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 있음
이 영화는 '비'와 '당신'에 관한 이야기다. 살면서 누군가를 간절하게 기다려본 경험이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퇴근하는 아버지, 이사 간 친구, 사랑하는 사람, 우스갯소리로 택배 아저씨까지. 오늘 나는 영화의 감상과 더불어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림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한다. 영화의 주인공 '영호'는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물이다. 그가 첫사랑이었던 '소연'에게 편지를 보낸 이유도 거창한 것이 아니다.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과거의 기억 속 소연이 떠오른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흥미로웠던 점은 그가 과거의 기억 속에 존재했던 소연을 추억으로 남겨두지 않고 현재로 끌고왔다는 사실이다. 그의 과감하고도 실천적인 이 행동은 영화 초반 '수진'이 그에게 다가왔을 때 소극적이던 그의 반응과는 사뭇 다르다. 영호의 편지를 시작으로 소연과 영호는 편지를 주고받게 된다. 하지만 소연은 영호에게 직접 편지를 전할 수는 없었다. 그와 주고받았던 편지들은 소연의 동생 '소희'가 몸이 불편한 언니를 대신에 작성해왔던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편지라는 매개로 인해 둘의 사이는 더 가까워지는 듯 했다.
영화의 중간중간에는 2000년대 초반을 추억할 수 있는 요소들이 많이 녹아있다. 특히 햇빛에 비춰야만 내용을 알 수 있는 소희의 마술편지는 그 시절 아날로그 감성을 제대로 저격했다. 휴대폰이 없던 시절에는 편지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상대방의 답장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고 스마트폰이 나오지 않았었던 시절에는 얼마 없는 휴대폰 용량 속에 그 사람의 답장을 보관하기 위해 다른 문자들은 가차없이(?) 지워버렸던 과거를, 영호와 소희를 통해 나의 추억도 회상할 수 있어 즐거운 장면이었다.
다시 영화로 돌아왔을 때는 영호와 소연이 약속을 하고 있었다. 바로 이 영화의 핵심인 "12월 31일에 비가 오면 만나자"는 약속을. 여기서 잠깐, 감독은 왜 하필 비를 만남의 매개체로 삼았을까? 비라는 존재는 우리 곁에 있으면서 많은 소재를 가져다준다. 공포, 사랑, 우울함, 생기발랄, 이별... 감독은 비라는 소재를 기다림이란 키워드로 엮어냈다. 하지만 이 기다림의 다른 말은 희망이다. 영호에게는 '12월 31일에 비가 내리기를 바란다'는 희망이 생긴 것이다. 그렇기에 영호는 지금 당장 소연을 만나지 못한다해도 괜찮았다. 12월 31일, 비, 기다림이라는 약속이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갈 힘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결국 영호는 영화의 막바지에 자신의 길었던 기다림에 대한 해답을 얻는다.
영화를 끝까지 감상한 후 영화 초반부를 다시 보면, 영호의 인생에 첫사랑의 편지라는 사건이 불쑥 들어오게 되고 그로 인해 영호란 사람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지켜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중간중간 강소라의 감초같은 연기도 영화의 재미를 배로 만들어줬다. 이 영화의 키워드를 정리하자면 사랑, 기다림, 추억이 되겠다. 기다려도 닿지 않는 사람을 기다린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나에게도 기다림을 약속한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