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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역사에서 아직까지 그 평가가 극으로 갈린 인물 가운데 하나가 바로 15대 임금인 광해군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른바 ‘인조반정’으로 재위 15년 만에 강제로 폐위되어 유배에 처해졌고, 연산군과 더불어 ‘조(祖)’나 ‘종(宗)’으로 끝나는 묘호를 받지 못하고 왕자 시절에 사용했던 광해군이라는 호칭으로 기억되고 있다. 광해군을 왕위에서 몰아내고, ‘옳은 것으로 되돌린다’는 의미의 반정을 일으킨 세력들은 지금의 관점에서 보자면 쿠데타에 다름이 아니라고 하겠다.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선조의 후비인 인목대비를 유폐시켰다는 것을 이른바 ‘폐모살제(廢母殺弟)’라 칭하며, 그들은 쿠데타의 명분으로 삼았다. 그렇다면 이복동생인 세자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태종이나, 조카를 왕위에서 몰아내 영월로 유배를 보내고 등극한 세조에 대해서 그들은 어떻게 이야기했을 것인가? 그것을 생각한다면 그들이 내세운 것은 그저 쿠데타를 일으키기 위한 명분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분명 광해군의 정치적 행위를 정의롭다고 할 수는 없지만, 권력의 속성으로 보아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아울러 쿠데타 세력들은 오랑캐인 청나라에 대해 우호적이었기에, 광해군에게 ‘배은망덕’이라는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즉위한 인조로부터 이미 망한 명나라에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이른바 ‘친명배청’의 북벌론이 판을 치게 된다. 명나라와의 의리를 지키면서 오랑캐인 청나라를 공격해야한다는 명분이라고 하겠다. 그렇게 주장한 이들은 말만 떠들었지, 국력을 키우려는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청나라의 침략을 초래하여 왕을 비롯한 대신들이 남한산성에 갇혔다가, 한강 가의 삼전도에서 청나라 황제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두드리는 이른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치욕적인 절차를 밟는 것으로 귀결되었던 것이다.
최근 역사학계에서도 청나라와 명나라 사이에서 실리를 취하고자 했던 광해군의 외교정책에 대해서는 재평가해야 한다는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광해군이 당대의 국제 정세를 적절히 파악하여 자주적이고 실리적인 외교를 추구했다는 점이 재평가의 초점이라고 하겠다. 우리 근대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실상 쿠데타의 명분은 그 주도 세력들에게 그럴듯하게 만들어질 뿐이다. 임진왜란의 현장을 누비며 국난을 극복하려고 노력했던 세자 시절의 광해군의 업적을 무사히고, 뒤늦게 새장가를 들어 왕자(영창대군)을 낳아 그에게 세자 자리를 넘기려고 했던 선조도 그 원조의 업보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병이 깊어진 선조는 대신들의 주장에 따라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세상을 떠난다.
적자가 아닌 서자 출신으로서 광해군을 옹립한 북인 세력들에게 적자인 영창대군의 존재는 매우 위협적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더욱이 장자임에도 왕위에 오르지 못한 친형 임해군은 광해군을 비방하였고,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세력들 역시 틈만 나면 왕권에 도전하는 행태를 보였다고 한다. 특히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세력의 배후에는 인목대비와 대비의 부친인 김제남이 버티고 있었다. 서양갑을 비롯한 서자들이 난을 일으키면서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한다는 옥사가 일어나자, 영창대군은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살해되고 대군의 외할아버지인 김제남 역시 주모자로 지목되어 처형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식과 아비를 한꺼번에 잃은 인목대비는 사사건건 광해군을 원망하고 헐뜯는 행동거지를 보여주었고, 결국 서궁에 유폐되는 신세에 처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쿠데타가 일어나자 '왈실의 어른'이라는 이유로 그것을 승인하는 입장에 서게 된다.
만약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왕위에서 내쫓기지 않았다면, 이러한 일들은 태종이나 세조에 대한 평가에서 보듯 권력 투쟁을 위한 에피소드의 하나로 취급되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쿠데타의 명분이 상황에 꿰어맞춘 것에 불과하다는 평가가 존재하고 있다. 청나라의 침입에 맞서 명나라의 요구에 따라 군대를 파견했지만, 당시 파견되었던 강홍립은 싸우는 체하다 청나라에 투항하였다. 이후에도 강홍립은 광해군에게 청나라의 동정을 계속해서 보고했고, 이에 따라 실리적인 외교정책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명분론에 사로잡혔던 조선의 지식인들은 이것을 명나라에 대한 ‘배은망덕’으로 칭하며 쿠데타의 명분으로 삼았던 것이다.
결국 쿠데타로 이해 인조가 즉위하면서 청나라의 침략으로 정묘호란(1636)이 발생하였고, 당시의 국제 정세에서 광해군의 실리적인 외교 정책이 적절한 것이었다는 평가가 내려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책에서는 대신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던 광해군의 외교정책을 ‘고독한 중립 외교’로 칭했고, 나아가 명분론에 휩쌓인 조정 대신들 틈에서 고군분투했던 광해군의 처지를 ‘모래 위의 성’에 비유하고 있다. 그 결과 광해군의 정책에 불만을 품었던 일부 대신들의 쿠데타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고, 무능한 인조가 즉위(1623)하였다. 쿠데타 이후 광해군은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몇 차례 유베지를 옮긴 후에, 귀양살이 19년 만인 1641년에 제주도에서 생을 마쳤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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