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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변화의 세 단계 - 안유환
니체는 짜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정신의 세 가지 변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간의 정신은 처음에는 낙타가 되고, 다음에는 사자가 되고, 마지막 세 번째는 어린아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낙타의 정신은 역경이나 고통과 싸우는 것을 자랑으로 삼으며 무거운 짐을 지는 사명감에 비유할 수 있다. 그다음 사자의 정신은 이때까지의 무거운 짐을 지는 틀을 벗어버리고 자유를 쟁취하는 자리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인류가 자유를 쟁취하려면 낡은 도덕성을 파괴하는 사자의 용감한 정신이 요구된다. 그러나 사자는 파괴의 자유를 구사하지만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내는 의지는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짜라투스트라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려면 어린아이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어린아이는 순진무구하다. 망각할 줄 아는 자이다. 어린아이는 내일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날마다 새로운 출발을 하는 정신이다. 어린아이에게는 무엇이나 이루어낼 수 있다는 희망으로 가득 차있다. ‘천국 입성’도 가능한 것으로 다가온다. 예수는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했다. 윌리엄 워즈워드는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고 그의 <무지개>에서 읊었다. 어린 아이가 어른에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어른이 어린아이에게서 배워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가장 큰 행복은 그 어떤 것에서 보다도 어린아이들로부터 나온다. 어린아이의 정신이 세상을 따뜻하게 하고 미래를 보장한다. 어린아이는 부모가 꾸지 못한 꿈을 꾸고 이루지 못한 과업을 이루어간다. 지금 우리에게 있어 가장 심각한 문제는 어린아이들의 울음소리가 사라져가고 있다는 것이다. 어린아이들이 줄어든다면 새로운 출발이 유보되거나 문화를 답보상태에 빠트릴 수도 있을 것이다. 어른들의 힘은 어린아이들의 내일을 생각하는데서 나온다. 아이들의 울음소리를 듣고 어른들은 잠을 깨고, 아이들의 웃는 얼굴을 보며 허리띠를 졸라매고 일터로 향한다. 그들은 어린아이처럼 순정한 마음을 갖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간다.
어린아이가 된다는 것은 때 묻지 않은 참된 인간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올바르고 진실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야 올바른 정치도, 아름다운 문화도, 수명이 긴 예술의 창조도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가 무엇을 하든, 어디에 살든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수필이 철학적 사고와 심미적 안목을 통해 독자의 정서를 순화하고 그들이 마땅히 서야할 자리로 이끌어가는 소중한 역할을 하는 것이라면 지나친 말일까?
김채은의 「사만 오천 원」
인간의 조건으로는 여러 가지를 꼽을 수 있지만 ‘사람’이 되려면 무엇보다 은혜를 알아야 한다. 부모에게는 낳고 길러준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하고, 인간관계 속에서는 상대방의 고마움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은혜를 갚으려 애쓰고 고마움을 표현하는 자리로 한걸음 씩 나아가야 한다. 화자의 아들은 대학 초년생이 되었을 때 “나무도 땀을 흘릴 만큼 유난히 무더운 어느 여름날 새벽 아무 말도 없이 집에서 사라졌다.” 무엇 때문인지 궁금하고 걱정이 되어서 휴대전화로 몇 차례나 통화를 시도했으나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어머니는 별별 생각을 다하며 마음을 조였고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해가질 무렵 지친 몸으로 돌아온 아들은 난생 처음 어머니께 용돈을 드리기 위해 온 종일 땀 흘려 일한 것으로 밝혀졌다.
“불타는 듯한 여름해가 질 무렵 집에 돌아온 아들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얼굴은 햇볕에 그을려 구리빛깔이 되었고 몸은 온통 먼지투성이다. 지치고 피곤함이 역력했다.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얘가 무슨 일은 저질은 것이지? 아들은 아무 말도 없이 주머니에서 구깃구깃한 지폐 몇 장을 불쑥 꺼내 밀었다. 깜짝 놀라 이게 뭐냐고 물었더니 ‘엄마에게 드리는 용돈’이라고 했다.”
