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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당정치의 변질 |
숙종(1674~1720) |
서인 |
숙종 6년 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서인이 김석주(金錫胄) 등은 영의정 허적(許積)의 서자 허견(許堅) 등이 역모한다고 고발하여 종실인 복창군(福昌君) 3형제와 허견, 허적과 윤휴도 살해되었고 나머지 일파는 옥사・・사사・유배되어 남인은 큰 타격을 받고 실각 서인은 老論(남인에 대한 과격한 탄압을 주장한 宋時烈 등)과 少論(남인에 대한 과격한 탄압을 반대한 尹拯 등)으로 분화 |
남인 |
숙종 15년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 기사사화)은 조선 숙종 때 소의(昭儀) 장씨 소생의 아들 윤(昀)을 왕세자로 삼으려는 숙종에 반대한 송시열 등 서인이 이를 지지한 남인에게 패배하고 정권이 西人에서 南人으로 바뀜(청남(강경파) : 우의정 許穆, 尹鑴. 탁남(온건파): 영의정 許積, 權大運 | ||
소론 |
숙종 20년 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은 소론의 김춘택(金春澤) 등이 숙종의 폐비(廢妃)인 민씨의 복위 운동을 일으키자 이를 계기로 남인의 민암(閔黯) 등이 少論 일파를 제거하려다 실패하여 화를 당함 | ||
노론 |
숙종 42년 1716년 丙申處分 (丙申換局)으로 소론을 배척하고 老論을 중용함 | ||
경종(1720~1724) |
소론중심 |
老論과 少論 대립 |
Ⅶ. 월파정(月坡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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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 공원/서원
소재지 : 서울시 동작구 현충로노량진1동 15)
월파정은 옛날 판서였던 장선징(張善徵)의 정자로 한강의 달구경으로 유명한 월파정(月坡
한강 잠수교를 지나 월파정에서 바라본 석양
亭)은 조선시대 문사들이 시를 읊던 곳으로 각광받던 곳이다. 문사들은 달 밝은 밤에 한강에 배를 띄우고 달구경을 했다고 한다. 월파정은 노량진 수산시장 남쪽(뒤쪽) 자은 언덕 부근으로 현재는 음식점이 들어서 있고 그 안에 옛 정자 터였음을 알리는 장대석이 남아있다. 이 별장은 1776년 정조가 노들강 기슭에다 세운 것이라고 전해지며 그 훨씬 전 세종때의 영의정 김종서가 터를 잡고 살았다고도 전한다.
제5절 박물관
한국기독교박물관
구분 : 박물관
소재지 : 서울시 동작구 상도로369(상도1동 511)
숭실대학교 내에 위치하고 있는 한국기독교박물관은 숭실대 출신의 장로교목사이자 고고학자였던 김양선 교수와 그 가족의 노력에 의해 설립되었다. 1948년 4월 서울 남산에 설립되어 운영되던 것이 전쟁으로 휴관되었다가 개관과 폐관을 거듭하다가 1967년 숭실대 개교70주년을 맞아 부속박물관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제6절 기타 유적
Ⅰ. 노량진 수산시장(鷺梁津 水産市場)
구분 : 기타 유적
소재지 : 서울시 동작구 노들로 688(노량진1동 13-8)
노량진동에 소재한 수산물 전문 도매시장(都賣市場)으로 서울에서 거래되는 전체 수산물 중에서 43.9%의 물량이 이곳에서 거래된다. 횟감용 활어 전문시장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새벽 경매(競賣) 모습은 서울을 찾은 관광객들에게 많은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소매점포에서는 시중보다 20~30%정도 저렴하게 수산물을 구입할 수 있다.
노량진수산시장의 역사는 1927년 우리나라 최초로 서울역 근처 의주로에 경성수산 주식회사로 개장했다. 1971년 현 위치에 노량진수산물도매시장으로 자리 잡았다. 2002년부터 현재까지 수협중앙회가 노량진수산과 냉동창고를 인수 운영하고 있으며 노량진수산시장 현대화사업이 2007년부터 2015년까지 추진돼 왔다. 2000여명이 종사해온 노량진수산시장은 2013년 말 기준 이용인원이 1일 평균 3만명(1일 출입차량 5000여대)에 이르고 있다. 연간 수산물 상장물량 8만9121톤, 상장금액 3446억1800만원에 달한다.
