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2 무신을 무시한 문벌귀족의 최후 ‘무신정변’ [키워드 한국사]
이호 기자l2015년 09월 06일 10:59:40
[시선뉴스 이호기자] 묘청의 난이 실패로 돌아가자 문벌귀족들의 위상은 더더욱 높아져만 갔고 왕권은 축소되었다. 문벌귀족들은 더욱 폐쇄적으로 권력을 집중했고 권력에 취해 안하무인이 되어갔다.
이에 불만을 가지는 자들이 속출하게 되는데, 특히 무신(武臣)들이 그 주체였다. 당시에는 거란족과 여진족과의 전쟁이 많아 무신들의 공이 컸는데, 문벌귀족들은 무신들을 천하게 여겼다.
하루는 인종이 연회를 열어 정중부에게 "그대의 수염이 참으로 미염공(관우)과 같으니 참으로 대장군 감이요"라며 칭찬을 했다. 그러자 한낱 일개 무신이 임금에게 이런 칭찬을 듣는 것이 고까웠던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은 갑자기 초를 모두 꺼 깜깜하게 만들고 초를 다시 켜는 척 하며 정중부의 수염을 태워버렸다.
이에 정중부가 놀라 주먹과 발을 휘둘렀는데 김돈중이 이에 맞고 쓰러지게 되었다. 이에 문벌귀족 최고의 권력자였던 김부식은 인종에게 무신 따위가 자신의 아들을 때린 것을 고약하게 여겨 인종에게 정중부를 벌 할 것을 요청했다.
힘이 약한 인종은 결국 정중부의 벼슬을 강등시키게 되고 이 사건은 무신들의 마음에 불씨를 활활 타오르게 했다.
그리고 인종의 뒤를 이어 의종이 즉위한 후 오병수박회라는 일종의 무술대회를 열었다. 이 대회에서 늙은 대장군 이소응이 젊은 병졸과 겨루게 되었는데 이소응이 기권을 해 패배했다. 그러자 문벌귀족인 한뢰가 자신보다 벼슬도 높고 나이도 많은 이소응의 뺨을 때려 계단에서 굴러떨어지게 한다.
이에 정중부를 위시한 무신들은 극도의 분노를 느끼게 되었고 결국 어두운 밤을 틈타 잠을 자고 있던 문신들을 모조리 죽여버리게 된다. 무신들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궁궐까지 쳐들어가 의종을 거제도로 귀양 보내 버리고 그 자리에 명종을 앉힌다. 명종은 무신들의 난으로 인해 왕위에 올랐으므로 허수아비 왕이 되어 버렸고 귀양 간 의종은 이의민에게 살해되었다. 이 난을 무신정변이라 한다.
문벌귀족들의 폐쇄적이었던 권력 집중은 결국 무신이라는 커다란 적을 만들어 파멸되고 만다. 고인 물은 썩는 법이라고 할까...하지만 무신 역시 문신들과 다를 바 없는 무신정권 시대를 이루게 되어 고려의 멸망에 한 걸음 더 다가가게 된다.
이호 기자 dlghcap@sisu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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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무신정권
가. 무신정변의 배경
⑴ 문치주의에 입각한 문신의 사회적 열세(문・무관 차별 대우)
고려는 문치주의를 취하여 무신은 정치적으로 문신보다 하위에 있고 승진에도 한계가 있었고 경제적으로도 열세였다. 군사령관직도 무신 대신 문신(강감찬, 윤관, 김부식 등)이 맡았고 무신은 천대받고 문신에게 사역당하는존재였다.
⑵ 의종(毅宗)의 실정
태평호문(太平好文)의 왕 의종은 태평대・환희대・미성대 등을 짓고 환락을 즐겼고 호종하는 무신들은 호위병에 불과할 정도로 비참했다. 또 일찍이 정중부는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金敦中)에게 촛불로 수염을 태워졌고 대장군 이소응(李紹膺)은 문신 한뢰(韓賴)에게 뺨을 맞았다.
⑶ 군인들의 불평
전시과에 규정된 군인전도 지급받지 못하거나 관리들의 녹봉을 위하여 빼앗기기도 하였고 전쟁뿐만 아니라 평시에는 천역에도 동원되었다.
나. 의종 24년 170년 1170년 국왕이 보현원에 갔을 때 호위하던 정중부(鄭仲夫)・이의방(李義方)・이고(李高) 등은 반란(무신정변, 경인의 난)을 일으켜 김돈중・한뢰 등 수많은 문신을 죽이고 의종을 폐하고 그 아우 익양공 명종(明)을 즉위시켰다.
⑷ 반무신의 난
명종 3년 1173년 동북면 병마사 간의대부(諫議大夫) 김보당(金甫當)이 녹사(錄事) 이경직(李敬直) 및 장순석(張純錫)과 의종을 복위하기 위해서 거사했으나 실패했고 명종 1년 1174년에는 서경 유수 병부상서 조위총(趙位寵)이 무신에 반항하여 군사를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나. 무인간 정권쟁탈
⑴ 무장
정권을 잡은 무인들은 고위직에서 하위직에 이르기까지 관직을 독차지 하고 사유지를 확대하며 경제적 재부를 차지하고 정치적 지위와 경제적 재부를 바탕으로 무장을 하고 이를 바탕으로 권력교체를 하였다.
⑵ 이고(李高)와 이의방(李義方) 제거
처음 정중부(鄭仲夫)・이의방(李義方)・이고(李高)가 공동 통치하다가 이의방이 이고를 죽이고 자기 딸을 태자비로 삼아 득세를 부리다가 정중부의 아들 정균(鄭筠)과 사위 송유인(宋有仁)에 살해되었다.
