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원 형님이 먼저 떠나셨다. 투사와 구도자의 도정 그리고 기행의 젊은 날을 규정하기도 거시기하지만 뭐 하나 지울 수도 없었던 그의 다난多難한 삶이 그렇게 마감되었다. 너무 많은 글벗들이 줄줄이 떠나면서 이제 슬픔을 토로할 힘조차 쇠해졌는데 그가 구천행 카드를 불쑥 뽑은 것이다. 분하다. 진도 <시에 그린> 숙소에 첫 방문한 게 불과 두 해전인데 아스라한 세월처럼 까마득하다.
그는 ‘70-80’년대에 네 차례 투옥된 이력이 있다. 1974년 <문인간첩단 사건>으로 구속된 이호철 작가의 구명 데모에 나섰다가 첫 번째 구속이 되었고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1985년 <민중교육지 사건>, 1990년 『붉은 산 검은 피』를 펴낸 <오봉옥 시인의 필화사건> 등으로 철창에 갇혔다.
특히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의 연루 과정은 헛헛할 정도이다. 유부남 복학생으로 교생 실습 중이던 1980년 5월, 백남기 님(후에 농민운동가)으로부터 연락받고 전두환 화형식에 참여했다가 고초를 겪은 것이다. ‘노량진 → 영등포 → 국회의사당 → 서대문 → 서울시청’을 거쳐 서울역 광장에서 치른 그 화형식 스크린이 외신을 타고 난리가 난 것이다. 5월 17일 계엄령 발동으로 체포되어 남산 안기부에서 팥죽이 되게 맞으면서 두 번째 구속된다.
김대중의 정치 자금으로 화형식을 준비한 것으로 말하라는 안기부의 주문이다. 김대중을 전혀 모른다고 하자 ‘김대중이 고은 시인에게 돈을 줬는데 그 돈이 배구 토스처럼 몇 바퀴 돌아온 것으로 하자’고 기획표까지 그려주더란다. 고은 시인에게는 둘째 딸이 5000원을 받은 게 전부라고 하자 그걸 100만 원으로 뻥튀기시켜 상여 값으로 변신된 것이다. 빨갱이로 만드는 일이 그렇게 간단하다. 일단 지목한 다음 기획표대로 ‘안 되면 되게’로 짜고 맞추는 작업이다. 그 그 ‘빨갱이’ 손가락질을 견디지 못한 그의 모친께서 극단적 선택을 하셨으니 참으로 아픈 일이다.
그를 실천문학사에서 처음 만난 건 내 나이 서른이었고 ‘나 홀로 짝사랑’에 사무치던 즈음이다. 충청도 소도시 황산벌 어디쯤 여고의 총각 선생 3년 차, 그러니까 신군부 집권 5년 차인 1985년 봄날, 문청 강병철에게 드디어 원고 청탁이란 게 도래하면서 들뜬 표정을 두근두근 관리했던 것 같다. 그렇게 《실천문학사》에서 발행한 무크紙 『민중교육』에 단편소설 「비늘눈」을 발표했다.
그때 편집장이었던 송기원 형님께서 일부 문장 마사지를 했다는 소식으로 후배 교사 강승구 선생에게 노여움도 토로했던 기억도 있으나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난생 처음으로 원고료 12만4천 원을 손에 쥐고 '아싸ㅡ호랑나비' 펄쩍 뛰려는 찰나 아, 해직교사가 된 것이다.
85년 8월 12일 ㅈ신문에 발표된 내용은 ‘지방대 졸업생이 사립학교 채용에서의 금품 요구에 교사 임용을 포기함’이다. 그런데 청정구역 대한민국은 사립학교 교사 채용의 금품 수수 행위가 절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 허위사실 유포가 국가를 혼란스럽게 하는 ‘국기 혼란’이고 마침내 휴전선 너머 적을 이롭게 하는 이적행위라고 담당 형사가 가르쳐주었다. 취조를 받던 그날 조간신문에서도 사립 채용 금품수수 기사가 떴으니 ‘뻔히 눈 뜬 채 코를 베는’ 사태이다.
비 내리는 늦여름.
경부선 상행 열차를 타고 해직교사 송대헌 선생 그리고 이재무 시인, 정영상 시인(작고)의 동행으로 서대문 실천문학사에서 성명서 발표하는 자리로 함께 했다. 송기원 선배가 자리를 세팅했고 출판사 주간 이문구 선생님이 성명서를 읽었다. 신문기자 수십 명의 플래시 터뜨리는 불빛이 불꽃놀이처럼 번쩍번쩍 튀었다. 그리고 며칠 뒤 유상덕, 김진경, 윤재철 선배 그리고 편집장 송기원 선배까지 우르르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었고 17명의 교사가 목을 잘렸으니, 무시무시한 시국이다.
그 후 나는 학원가를 전전하다가 여의도 동아일보 출판부에서 18개월 동안 비정규직으로 취업을 했었다. 일간 신문은 광화문에서 발행했고 『신동아』 『여성동아』 『과학동아』 등과 단행본 출판부는 여의도에 위치했었다. 그렇게 서울 연고가 마땅치 않아 동가숙서가식東家宿西家食으로 몸을 때우며 나날의 일상을 지탱하는 중이었다. 그해 세모歲暮, 신문사 강당에서 송년 회식을 하는데 어느 선배께서 술잔을 따라주며.