5층 |
데크쉼터, 야외정원 등 휴식공간 |
4층 |
유통인사무실. 주차장 |
3층 |
항운노조사무실, 주차장 |
2층 |
견학로, 홍보관, 식당, 바다마트, 건어물·젓갈 등 수산물 판매장 입점 |
1층 |
1만7597㎡. 경매장과 700여개 소매점 |
Ⅱ. 노량진역 철도시발지(鷺梁津 鐵道驛始發地)
구분 : 기타 유적
소재지 : 서울시 동작구 노량진로 151(노량진1동 112)
우리나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은 서울(노량진) ~ 인천(제물포) 간 총 길이 33.2km의 철도로, 1897년 3월22일 착공하여 1899년 9월 18일 개통되었는 데 증기기관차와 함께 당시로서는 매우 충격적인 교통의 혁명이었다. 이곳에는 시인 故서정주(徐廷柱)의 시와 함께 1975년 기념비 건립당시 국무총리인 김종필(金鍾必)이 휘호(揮毫)한 철도시발지 비석이 세워져 있다.
Ⅲ. 남묘(南廟)
구분 : 기타 유적
소재지 : 서울시 동작구 동작구 학수길 238 (사당3동 180-1)
남묘(南廟)로 꼭 들러볼 만하다. 요즘 사람 중에 남묘가 무엇인지, 남묘가 이곳에 있는지 아는 이는 거의 없다. 지하철 1호선 동대문 밖 동묘(東廟)를 떠올리면 쉽게 그 연관성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때 조선을 구원하러 온 명나라 해군 제독이 진린(陳璘)은 선조 31년 1598년 남산 아래 도동에 주둔했는데 그 후원에 관운장의 사당을 세운 것이 바로 남묘(南廟)다. 관운장은 덕장(德將)으로 명나라 시대에는 무신(武神)으로 추앙받았다. 진린이 싸움에 불리할 때마다 관운장이 홀연히 나타나 어려움에서 구해냈다는 이야기도 전해 온다. 이 해에 성주, 강진, 안동, 남원에도 관운장의 사당인 관왕묘가 세워졌으며 3년 뒤 선조 34년 1601년에는 동묘(東廟)도 완성됐다. 숙종 때에는 관왕묘에 제사지내는 일을 국가 행사로 시행한 일도 있다. 고종 때에는 서묘와 북묘까지 세워 서울에만 4묘가 있었다. 서울에는 지금도 동묘, 남묘와 더불어 앰버서더 호텔 건너편에 또 하나의 관왕묘가 남아 있다.
서달산 북쪽에 있는 조계종 소속 비구니(比丘尼) 사찰로 1남묘는 동묘(東廟)와 함께 현존하는 關王廟관왕묘)의 하나로 원래 중구 도동1가 68번지(현 남묘파출소 뒤)에 있다가 1979년 1월 현 위치인 동작구 사당동 180-1번지로 이전하여 건립되었다.
동대문구 숭인동에 자리잡고 있는 동묘는 보물 제42호로 지정되어 그 원형을 뚜렷이 남기고 있지만, 남대문 밖에 위치하고 있는 남묘는 6.25전란에 폭격으로 소실되었다가 관성묘유지재단에 의해 1956년에 재건하여 복구되었다. 그 후 서울역전 도동지구 재개발로 현 위치인 사당동 180-1번지 대지 400여평에 현성전(정전)과 대문, 하당, 관사 등을 옮겨 복원하였다. 현성전 중앙에는 관성제군(關聖帝君)의 초상과 좌우제장(左右諸將), 옥천대사를 봉안하여 모시었다.