⑶ 정중부와 경대승
이의방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정중부는 청년장군 경대승(慶大升)에 의해 살해되고 경대승은 신변안전을 위해서 100명으로 도방을 지키게 했으나 압박을 받아 발병하여 죽었다.
⑷ 이의민(李義旼)
경대승이 죽은 후 이의민이 경주에서 상격하여 정권을 독차지 하고 횡포를 부리다가 명종 26년 1196년 최충헌(崔忠獻)・최충수(崔忠粹) 형제에게 살해되었다.
다. 최충헌의 집권
최충헌은 조위총의 반란때 공을 세워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이의민을 제거한 후 박진재(朴晋材), 아우 최충수를 제거하고 독재정권을 수립하고 국왕의 권력을 무력화시키고 일생동안 두 왕 19대 명종과 21대 희종을 폐하고 20대 신종, 21대 희종, 22대 강종 및 23대 고종 4왕을 옹립하였다.
라. 최씨정권의 지배기구
⑴ 최충헌
최충헌이 정권을 잡은 후 무인정권은 정치적으로 안정된 모습을 보였다. 최충헌은 1206년 국왕으로부터 진주를 식읍과 더불어 진강후(晋康侯)라는 봉함을 받고 흥녕부(興寧府. 晋康府, 晋陽府)를 세웠다. 최충헌은 정권장악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개혁책인 봉사10조를 제시했다. 최충헌 다음에 최우(崔瑀, 崔怡), 최항(崔沆), 최의(崔竩) 순으로 집권였다.
⑵ 통치기구
흥녕부(興寧府. 晋康府, 晋陽府) | 무신정권 중심기구, 진강후(晋康侯) |
교정도감(敎定都監) | 교정별감(敎定別監). 반대세력 수색 및 비위사실 감찰 |
정방(政房) | 정색승선(政色承宣). 최우때 설치한 동지작인 인사행동기구 |
서방(書房) | 문인들의 숙위기간 |
도방(都房) | 경대승이 만든 사병집단으로 최씨정권에서 확대 |
삼별초(三別抄) |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 |
무신정권(1170~1270)
시기 | 연대 | 인물 | 내용 | 중심기구 |
제1기(성립기, 1170~1196) | 1170~1179 | 이고(李高), 이의방(李義方), 정중부(鄭仲夫) | 이의방(李義方)이 이고(李高)를 죽이고, 이의방(李義方)은 정중부(鄭仲夫)의 아들 정균(鄭筠)과 사위 송유인(宋有仁)에 살해됨 | 중방(重房) |
1179~1183 | 경대승(慶大升) | 김자격, 견룡(牽龍), 허승(許升), 김경린과 함께 정중부(鄭仲夫) 부자와 송유인(宋有仁) 참수. 병사 | 도방(都房) |
1183~1196 | 이의민(李義旼) | 조위총(趙位寵)의 난(1174년) 때 공훈. 의종(毅宗) 살해. | 중방(重房) |
제2기(확립기, 1196~1258) | 1196~1219 | 최충헌(崔忠獻) | 이의민(李義旼) 살해 | 교정도감(敎定都監. 1209~ |
1219~1249 | 최우(崔瑀)→최이(崔怡) | 1219년 추밀원부사로 아버지 최충헌의 뒤를 이어 집권. 1225년 정방을 설치하여 인사권을 장악했고 도방을 확장. 몽골의 침공 소식에 1232년 강화천도(江華遷都). 1243년 국자감을 수축했으며 사재를 동원해 대장경판 재조를 완성. |
1249~1257 | 崔沆 | 전전긍지(殿前承旨) 이공주(李公柱), 최양백(崔良伯), 김준(金俊) 등의 가노(家奴)에게 관직을 별장(別將) 제수. 집권하자 김경손(金慶孫)장군, 지이부사 상장군(知吏部事上將軍) 주숙(周肅, 본면 周永賚), 최우(崔瑀)의 계실이었던 대씨부인 참살 |
(1257~1258 | 최의(崔竩) | 이공주 낭장(郎將) 임명 |
제3기(쇠퇴기, 1258~1270) | 1258~1268 | 류경(柳璥)과 김인준(金仁俊)→김준(金俊) | 김준(金俊, 가노출신 김윤성의 아들).고종45년 3월(1258년)에 동생 김승준, 아들 김대재(金大才, 최영백 사위)·김용재·김식재과 大司成 柳璥. 神義軍都領別將 朴希實. 樞密院使 崔昷, 이연소. 將軍 朴松庇.都領別將 林衍과 함께 崔竩 참수하고 崔良伯 제거.무오정변(戊午政變) |
1268~1270 | 임연(林衍) | 원종이 임연(林衍), 강윤소(康允紹), 환관 최은(崔壄)·김경(金鏡)을 시켜 金俊 살해. 무진정변(戊辰政變). 원나라의 친조(親朝) 요구를 거부하면서 대몽항쟁을 준비하다가 근심과 울분으로 사망 |
1270~1270 | 임유무(林惟茂) | 원종이 이분성(李汾成)을 보내 해 회유당한 근위대 삼별초와 어사중승(御史中承) 홍문계(洪文系((임연의 사위 임유무의 매형)), 문하성직사(門下省直事) 송송례(宋松禮) 등에게 살해당하고 어머니 이씨와 형제들은 모두 원나라로 압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