나 봄기운 같은 분위기가 서려 있었다. 그 앞에서 내가 특별한 존재로 되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항상 ‘무(無)’인 선생을 만났다. 만일 그가 나한테서 무슨 중요한 것을 보았다면, 나한테서 무슨 중요한 것을 보는 유한한 선생으로 현존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마음 내키는 대로 자유로이 처신할 수 있었다.”
“나는 아케가라수 스님이 나에게 절대자유를 준 데 대하여 크게 감사드린다. 나는 그에게 아무 빚진 것이 없다. 내가 그의 학생이기 때문에 따로 해야 할 일이 하나도 없다. 내가 나 자신이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내가 나 자신인 것 말고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나는 남들에게 물려줄 그 어떤 다르마도 선생한테서 전수받지 않았다. 나는 그냥 나 자신으로 살 뿐이다.”
마이다는 아케가라수에게서 받은 자유에 대한 궁극의 가르침을 이렇게 요약한다.
“아케가라수 스님은 언제나 내 귀에 속삭였다. ‘아무것도 염려할 것 없네. 자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좋아.’ 이것이 내가 그에게서 들은 불법(佛法)이다.”
[홀로서기]
선생의 부정은 학생을 자유롭게 하면서 아울러 그를 홀로 서게 한다. 선생이 학생으로 하여금 자기를 잃어버리고 선생이 당신 몸으로 구현하는 진리(또는 우주의 생명)와 하나 되게 할 때, 학생은 홀로 선 인간이 된다고 마이다는 말한다.
“학생이 선생 앞에 무릎 꿇을 때, 자신의 전 생명을 그 앞에 던져버릴 때, 학생은 더 이상 자기 삶을 살지 않는다. 다만 우주의 생명이, 선생의 삶에 완전히 녹아 들어간 학생의 삶이 있을 뿐이다. 어떤 학생이 ‘나 없는 삶’을 살기 시작할 때 우리는 비로소 그가 홀로 선 인간의 길을 혼자서 걷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선생은 학생의 모든 것을 부정한다. 학생이 자기한테 종속되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는다. 그는 학생으로 하여금 오직 진리와 하나 되게 한다. 그 결과 학생은 진리가 속속들이 배어든 자신의 삶을 옹글게 살아간다. 그것을 일컬어 ‘홀로서기’라 한다. 마이다는 ‘독존(獨存, alone-ness)’을 말하는데 그것은 아케가라수가 홀로서기의 동의어로 사용한 단어였다.
“기요자와에 의하여 철저하게 부정된 아케가라수에게는 기요자와까지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케가라수는 오직 자신을 예배했다. 그가 말했다. ‘내 종파는 아케가라수 학파(Akegarasu School)다. 내가 그 종파의 유일한 추종자다. 그것을 세상에 퍼뜨릴 필요가 없다.’ 그는 힘 있게 외쳤다. ‘천상천하에 오직 나의 독존(獨存)이 존(尊)하다!(My aloneness is noble).’ 아케가라수 스님은 당신 스스로 당신의 삶을 살았다.”
이 세상의 모든 상대적 가치들로부터 해방되어 자신만의 절대세계로 들어간 자유인(人) 아케가라수는 진정 홀로 선 인간이었다.
마이다는 홀로서기의 중요성을 마음 깊이 새겼다. 그리하여 자기 선생의 모범을 따르면서 홀로서기로 통하는 오솔길을 걸어갔다.
[창조]
마이다는 창조(creativity)의 바탕인 ‘배움’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학생은 선생한테 철저하게 배운 뒤에야 무엇인가를 새롭게 창조할 수 있다. 마이다는 말한다.
“귀에 들리는 것을 조용히 듣고 신중하게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사람으로 하여금, 일부러 노력할 것 없이, 창조의 첫 발을 떼어놓게 하는 유일한 일이다. 새로운 생각을 하는 일보다 귀 기울여 듣는 일에 더 중점을 두어야 한다. 창조는 배움에서 절로 나온다.”
마이다는 정신발달(spiritual development)의 마지막 경지를 ‘독자적 성취(personal attainment)’의 경지라고 부른다. 거기에 이르러 사람은 자신의 독특한 세계로 들어간다. 마이다는 그것이 곧 “선생 없이 혼자서 깨달음을 이루는” 경지라고 설명한다. 이 전통적인 구절(“선생 없이 혼자서 깨달음을 이룬다.”)은 선생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학생이 선생한테서 모든 것을 철저히 배워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간다는 뜻이라고 마이다는 말한다. 마이다는 석가모니와 신란 같은 위대한 개인들(individuals)이 모두 선생 없이 혼자서 깨달음을 성취했다고 믿는다. 예컨대 신란에 대하여 마이다는 이렇게 말한다.
