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崔致遠)
최치원의 시무 10조
時務十餘條(급선무로 시행해야할 시국대책 10여조항)이다. 내용은 전하지 않아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신라사회의 발전을 저해하는 골품제를 완화하고 과거제에 의한 인재등용을 하라는 건의 등이 피력되었을 것"(하현강 '한국의 역사' 95면)이다. 그리고 10여 개 조항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보아 선생의 평소 소신인 다음 내용도 당연히 포함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1. 임금의 덕화는 치우침도 편벽함도 없어야 한다. (귀순군 손단)
2. 정치는 인을 가지고 근본을 삼고 ........백성을 건져주는 것으로서 인을 이룬다.[政以仁爲本.......仁爲推濟衆之誠] (대숭복사 비명)
3. 신하를 알아보기는 어진 임금밖에 없다 (절서주보사공)
4. 비상한 인재가 있어야 비상한 일이 있고 비상한 일이 있어야 비상한 공이 있다. (서주나성도기)
5. 천하를 다스리려면 먼저 부정 출세를 막아야 하고 어진 선비의 진출 길을 막아서는 안 된다. (양관청치사표)
6. 장차 곤궁에 빠진 백성을 살리려면 진실로 유능한 관리들에게 의지해야 할 것이다. (수고패권지강주군주사)
7. 아래사람이 이탈하는 마음이 있는 것은 대개 윗사람이 온전한 덕이 없기 때문이다. (소의성린)
8. 예나 지금이나 사치란 다 몸을 망치는 법이다. (변하회고)
9. 풍속을 순화시키는 데 제일 먼저 할 일은 권농이다[撫俗所先 勸農爲最]. (허권섭관찰아추충홍택순관)
최치원(崔致遠, 857년 ~ ?)은 신라 말기의 문신, 유학자, 문장가이다. 자는 고운(孤雲), 해운(海雲), 해부(海夫)이며, 시호는 문창(文昌)이다. 후백제에서 벼슬을 한 최승우(崔承祐), 고려 왕건의 신하가 된 최인연(崔仁渷, 崔彦撝)과 함께 삼최(三崔) 중 한 사람.
6두품 출신으로서 경문왕 8년 868년 12세의 나이로 당에 유학하여 6년 만에 당의 빈공과(賓貢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며 황소(黃巢)의 난(875~884년)이 일어나자 절도사 고병의 막하에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당 전역에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고, 승무랑 시어사로서 희종 황제로부터 자금어대를 하사받았다. 귀국하여 49대 헌강왕(憲康王)으로부터 중용되어 왕실이 후원한 불교 사찰 및 선종 승려의 비문을 짓고 외교 문서의 작성도 맡았으며, 진성여왕 8년 894년 시무10여조(時務十餘條)를 올려 아찬(阿湌) 관등을 받았다. 그러나 진골 귀족들이 득세하며 지방에서 도적들이 발호하는 현실 앞에서 자신의 이상을 채 펼쳐보지도 못한 채 관직을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 여생을 마쳤다.
귀국 직후 당에서 쓴 글을 모아 헌강왕에게 바쳤던 계원필경(桂園筆耕)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개인 문집으로 꼽히며, 삼국사기에 실려 있는 난랑비서(鸞郞碑序)는 신라 화랑도의 사상적 기반을 말해주는 자료로서 주목받는다.
경주 최씨(慶州 崔氏)의 시조로 모셔지고 있다.
작품 : 촉규화(蜀葵花), 금체시, 계원필경(桂園筆耕) 20권, 사륙집(四六集), 상대사시중장(上大師侍中狀), 잡시부, 중산복궤집(中山覆簣集), 오언칠언금체시,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 부석존자존, 법장화상전, 석이성전, 쌍녀분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