이 땅에 느닷없이, 그것도 한꺼번에 둘씩이나 '관왕묘'가 들어선 것은 요컨대 임진왜란의 와중에 대국(大國)의 원조와 군대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조선의 처지가 빚어낸 반대급부이자 부산물이었다. 하지만 참으로 묘한 것은 한번 그렇게 관왕묘가 자리를 잡게 되자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관왕'의 위상은 서서히, 그리고 아주 굳건히 조선 땅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1691년에 능행(陵幸)을 하고 돌아오던 숙종 임금이 몸소 동묘에 들른 것은 변화의 계기가 되어 국왕은 모두 기회가 닿을 때마다 동묘를 찾게 되었고 자연스레 이곳은 나라의 지극한 보살핌을 받는 장소로 탈바꿈되었던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숱한 백성들에게 관왕은 '신통방통'하고 '영험'한 존재로 통했다. 민간에서는 곧잘 '재앙을 막아주고 복을 비는' 대상으로 섬김을 받았고, 무당이나 점바치가 사는 공간마다 어김없이 관우의 형상이 등장하는 것도 그 때문으로 풀이된다.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야외 전시 구역에 옮겨져 있는 북묘비(왼쪽). 오른쪽은 서울 종로구 숭인동에 위치한 동묘의 내부. ⓒ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장장훈
어쨌거나 관왕을 추앙하는 일은 근대 시기 고종의 치세에 이르러 정점을 이루게 되어 바야흐로 관왕묘의 전성시대가 열린 것이다. 남쪽과 동쪽에 있는 두 개의 관왕묘도 모자라 임오군란 이듬해인 고종 20년 1883년이 되자 혜화문 근처 명륜동에 북묘(北廟)가 먼저 들어섰다. 잇달아 광무 6년 1902년에는 새문 밖 천연동에 숭의묘(崇義廟), 즉 서묘(西廟)가 세워짐에 따라 관왕묘가 서울 주변을 동서남북으로 하나씩 에워싼 꼴이 되었다.
특기할 만한 것은 북묘나 서묘가 창설된 것은 모두 왕실과 무녀가 얽힌 결과물이었다는 사실이다. 가령 북묘는 임오군란 때 충주로 피신한 민왕후(閔王后)에게 환궁 시기를 예언해주었다는 이른바 '진령군 대감(眞靈君 大監)'이라는 이성녀(李姓女)가 주청해 만든 것이라 했고, 서묘는 엄비(嚴妃)의 신임을 얻은 현령군(賢靈君)이라는 무녀 윤성녀(尹姓女)가 주청해 세운 것이라 전한다. 특히 북묘는 1884년에 벌어진 '갑신정변'의 현장이라는 데에 또 다른 의미가 있다. 고종 임금이 정변을 맞아 피신한 장소가 바로 '북묘'였고, 1887년에는 이곳에서 겪은 일을 담아 손수 비문을 짓고 민영환에게 글씨를 쓰게 하여 '북묘비(北廟碑)'를 세우기까지 했다.
관왕묘의 위상에 큰 변화가 생겨난 것은 1902년 1월의 일이었다. 대한제국의 황제는 일찍이 북묘에서 겪은 일을 잊지 못했음인지 마침내 관왕을 높여 황제로 삼고 그 칭호를 '현령소덕의열무안관제'로 정했다. 그러니까 1598년에 처음 이 땅에 '관왕묘'로 뿌리를 내렸고 다시 3백년이 흘러 동방의 조선에서 그렇게 '황제'가 된 이, 그가 바로 중국 후한의 장수 관우였다. 하지만 세상은 이미 국권 피탈의 시기로 접어들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시절은 그리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국력이 쇠진하고 나라를 제대로 꾸려나갈 수 없는 형편이 된 마당에 때마다 사당에 제사를 올린다는 것은 너무도 벅찬 일이었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이름하여 '칙령 제50호 향사이정(享祀釐整)에 관한 건'이었다. 1908년 7월23일에 공포된 이 칙령의 취지는 재정에 부담이 되는 제사의 횟수를 크게 줄이고, 사당은 중요한 것만 남기고 합쳐서 정리한다는 내용이었다. 흔히 육궁(六宮)으로 부르던 후궁들의 사당이 한곳에 모인 것도, 선농단과 선잠단이 사직단에 합쳐진 것도, 역대 어진을 모신 전각들이 선원전만 남기고 사라진 것도 모두 이때에 벌어진 일이었다.
