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 사랑하는 시인
원구식
신작시_ 열병합발전소와 시간의 기원
열병합발전소와 시간의 기원
원구식
어느 날 저녁 나는, 수학적인 사고를 통해 우주의 기원을 더듬다가 꿈속에서 비몽사몽간에, 내가 어떤 진실에 아주 가까이 도달했음을 알아차렸다. 곧이어 격렬한 혼돈이 밀려왔는데, 그 밑바닥에서 나는 마침내 우주의 무의식이 우주 자체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 순간 블랙홀이 공깃돌보다 가볍게 느껴져 나는 나도 모르게 이렇게 소리치고 말았다. “오, 모든 창조자는 수학자이다!”
나는 너무 기뻐 자다 말고 벌떡 일어나 메모도 하지 못한 채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리곤 곧 의문에 빠졌다. 기라성같이 훌륭한 절세의 위인들을 두고 하필이면 왜 나같이 나약하고 게으르며 말할 수 없이 어리석은 사람이 이런 사실을 깨달아야만 한단 말인가? 이 일로 인해 혹시 그 어떤 불상사가 있지 않을까
소심한 나는 내심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곧, 당나귀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시인의 비뚤어진 성정은 이 사실을 쓰지 않으면 안 될 그 어떤 사명감 같은 것에 불타올랐다. 동이 트기도 했지만, 눈을 들어 밖을 보니 창밖이 갑자기 훤해지는 것이었다. 나는 집 밖으로 나와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불광천변을 거닐었다. 양쪽 길옆으로 자동차들이 벌써 분주하게 오가기 시작했는데, 나는 문득 그 소음 속에서 존재는 무릇 수학으로밖에 증명될 수 없고, 수학으로 증명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다시 깨달았다.
내 옆으론 새벽 운동을 나온 많은 산책자들이 무심히 지나갔는데 오늘은 그들의 걸음 하나하나가 모두 의미심장해 보였다. 나는 그들을 따라 성산대교가 보이는 한강까지 나갔다. 발걸음은 무척 가벼웠다. 보면 볼수록 감탄할 수밖에 없는 한강에 이르러 강물에 발을 살짝 담그자, 나는 비로소 시간의 기원을 찾고자 하는 나의 오랜 방황이 끝났음을 알아차렸다. 우주가 집요한 나의 질문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마침내 대답을 보내온 것이다. 나는 흐르는 강물에게, 그 강물을 받아주는 대지에게, 구름이 흘러가는 광활한 하늘에게 진심으로 나의 직업이 노래하는 시인임을 감사했다. 지금 내가 발을 담근 이 물을 통해, 지금 내가 마시는 이 공기를 통해, 지금 내가 발을 딛은 이 흙을 통해, 나는, 불처럼 번개처럼 순식간에 이 벅찬 감동을 세상에 알릴 수 있는 시인인 것이다.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열병합발전소가 내려다보이는 하늘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해발 90미터, 쓰레기 더미 위에 세워진 이 생태공원은 내가 평소 산악자전거를 타고 즐겨 찾는 사색터이다. 출근 시간 전이라 주위엔 오직 나 혼자뿐. 나는 겁도 없이 그 적막 속에 쪼그려 앉아 매우 의미심장한 눈길로 열병합발전소를 바라보았다. 보기엔 단순한 열병합발전소지만 이 발전소는 나의 방사광가속기! 오, 파동이여, 최초의 흔들림이여. 너 시간의 기원이여. 질량이여. 영원한 팽창이여. 쓰레기 입자들이 빛의 속도로 날아다니는 이 발전소를 통해 나는 오늘도 우주의 질량을 계산하고 인류의 문명을 더듬으며 아직도 발견이 안 된 새로운 시간의 입자를 찾고 있는 것이다
원구식 시인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함. 시집 『먼지와의 싸움은 끝이 없다』 외 다수. 한국시협상 수상함. 현재) 《현대시》 발행인 & 《시사사》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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