“힘들지?”
『화려한 휴가』의 저자 윤재걸 르뽀라이터이다. 주거니 받거니 잔을 건네다가 금세 술떡이 되어 그의 집에서 하루 신세를 졌다. 음주 검문이라도 걸리면.
“신문기자인데 폭폭해서 한 잔 했다오.”
“이번만입니다. 다음에는 봐주지 않을 테니 조심하세요.”
그렇게 두루뭉술 넘어가던 헐렁한 시대이기도 하다.
실천문학의 발행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도종환의 시집 『접시꽃 당신』이나 윤재걸의 『화려한 휴가』, 김신의 『졸병시대』 등 잇따라 베스트셀러를 펴내며 실천문학의 성장에 큰 도움을 줬다. 네 번째 징역에서 풀려난 뒤 실천문학을 그만뒀다. 그『화려한 휴가』의 윤재걸 선배를 동아일보에서 만난 행운은 일단 거기서 멈춘다.
송기원 선배는 몇 차례 더 만났다.
20년 전인가, 아마 유도혁 형님에게 도반이라는 호칭을 붙이던 갑사 ‘수정식당’으로 기억된다. 지금은 망자가 된 송성영 후배(아, 너무 아프다) 등 몇 사람과 부어라, 마시다가.
“헹님, 그때 내 소설 왜 고쳤습니까? 내가 아마추어입니까? 씨헐.”
주사를 주리면.
“내가 잘못한 거야. 히히히.”
낄낄대며 넘어가기도 했다. 그리고 여기저기 출판기념회나 공식 모임에서 만나 술잔을 기울였다.
진도 생활 3개월, 퇴거 날짜를 손꼽던 2022년 5월 22일,
송기원, 윤재걸 두 선배들께서 방문을 하셨으니 38년 만의 따땃한 위로 방문이다. 그들 모두 70대 후반으로 희끗희끗 몸에 밴 세월만큼 모락모락한 자리였다. 의신면 ‘오바네 식당’에서 생선찌개를 해치웠고 ‘시에 그린’ 이지엽 관장을 만나고 ‘강계 차담’에서 진도 개펄도 망망 바라보는 오붓한 해후였다. 윤재걸 선배는 술을 일체 대지 않았으나 송기원 선배는 마시고 또 마셨다. 그만 마시라는 제동을 전혀 걸진 않았지만 그가 먼저.
“마시고 싶은 대로 마시다가 죽게 되면 미련 없이.”
진도군 후미진 구석 해안가를 더듬어 망자가 된 여성 작가 곽의진의 생가도 찾았다. 곽의진도 47년生, 김남주, 김성동, 윤재걸 등의 벗들과 동갑내기 여성 작가는 진도 출신으로 경기여고와 단국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창작집 『비야 비야』, 『남겨진 계절』,『얼음을 깨는 사람들』'을 출간한 다음 1995년 전라남도 진도군 지산면 와우리에 귀향하여 집필실에 <자운토방>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절벽 아래 바다가 출렁거렸고 개복숭아 나무에 풋열매가 주렁주렁했다. 그 젊은 날의 남사친 둘이 열심히 먼지도 닦고 자갈도 치우는 풍경이다. 그렇게 눈시울 글썽이며 빈집을 정리하던 송기원 형님이 세상을 떠났다.
형님은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 시절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로,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소설이 동시에 당선되면서 세상을 놀라게 했다. 작품으로는 소설집 『월행』『다시 월문리에서』『인도로 간 예수』 『사람의 향기』, 장편소설 『너에게 가마 나에게 오라』『청산』『숨』, 그리거 시집 『그대 언 살이 터져 시가 빛날 때』『단 한 보지 못한 내 꽃들』『늙은 창녀의 노래』등이 수도꼭지 틀 듯 터져나왔다. 자전적 소설 『너에게 가마 나에게 오라』는 1996년 김영빈 감독, 박상민·최민수 등이 주연한 『나에게 오라』라는 작품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그리고 오늘 또 연짱으로 술에 젖고 싶으니 다시 술꾼의 몸으로 변신할 모양이다. 그리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먼저 망자가 된 벗님들껜 송구스럽지만, 나는 나머지 세월을 느릿느릿 보내고 싶다.
중2 때 유서를 쓰고 공동묘지 늙은 소나무에서 극단적 선택을 시도할 정도로 민감한 감수성의 소유자였다. 그의 소설 ‘얼굴조차 모르는 노름쟁이 건달의 사생아라거나, 오일장 미역이나 멸치를 파는 장돌뱅이 모친의 자식이라는 출신의 무게가 너무 무거웠는지 모른다” (장편소설 『숨』, 13쪽).
그러다가 조대부고 미술부 시절 친구들과 함께 호남예술제에 참여했다. 그가 제출한 것은 그림이 아니라 시였다. 그런데 덜컥 호남예술제에서 상을 받게 되면서, 선배들로부터 그림이 아닌 글짓기로 상을 받았다고 미술부 ‘줄빠따’를 맞은 것이다. 그렇게 미술부 퇴출 직후 교내 문예부로 불현듯 몸을 바꾼 것이다. 이후 서라벌예대 주최하는 백일장에서 4년 장학생으로 중앙대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했고 가끔씩 소설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