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어가는 섬
김은아
섬에서는 종일 새의 울음소리가 빗방울처럼 떨어진다.
마늘을 뽑고, 그 비닐 구멍 속에
깻씨를 뿌리고, 남은 깨가 그릇에 담긴 채
밭에서 몇 날을 버려진 채 앉아있다
금방 약을 먹고 뒤돌아서 또 약을 먹고 있는 여인
노인 일자리 나가는 날을 공책에 적어 놓고도
적어 놨다는 것 잊어버리고 사람들에게 물어보러 가는 여인
섬에서 태어나 평생 섬을 지키는 여인
거칠고 험한 파도 넘어 섬처럼 살더니
어느 날부터 섬이 되어버린 여인
푸르렀던 섬은 늙어 걸음조차 걷기 힘들어졌다
천사대교 건너 섬은 편리해져 가는데
어제의 젊은 섬은 간데없고, 자꾸만 늙어간다
나른한 햇살이 조용히 다녀간 날
기억마저 싸늘하게 식어가는
야속한 세월이여!
낙조에 실려 가는 구름 한 조각
그 구름이 서럽다.
팔금도 (2)*
김은아
그리움은 출렁이는 파도처럼 다가와
멀미를 앓듯이 온다
시간은 섬 위로 흐르고
섬은 생명을 잉태하며 키운다
사라지는 것 또한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담담하게 오지만, 먼 길 돌아 그리움의 무게는
변함없이 제자리인데
어머니의 손으로 뚝딱뚝딱 만들던 영혼의 음식들
섬과 바다가 보글보글 끓던 시간은
자꾸 사그라지고 있다.
천사대교가 개통하면서
고산 선착장 여객선터미널은
수많은 섬사람의 사연을 뭍으로 나르던 흔적들을 지우며
배를 기다리고 떠나보내던 설렘과 긴장은
출렁이는 파도 속으로 잠겼다
가자, 가자
유채꽃 꺾어 먹고, 산다화가 빨리 오라고 손짓하는
참나리, 원추리가 부르는 팔금도로
떠나보니 알겠더라
고향은 늘 그리움으로 가슴에 품고 산다는 것을
떠나보니 알겠더라
고향은 따뜻한 추억의 공간을 묻어둔 곳이라고
떠나보니 알겠더라
고향처럼 좋은 곳은 없더라고.
*팔금도: 전남 신안군 팔금면에 있는 섬
시작노트
고향은 늘 그리움으로 다가오는 곳으로, 유년의 추억이 묻어있고 꿈을 키운 곳이기도 하다. 이제 내 고향 팔금도도 천사대교가 개통하면서 쉽게 왕래할 수 있는 편리함은 있지만, 섬이 가지고 있는 섬의 매력은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 부모님이 늙어가듯이 섬도 늙어가는 듯한 안타까움이 있지만, 추억은 영원히 내 기억 속에 두고 가끔 꺼내 보련다.
다시 오월입니다<43주년>
김은아
오월, 다시 그날이 오면
짙은 어둠 속에 갇혀 오월의 봄빛
그 하얀 미소를 앗아간 전두환과 신군부
아빠의 영정사진 품에 안고 턱을 괴고 있는
5살 꼬마 상주의 얼굴이 보입니다
왜 하필 광주였을까?
왜 하필 공수부대가 왔을까?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전일빌딩 245개의 총 자국은
헬기 기총소사라는 명백한 증거를 가지고 있는데
명령자도 쏜 사람도 없다
왜 하필 무고한 시민들이 죽어야 했을까요
광주는 너무 비참해요
속절없이 쓰러져간 시민들, 자식을 보내지 못하고, 그날의 슬픔을 가슴에 묻고 그리움을 향해 지금까지 고통받고 있는 어미의 심정을 그들은 알까요. 행불자들이 어디에 있는지 묻은 곳이라도 알려 주면 좋으련만, 시간은 자꾸 흘러 자식을 가슴에 묻고 돌아가시는 유족분들을 보면 슬픔이 밀려옵니다.
우리 민족은 참 슬픔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제주 4·3사건, 여·순사건, 광주 민중항쟁 등
뼈 아픈 역사입니다
여전히 아프고, 여전히 슬픈
정말 가슴이 미어지는 잔인하고 잔혹한 계절입니다
오월, 다시 그날이 오면
이팝꽃이 피었다 떨어진다
인도에 도로에 수북이 쌓인 저 하얀 밥이
그날의 시민군들에 나눠준 광주의 정신
대동 세상의 주먹밥입니다
불의에 저항하고 부정한 권력에 저항한 광주의 정신, 그 정신이 있었기에 우리의 민주주의는 앞당겨졌고, 우리는 대한민국의 역사를 광주의 정신으로 썼습니다. 절대 부끄럽지 않은 민주주의를 발전시켰습니다. 고립된 광주는 섬이었지만 생명의 싹을 키웠고 서로서로 보듬으며, 아픔과 슬픔을 함께하며 울음을 삼켜 보았기에 분노할 줄 알았고, 사랑할 줄 알았습니다. 광주 시민이 죽음으로 지켜낸 민주주의를 악용하며 5·18의 숭고한 정신을 왜곡하고 폄훼하는 사람들, 죄를 짓고도 사죄 없이 더 잘 사는 사람은 반드시 죽어서라도 그 죗값을 받아야 합니다. 다시는, 다시는 이런 불행한 역사가 반복되어서는 안 됩니다.
다시 오월
당신들이 계셨기에 지금 오월의 햇살이 눈부십니다.
詩의 향기
김은아
오랜 세월이 말을 걸어온다
언어의 눈빛으로 언어의 몸짓으로 다가오는 향기
그 향기를 수확하는 모습은 보기만 하여도 배부르다
들국화의 향기가 바람에 굴러가고
꽃들이 너도나도 달려온다
어떤 꽃을 먼저 봐야 할지
시의 밭에 꾸던 꿈들이 쌓이고
들녘에는 풍성한 가을이 번져 매달렸다
벼를 베고 밤을 줍고
국화꽃 향기를 전하고
느릿느릿 걷는 발걸음에는
노을처럼 빛나는 단풍잎 속에서
시 향기가 전해진다.
다낭에 흐르는 노래
김은아
흔들리는 유람선 불빛과
바다에 뿌려진 빛 조각들
유유히 흐르는 물에 흩날리는 뽕짝 가락
물에 잠긴 네온 불빛은 여행객의 마음 훔치고
나는 어디로 흘러가나
사막의 바람은 어제의 풍경을 지우듯
혼자 내려진 나그네 같은 마음 되어
유랑의 시간이 다낭에 흐른다
흔들리는 노랫가락에 흥청거리는 발걸음
어디서 나온 유전의 피인지
배에서도 춤을 추느라 정신이 없다
유람선이 바람을 가르며 여기저기에서
흥겨운 노래를 뿌린다
여행객들의 마음도 몸도 이리저리 흔들리고
나는 외로운 고요 속에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약력
신안군 팔금면 출생
2010년 <무등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2011년 <시와사람>으로 등단
전국계간문예지 우수작품상, 광주문화재단 지역문화예술육성지원사업 수혜
시집 <흔들리는 햇살>, <흰 바람벽>
주소: (62377) 광주광역시 광산구 사암로69번길 18-12
전화: 010-2682-3023
이메일: euna-k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