당연히 네 곳이나 되던 관왕묘에 대한 정리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이로써 동서남북에 포진한 모든 '관제묘'에 대한 제사는 한꺼번에 폐지되었고, 소유권도 국유로 편입되거나 지방 관청에 넘겨지는 조치가 이어졌던 것이다. 이에 따라 서묘가 1909년 4월에 먼저 동묘에 합사(合祀)되었고, 북묘는 1910년 5월에 훼철되어 관련 비품 일체가 동묘로 옮겨지는 과정을 겪었다. 다만, 남묘의 경우에는 '남묘유지사(南廟維持社)'라는 민간 단체에 불하되어 그 존재가 계속 보존되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Ⅳ. 극락정사(極樂精舍)
구분 : 기타 유적
소재지 : 서울시 동작구 매봉로79 (본동 473-5)
서울특별시 동작구 본동사무소의 뒷산인 안산 뒤쪽에 있는 매봉재 아래의 일명 절고개라 불리는 곳에 있는데 이 절은 3·1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 양나은(梁羅隱) 대사가 현 소재지가 아닌 신작로변(일명 절고개)에 관악산에 있는 연주암(戀主庵)의 연락소 격인 포교당으로 건립하였으며 1946년 차만석(車萬錫) 스님이 극락정사라는 이름으로 독립시켰다고 전한다. 부처(佛陀)의 자비사상에 입각한 자리이타(自利利他), 인천인과(人天因果), 무상무아(無常無我)의 진면목을 찾고 호국불교의 이념을 구현하여 우리 문화와 우리의 얼을 깊이 심겠다는 태고종의 도량(道場)이다. 사찰은 법당과 요사(寮舍)가 있는 ‘ㄴ’자 형태의 2층 양옥 건물과 부속건물 1동으로 이루어진 단출한 규모이다. 법당은 바깥쪽과 안쪽으로 구분되는데, 바깥쪽이 원래의 법당이고, 안쪽은 나중에 증축된 것이다. 건물 맞은 편에는 키 높은 담을 세웠고 대웅전과 구법당 외벽의 탱화(幀畫)가 그려놓았다. 마당 한쪽에는 연못을 만들고, 연못 가운데에 감로병을 들고 있는 관세음보살상(觀世音菩薩像)을 세웠으며 연못 옆에는 석탑 등의 조형물 등을 설치하였다. 일요일마다 몽월어린이 법회와 학생법회가 열린다.
한국불교계 제2의 종파인 한국불교태고종(韓國佛敎太古宗)에 소속된 사찰이다. 태고종 승정(僧正)을 맡았던 몽월 대종사가 회주(會主;법회를 주관하는 법사)로 있다가 2003년 10월 극락정사에서 입적하였고, 2008년 현재 승도(承度;월담) 스님이 주지를 맡고 있다.
Ⅴ. 미륵암(彌勒癌)
구분 : 기타 유적
소재지 : 서울시 동작구 숭실길 (상도1동 103-2)
인 미륵전 암반 위에 둥근 모자를 얹은 큰 석조 미륵불(彌勒佛)이 안치되고 경주 옥돌로 조상한 약사보살이 미륵암의 자랑이었으나 도난당해 모사품이 대치되어 있다. 이 미륵불은 조선 성종 때 제주 고씨 문중의 이조참판 겸 의금부사를 역임한 고한형을 장이곳에 장사하려고 광중(壙中)을 파던 중 금불암이 발견되어 장지를 옮겼다는 제주고씨 대동보(大同譜)의 내용과 조선말 포목장수 단씨가 미륵불을 꿈에 보고 발견하여 암자를 짓고 모셨다는 전설로 미루어 고찰인 금불암(금불사)의 미륵불로 추정된다
Ⅵ. 약수암(藥水庵)
구분 : 기타 유적
소재지 : 국사봉 산자락
약수암은 국사봉 산자락의 에 위치하고 있는데 옛날에는 강적골이라고 하였다. 태종의 아들 장자 양녕대군(讓寧大君) 묘소가 있는 일대로서 양녕대군의 시호가 강정공(剛靖公)인데 강정골로 불려지다가 강적곡(康迪谷)으로 변한 것이라 한다. 이 마을에 철분이 많아 물맛이 좋고 몸에 좋다는 약수가 있었는데 이 약수터 주변 땅에 30여년전 절을 짓고 약수가 있는 절이라하여 약수암(藥水庵)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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