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길, 둘레길(손진호)
손진호 어문기자
북한산 ‘둘레길’, 제주도 ‘올레길’, 강릉 ‘바우길’, 제천 ‘자드락길’. 둔덕길에 선 나무와 오솔길에 핀 야생초가 걷는 이의 마음을 가볍게 해주는 산책길들이다. 이름도 대부분 고유어와 사투리다. 그래서 신선하다.
‘둘레’는 ‘사물의 테두리나 바깥 언저리’를 뜻하고, ‘자드락’은 ‘나지막한 산기슭의 비탈진 땅’이다. 둘 다 고유어다. 그런가 하면 ‘올레’는 ‘골목’의 제주 사투리고, ‘바우’는 ‘바위’의 강원도 사투리다. 이 중 둘레길과 올레길은 많은 이가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다. 표제어로 삼는 문제를 검토할 때도 됐다.
고속도로를 가다 보면 도로의 가장자리에 고장 난 차를 세워 두거나 경찰차 등이 다닐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길이 있다. ‘갓길’이다. 오랫동안 써오던 ‘노견(路肩)’이라는 일본식 한자어를 우리말로 다듬은 것이다. 휴게소를 쉼터로 쓰는 것도 마찬가지.
정재도 선생(전 한글학회 명예이사)은 생전에 노견을 ‘길섶’과 ‘길턱’ 같은, 기존에 있던 우리말로 고쳤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노견은 ‘길의 가’이고, 갓길은 ‘가의 길’이니 노견을 대신할 말로는 ‘길의 가장자리’를 뜻하는 길섶이 더 적합하다는 것. 선생은 무엇보다 갓길 때문에 길섶과 길턱이라는 우리말이 입길에서 멀어지지 않을까 염려했다.
길의 세계에도 정겹고 재미난 낱말이 많다. ‘빨리빨리’와 ‘느림의 미학’을 연상시키는 지름길과 에움길이 있다. 질러가는 길보다 돌아가는 길에 별명이 많다. 에움길은 우회로인데 돌길, 돌림길, 두름길 등도 같은 뜻이다. ‘고샅’은 마을의 좁은 골목길을 말한다.
크고 넓은 길보다 좁고 어려운 길에 관한 표현이 더 많은 것도 흥미롭다. 고생길 뒤안길 가시밭길 등이 그렇다. 아마도 인생살이가 힘들어서일 듯싶다. ‘뚝방길’은 입길에는 오르내리지만 사전에는 없다. 신문에서 본 ‘뚝방길에서의 밀어(密語)’를 표준어인 ‘둑길에서의 밀어’로 고친다면? 말맛과 정겨움이 뚝 떨어진다.
영국이 유럽연합을 탈퇴하기로 했다. 이 길이냐 저 길이냐의 갈림길에서, 남들과는 다른 길을 선택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격언은 여전히 유효할 것인가. 세계는 지금, 가보지 않은 길 앞에 서 있다. 영국의 선택이 공동체를 향해 달려온 인류 역사의 내리막길이 되지 않으면 좋으련만….
손진호 어문기자