−김채은의 「사만 오천 원」 일부
엄마는 어디서 난 돈이냐고 다그쳤다. 아들은 “오늘 새벽 인력시장에 나가 아파트 건설현장에서 종일 철근과 벽돌 나르는 일을 해서 오만 원을 받았는데, 오천 원은 배가고파 밥을 사먹고 남은 돈 사만 오천 원”이라고 대답했다. 엄마는 당시의 충격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온통 하얀 비 같은 것이 쏟아져 내리고 가슴이 찡하며 머리가 망치로 세게 맞은 듯 아프기만 했다.” 불타는 듯한 여름 날씨에 아들이 겪은 고통을 생각하며 화자는 잠시 정신을 잃은 것처럼 보인다. 아들에게 흐르는 눈물을 보이지 않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아들의 옷에는 건설현장에서 흘린 땀이 말라 소금가루처럼 얼룩져있었다. “어휴, 이렇게 무더운 날에 뭣 하러 그런 곳에 가서 일했어. 그러다 다치면 어쩌려고!” 화자는 아들이 고생한 것이 속상해서 고마운 마음과는 달리 화를 내고 말았다. 어쩌면 그것은 자신에게 화를 낸 것인지도 모른다. 언젠가 “별 생각 없이 지나가는 말로 친구 아들은 야무져서 공부도 열심히 하고 아르바이트까지 해서 엄마 용돈도 준다더라”는 말을 했기 때문이다.
엄마는 그 ‘사만 오천 원’을 차마 용돈으로 쓸 수가 없어 생각 끝에 하얀 봉투에 넣어 장롱 속에 보관해두었다. 그리고 아들이 어쩌다 서운한 행동을 할 적에는 그 봉투를 꺼내 만져보며 아들의 고마운 마음을 생각하면 섭섭한 마음은 눈 녹듯 사라졌다. 부모님께 대한 아들의 효도와 사랑은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인이 된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퇴근을 하면 무거워진 포켓의 동전을 꺼내 아무렇게나 놓아두었다. 처음에는 아들이 잘 챙기지 못해서 그런 줄 알고 “돈은 눈이 있어 소중히 여기는 사람을 좋아한다”라고 일러주어도 동전은 여전히 방안에 나뒹굴었다. 아들은 없어진 동전에 대해 무관심했다. 아들은 모른 체 동전을 흘리는 것이 어머니에게 용돈을 주는 방법(?)이었고, 어머니도 아들의 그 고마운 마음을 짐작하게 되었다. 엄마는 어느 날 부터인가 방청소를 하며 ‘아들이 주는 용돈’을 저금통에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원한 가을이 오면 그 돈으로 아들에게 어떤 선물을 할까, 가슴 설레며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다.
아들은 엄마의 은혜를 기억하고, 엄마는 아들의 고마움을 알아주고 있다. 누구나 상대방이 자기의 수고를 알아주기만 해도 피곤은 어느새 사라지고 새 힘을 얻는다. 산다는 것은 받는 것만도 아니고, 주는 것만도 아니다. 살아가는 것은 주고받는 것이다. ‘왼손이 하는 것을 오른 손이 모르게’ 주고받는 것은 더욱 아름다운 것이다.
구애순의 「손녀 성장기」
‘어린아이를 기르는 엄마는 하루 열두 번도 더 거짓말을 한다’는 말이 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전혀 그렇지 않는데 엄마는 어린아이가 옹알이를 하거나 웃으며 제멋대로 손을 흔들어대는 것 하나하나가 어떤 의미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엄마는 그런 불확실한 것을 ‘통역’하다 보니 실제와는 다른 거짓말이 될 때가 많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이가 하루가 다르게 자라고 얼굴을 익히며 재롱을 떠는 것을 보면 옆에서 보는 사람도 엄마의 ‘거짓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도 생기게 된다. ‘상대방을 너무 좋아하다보면 눈에 콩깍지가 씌고 마마 자국도 보조개로 보인다’는 말도 있다. 아무래도 사랑의 눈은 정확성이나 객관성을 담보할 수 없는 것 같다.
