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수혼과 여성의 재혼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9대 고국천왕의 왕후인 우씨(憂氏)가 왕이 죽자, 그의 둘째 동생인 연우(延優: 산상왕)와 재혼하여 10대 산상왕(山上王, 재위: 197~227)의 왕후가 되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이렇듯 형이 죽은 후 동생이 남겨진 형수와 결혼하는 제도를 취수혼(娶嫂婚: levirate)이라고 한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따르면 ‘인도 남부에 있던 코일룸(Coilum) 왕국에서는 아버지가 죽으면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고, 형제가 죽으면 그 미망인을 아내로 삼는 것이 허용되며 이는 인도 전체에 퍼진 풍습이다.’고 하였다. 취수혼은 인도뿐 아니라, 흉노와 부여에도 있었다. 고구려의 경우는 구체적인 사례까지 등장하고 있다. 이 풍습은 조선에 투항한 여진족(向化人)에게도 남아 있었다. [태종실록] 태종 15년(1415년) 3월 1일의 기록에는 이들 사이에 형이 죽으면 형수를 데리고 사는 풍습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취수혼은 여성의 재혼이 가능했기에 존재했던 풍습이다. 다만 재혼의 상대로서 남편의 가문에서 우선권을 갖는다. 이러한 풍습은 남성 가문의 종족 보존이란 측면과, 독신이 된 여성의 생활 안정 보호라는 측면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 풍습은 주로 젊은 남성의 사망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즉 전쟁이 많은 사회에서 찾아볼 수 있다. 형이 전쟁에 나가 죽어도, 형수와 형의 가족들을 동생을 비롯한 가문에서 책임져주기 때문에 그 사회가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에서 여성의 재혼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처와 첩
 여성이 남성과 정식 혼인을 한 경우는 처(妻)가 되지만, 남성과 함께 살면서도 정식 부인의 대접을 받지 못하는 첩(妾)이 존재하기도 했다. 처는 가문의 일원으로 막강한 위치를 보장받지만, 첩은 그렇지 못했다. 게다가 첩의 자식은 서자라고 해서 시대에 따라 차별을 받기도 했다.
고구려와 백제는 다처(多妻)제였고, 첩의 자식도 왕위에 오를 수가 있었다. 고구려 23대 안원왕(安原王, 재위: 531∼545)에게는 3명의 왕비가 있었다. 첫째 왕비와의 사이에 아들이 없어, 다른 두 왕비의 아들이 서로 왕위를 다투었다. 두 번이나 왕후가 된 우씨 역시 자식을 낳지 못했지만 왕후의 자리에서 쫓겨나지 않았다. 10대 산상왕은 우씨 왕후와의 사이에게 아들을 얻지 못하자 낮은 신분의 여자와 몰래 사통하여 아들을 얻었고, 그 아들이 11대 동천왕(東川王, 재위:227∼248)이 되었다. 백제 의자왕의 경우도 2명 이상의 부인이 있어서 41명의 아들을 낳았고, 이들을 모두 1위 관등인 좌평(佐平)으로 삼기도 했다. 처와 첩의 자식 사이에 차별이 드러나지 않는다.
반면 신라 왕실과 귀족 사회에서는 일부일처(一夫一妻)제 사회였다. 신라의 21대 소지왕(炤知王, 재위: 479∼500)은 벽화라는 여인을 첩으로 얻어 아들을 낳았지만, 그 아들은 왕위계승에서 제외되었다. 김춘추는 10명의 아들이 있었지만, 당나라에 가서는 본처에서 낳은 7명의 아들만이 있다고 말했다. 김유신의 경우 정부인의 자식들은 진골 대접을 받았지만, 첩의 아들인 군승(軍勝)은 6두품 대접을 받아 벼슬이 6위 아찬(阿湌)에 머물렀다. 서자는 조상의 제사에 참여할 자격이 없고, 대를 이을 수가 없었다.
신라에서 처의 위치는 공고했다. 성덕왕(聖德王, 재위: 702∼737)은 716년 성정(成貞)왕후와 이혼하면서 비단 500필, 밭 200결, 조 1만석, 주택 1구를 지급했다. 원성왕(元聖王, 재위: 785∼798)은 앞선 왕인 선덕왕(宣德王, 재위: 780∼785)의 비였던 구족(具足)왕후를 궁에서 출궁시키면서 조 3만 4천석을 지급했다. 처로서 가문에 일정한 의무를 다한 여인을 쫓아낼 때에는 많은 위자료를 주어야만 했다.
고려의 혼인제도
 삼국시대에는 다처제와 일처제가 공존했다. 고려시대에는 다처제가 유지되었다. 고려를 세운 왕건(王建, 재위: 918∼943)에게는 모두 6명의 왕후와 23명의 후궁이 있었다. 이때 처와 첩의 차이는 정식 혼인 여부, 여성의 신분에 따라 좌우되었다. 1271∼1273년 사이에 삼별초(三別抄)를 제압하는데 공을 세웠던 고려의 무장 나유(羅裕, ?∼1292)는 처가 적에게 붙잡힌 후 새 처를 얻었지만, 적진에 들어가 옛 처를 찾아 온 후 다시 처음처럼 부부가 되어 두 처와 살았다. 1123년 고려를 방문한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은 [고려도경(高麗圖經)]에 “부잣집에서는 3∼4명의 아내를 맞이하는데, 조금만 맞지 않아도 바로 이혼한다.”고 고려의 다처제 풍습을 전하고 있다. 충렬왕(忠烈王, 재위: 1274∼1308)은 인구를 늘리기 위해 다처제를 권장하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고려시대에는 이혼이 자유로웠다. 여성도 남성과 같이 재산권 행사가 가능했던 시대였던 만큼, 남성 뿐 아니라 여성이 이혼을 요구할 수도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여성이 아들을 낳지 못하면 이혼할 수 있다는 칠거지악 조건이 있었지만, 고려시대에는 아들을 못 낳은 이유로 이혼을 당하지는 않았다.
이혼이 쉬운 만큼 여성의 재혼도 쉬웠다. 뿐만 아니라 재혼을 한 여성이 차별 받지도 않았다. 25대 충렬왕(忠烈王)의 3번째 부인인 숙창원비(淑昌院妃), 26대 충선왕(忠宣王)의 부인인 순비(順妃), 27대 충숙왕(忠肅王)의 부인인 수비(壽妃) 모두 과부 출신이었다. 특히 순비는 3남 4녀를 낳고 남편이 죽은 후 왕비가 되었으며, 그녀가 낳은 자식은 모두 왕자와 공주로 대접을 받았다.
고려시대에도 여전히 서류부가혼이 일반적이었다. 이규보는 자신은 어릴 적 부모를 여의었지만 장인에게 많은 것을 배웠으며, 결혼을 함에 있어 처가에 살게 되니 처부모의 은혜가 친부모와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
첫댓글 신라시대 왕실의 위자료 부분은 그동안 놓쳤던 부분인데, 잘 봤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