“신란의 선배들은 나름대로 저마다 깨달음의 세계를 이루었다. 신란은 그 모든 선배들에 온전히 둘러싸여, 홀로 선 인간으로서, 자신의 깨달음을 이루었다. …신란은 정토종의 선배들한테서 모든 것을 배웠고 그리고 그들을 넘어서 자신만의 독특한 깨달음의 세계를 이루어냈다.”
신란은 한 평생 호오넨의 충실한 학생이었다. 그러나 이 말은 그가 선생의 불교이해를 앵무새처럼 되풀이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신란은 선생의 가르침을 철저히 탐색하여 스스로 자신의 독특한 정신세계를 창조해낼 수 있었다.
기요자와, 아케가라수, 마이다, 이들 모두 겸손한 학생 정신을 가지고 존경하는 선생들한테 배워서 자신만의 독특한 정신세계를 발전시켜 나갔던 것이다.[계속]
첫댓글 선생은 학생의 모든 것을 부정한다. 학생이 자기한테 종속되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는다. 그는 학생으로 하여금 오직 진리와 하나 되게 한다. 그 결과 학생은 진리가 속속들이 배어든 자신의 삶을 옹글게 살아간다. 그것을 일컬어 ‘홀로서기’라 한다.
자유 - 자신이 되는 자유 · 자기로부터의 해방 · 무아라고한다. 선생에 의해서 자신의 모든 것이 부서질 때 학생은 스스로 만든 아상에서 해방되어 본연의 자기로 돌아간다.
겉모습 -
1. "아케가라수 스님의 겉모습은 조금도 무섭거나 엄 냄새도 나지 숙하거나 굳어져있지 않았다. 불교 냄새도 나지 않았고 도덕군자의 냄새도 나지 않았다. 그는 그냥 그였다. 그냥 사람이었다. 그냥 자기 자신이었다. "
2. "그런 분이었기에 나는 그를 만날 때 아무것도 보류할 필요가 없었다. 무엇이든지 말하고 싶은 대로 선생에게 말할 수 있었다."
홀로서기 - 선생의 부정은 학생을 자유롭게 하면서 아울러 그를 홀로 서게 한다.
<<귀에 들리는 것을 조용히 듣고 신중하게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사람으로 하여금, 일부러 노력할 것 없이, 창조의 첫 발을 떼어놓게 하는 유일한 일이다.>> 새로운 생각을 하는 일보다 귀 기울여 듣는 일에 더 중점을 두어야 한다. 창조는 배움에서 절로 나온다.”
"아케가라수 스님은 언데나 내쉬에 속삭였다. '아무것도 염려할 것 없네. 자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게 좋아.' 이것이 내가 그에게서 들은 불법이다."
'아무것도 염려할 것 없네. 자네가 하고 싶은대로 하는 개 좋아.'
귀에 들리는 것을 조용히 듣고 신중하게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사람으로 하여금, 일부러 노력할 것 없이, 창조의 첫 발을 떼어놓게 하는 유일한 일이다. 새로운 생각을 하는 일보다 귀 기울여 듣는 일에 더 중점을 두어야 한다. 창조는 배움에서 절로 나온다.”
아케가라수 스님은 언제나 내 귀에 속삭였다. ‘아무것도 염려할 것 없네. 자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좋아.’ 이것이 내가 그에게서 들은 불법이다.
귀에 들리는 것을 조용히 듣고 신중하게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사람으로 하여금, 일부러 노력할 것 없이, 창조의 첫 발을 떼어놓게 하는 유일한 일이다. 새로운 생각을 하는 일보다 귀 기울여 듣는 일에 더 중점을 두어야 한다. 창조는 배움에서 절로 나온다.
마이다는 창조(creativity)의 바탕인 ‘배움’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학생은 선생한테 철저하게 배운 뒤에야 무엇인가를 새롭게 창조할 수 있다.
신란은 한 평생 호오넨의 충실한 학생이었다.
자유
값이 없는 보물
이 단어가 마음에 들었다.
나는 이부분이 마음에 들었다
“아케가라수 스님은 언제나 내 귀에 속삭였다. ‘아무것도 염려할 것 없네. 자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좋아.’ 이것이 내가 그에게서 들은 불법(佛法)이다.”
“귀에 들리는 것을 조용히 듣고 신중하게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사람으로 하여금, 일부러 노력할 것 없이, 창조의 첫 발을 떼어놓게 하는 유일한 일이다. 새로운 생각을 하는 일보다 귀 기울여 듣는 일에 더 중점을 두어야 한다. 창조는 배움에서 절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