「손녀의 성장기」에서는 엄마보다 더 많은 ‘거짓말’을 하는 유체이탈(?) 할머니를 만난다. 우선 그럴 듯한 거짓말을 눈에 띄는 대로 살펴보자. “태아는 영리했다.” “백일이 가까워오는 아이가 스스로 뒤집겠다고 악을 쓰며 울었다.” “한번은 제 뜻을 알아듣지 못한 할머니를 나무라듯 큰 옹알이로 호통을 쳤다.” “모두 누구에게 배우는 것같이 유아기의 발달과정이 질서정연했다.” “저 조그만 머리에도 우리민족의 신명이 깃들어 있는 것인가?” 할머니의 상상력은 수준급이다. “무조건 저를 예뻐하는 어른들 속에서 조심성과 참을성을 터득한 것이 신통했다.” “할아버지의 관심을 끌어내려고 내숭을 떤 것이다.” “태어난 지 일 년 반밖에 안된 것이 손바닥만큼 작은 배의 사진과 저 멀리 물위에 떠있는 실물을 비교 연상하는 것이 마냥 신기했다.” 이 말은 손녀와 함께 김해 봉황동 유적공원에 놀러갔을 때의 일이다. 할머니는 보석 같은 첫 손주 앞에서 콩깍지가 씌어도 단단히 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관찰력은 대단하다.
“진(珍)이는 내 보배 첫 손녀다. 안방 벽에 진이의 돌 사진이 걸려있다. 앞뒤로 튀어나온 짱구머리에 리본이 달린 머리띠를 둘렀다. 웃음으로 반쯤 감긴 눈과 가운데에 내려앉은 작은 코, 윗니 네 개와 아랫니 세 개의 짝짝이 치아를 부끄럼 없이 드러내고, 턱에는 수정 같은 침방울을 두 개나 달았다. 멀리서 보면 그 웃음으로 온 집안이 환하고 가까이 가면 사진에서 향기가 나는 것 같다. 저 맑은 눈빛과 화사한 웃음을 어디에다 비할까? 머리에서 발끝까지 순수 그 자체다. 영롱한 이 선물을 누가 보내주셨을까?”
사진을 들여다보는 것보다 더 선명하고 재미있는 묘사이다. 하나하나 ‘거짓말’을 짚어 내려가면서 다음에는 어떤 거짓말이 나올까, 기대가 되기도 한다. “목에 탯줄을 감은 채 산도(産道)를 내려오기 어렵다는 것을 안 (뱃속의)아이가 바깥에서 자신을 위한 조치가 있을 때까지 기다렸던 것이다.” 이 말에 뒤이어 화자는 “이것은 물론 나의 생각이지만.”이란 단서를 덧붙이고 있다. 얼핏 생각하면 다른 말은 모두 사실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런다고 영리한 독자들이 속아 넘어갈 것인가? 그걸 알고 화자는 지체하지 않고 ‘내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말로 자백을 하고 있다. “이렇게 진이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데 불과 500일 전에 할머니가 된 나는 손녀에게 홀딱 반해서 수다만발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아이고! 내가 왜 이러면 안 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은 무한한 상상력으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낸다.’는 말이 있다. 하나의 사물을 두고 보는 사람마다 달리 상상함으로 인해 다양성을 띠는 다른 글이 되는 것이다. 한편의 수필은 관찰과 상상력으로 엮어진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사람이나 사물에서 겉으로 드러난 것이 전부일 수는 없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나 사실만을 기록하는 것으로는 글의 짜임새를 제대로 만들어낼 수 없을 것이다. ‘상상력은 창작의 모태’라는 말을 생각한다. 작가는 놀라운 상상력을 통해 유쾌한 그림을 완성해놓았다.
이경자의 「독구리 난」
화초를 기르는 것은 마치 아이들을 키우는 것과 같다. 끼니를 챙겨주듯 때를 따라 물을 주어야 한다. 철따라 옷을 입히듯 잎의 먼지를 닦아주고 떡잎을 뜯어준다. 잔병치례를 하는 아이를 돌보듯 진디물이나 벌레를 잡아주어야 한다. 몸집이 커지면 분갈이를 해주고 음지식물과 양지식물의 위치를 잘 구분해야 한다. ‘텃밭의 남새가 주인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말처럼 집안의 화초도 관심을 기울이고 사랑을 준만큼 주인에게 화답한다. 어떤 것은 사철 푸른 잎으로, 어떤 것은 화사한 꽃이나 앙증스런 열매로 주인을 즐겁게 한다.
화자는 20여 년 전 단독주택에 살 때 흡사 양파처럼 생긴 독구리 난을 한 뿌리를 구입했다. 얼마 후에는 놓아둘 곳이 마땅치 않아 다른 화분들과 함께 옥상에 올려놓고 어쩌다 한 번씩 물을 주며 오래도록 방치하다시피 해왔다. 화자가 아파트로 이사를 하면서 옥상에서 오랜 세월 고초를 당하던 독구리 난도 주인을 따라 베란다 양지바른 곳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주인의 관심과 사랑에 보답이라도 하듯 밑둥은 축구공만큼 커지고 키는 자꾸 자라 천장에 닿았다. 보다 못해 뿌리 쪽으로 서너 뼘을 남기고 몸통은 싹뚝 잘라내어 새순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런데 독구리 난은 어떤 내색도 하지 않고 하얀 민머리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꼭 나에게 저항을 하는 듯 보였다. 그래도 안쓰러운 마음에 나무가 나에게 말을 걸기를 매일같이 기다렸다. 오랜 시간동안 꿈적도 하지 않더니 어느 날 민머리 주위에 송아지 머리에 첫 뿔이 나오 듯 네 개의 뿔이 솟아나왔다. 그리고는 또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경자의 「독구리 난」 일부
새순은 자라지 않고 다시 오래도록 주인의 애를 태우게 했다. 화자는 좀 더 빨리 자라게 하려고 맨 먼저 나온 새순을 덮고 있던 두꺼운 갑옷껍질을 벗겨주었다. “장애물이 없으면 잎이 빨리 나올 줄 알았다.” 얼마 후 세 개의 다른 순은 정상적으로 자랐지만 껍질을 벗겨준 새순은 더 이상자라지 못하고 겨우 생명을 유지하고 있었다. 화자는 이쯤에서 알묘조장(揠苗助長)의 고사를 떠올렸던 것 같다. 벼 포기를 뽑아 올린다고 해서 벼가 빨리 자라는 것은 아니다. 화자는 “생명을 키운다는 것이 식물이나 동물이거나 간에 환경도 중요하지만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키워낼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기른다’는 것은 ‘기다린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설사 뽑아 올리지 않고 과도하게 비료를 준다고 해도 화초는 웃자라거나 시들어 죽을 수 있다. 독구리 난은 마치 잘못한 자녀를 꾸중했을 때 쉬 잘못을 고치지 않고 고집을 피우는 것처럼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독구리 난은 고집을 피우는 것이 아니라 아직 새순을 피워올릴 때가 되지 않았을 뿐이다. 자녀를 기르는 부모의 마음도 그들이 얼른 자라고 하루빨리 ‘천재’가 되기를 열망한다. 그래서 유치원 때부터 학교의 과목 수만큼 여러 학원에 보내며 귀여운 자녀를 혹사한다. 알묘조장과 어찌 다르랴!
화자는 독구리 난에 대한 기대와 돌봄을 자녀를 기르는 부모들의 교훈이 될 실물교본처럼 잘 제시해놓았다.
마무리
‘왜 글을 쓰느냐?’라는 질문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이지만 여러 가지 답을 종합하면 결국은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위한 것’으로 귀결된다. 역사를 세워가는 데는 무거운 짐을 지는 낙타의 정신이 필요하고, 자유를 쟁취하려면 낡은 것을 과감히 파괴하는 사자의 기상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사회에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려면 지난날의 실패나 실수에 매몰되기 보다는 그 모든 어지러운 것을 망각(용서)하고 순진하고 정직하게 발걸음을 내딛는 어린아이의 정신이 요구되는 것이다. 문학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지난날의 좌절과 허물을 꽃처럼 아름답게 승화시키는 ‘기술’이 필요하다.
지난 호에 실린 작품 10편을 조심스럽게 읽어보았다. 거기에는 작가들의 소중한 마음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좋은 글을 쓴다는 것은 소재를 잘 선택하는 것이다. 많은 기억이나 하고 싶은 얘기를 다 쏟아놓다 보면 주제는 어느 구석으로 쫓겨나버린다. 어떤 것은 역사책 한 페이지를 옮겨다 놓은 듯하고, 어떤 것은 글의 목적지에 미처 도달하지 못하고 끝을 맺었고, 어떤 것은 소재의 나열로 혼란을 가중시켰다. 아직도 여기저기 비문이 드러난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많은 소재들은 주제를 세워가는데 필요한 재료에 불과하다. 양옥에 쓰일 자재가 따로 있고 초가집을 짓는데 소요되는 자재가 다르다. 소재의 취사선택을 잘해야 아름답고 감동적인 한편의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 문학은 정확한 기록을 옮겨놓는 것이 아니다. 문학성은 느낌과 상상력과 비유들을 통해 ‘그럴듯하게’ 꾸미는데 깃든다. 그리고 문학의 변할 수 없는 속성의 하나는 늘 새로움을 추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